척박한 선교현장

척박한 선교현장 (1996. 8. 31 기독공보)
    – 체코형제개혁교회와의 선교협정서 체결의 81회 총회헌의 소식을 듣고

기독공보를 통해 체코형제개혁교회와의 선교협력과 협정서 체결을 위한 헌의가 81회 총회에 상정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현지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본인으로써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이 앞으로 우리교회가 체코선교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근 체코교회의 형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체코교회의 현황

체코의 개신교는 약 10개의 교파가 있고 전체인구의 3퍼센트, 약 45만명에 불과하다. 약 10개 개신교 교파가운데 가장 전통적, 중심적 교회가 우리 교단과 동역할 교단이 “체코형제개혁교회”(이하 형제교회)이다.

“형제교회”는 2백 64개의 교회에 15만 3백 71명의 교인이 있다.  이 교회의 뿌리를 얀 후스(Jan Hus, 1419년 화형)로 부터 한다면 5백년의 역사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로 부터 공식 인정을 받은 때로부터 그시작을 본다 하여도 2백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소수교회인 까닭은 교회역사 자체가 고나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박해와 공산당의 박해속에서 교회를 지키고 신학을 발전시켜 헝가리 개혁교회, 슬로바키아 루터교회와 함께 “형제교회”는 매우 귀중한 개혁교회의 유산을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는 뿌리깊은 교회이다.

체코의 기독교 분포가 카톨릭 45퍼센트, 개신교 3퍼센트 그리고 불신자가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공식적 통계로 절반 가까이 되는 기독교 인구 가운데 실제 출석 교인은 약 10퍼센트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체코 전체인구의 약 95퍼센트를 복음화해야 하는 선교적 과제를 “형제교회”는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의 생존”을 위해 모든역량을 모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았고 지금부터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뿌리깊은 반감

1989년 이후 체코 정부가 이전에 국유로 몰수했던 재산을 원 소유자에게 반환을 하고 있고, 최근 교회재산을 반환하기 위해 정부가 법제정을 추진하자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반대를 제기해서 좌절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체코 개신교의 사황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정부가 “교회재산반환의 법”을 추진하자, TV장송이 이법에 대한 국민 여론을 직접 취재하여 방송을 한적이 있다.  이때 국민의 10명중 10명이 모두 반대의사를 표현하였고 심지어 “왜 정부가 교회 목회자(신부, 목사)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봉금을 지불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체코에서는 각각의 교파가 정부로 부터 예산을 받아 소속 목사 또는 신부에게 사례비를 지급하고 있음)

척박한 선교현장

체코 인구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불신자들은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어 목회자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목회자는 일(노동)하지 않고 책 읽고, 노래(찬송)부르고, 일요일에 몇사람 앞에서 10-20분 정도 연설(설교)하고 정부로 부터 돈을 받는 사람들이다”라고 비판한다.  1989년 이후 체코사회는 바뀌었지만 체코교회는 여전히 공산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특히 불신자들이 이해하는 교회는 카톨릭 교회이며 전체 국민의 3퍼센트에 불과하는 개신교회는 소수종파로 생각하여 개신교 자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체코는 선교의 황금어장이 아니다.  우리 교회의 눈물의 기도를 요구하는 척박한 선교현장인 것이다.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노력하는 “형제교회”형제 자매들에게 한국교회가 동역교회가 되어 함께 관심을 가지고 서로 기도하는것이 말할 수 없는 큰 격려와 위로가 될 것이다.

총회 해외선교 정책을 위한 제언

총회 해외선교 정책을 위한 제언 (1993년 10월 30일 기독공보)

우리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는 모슬렘 국가를 제와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현지인 교회(교단)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직접적으로 선교협정을 맺거나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교회협의회(CCA), 세계선교협의회(CWM) 등 에큐메니칼 기구를 통해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에큐메니칼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그들과 관계없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을 우리 총회는 펴왔다.  하나의 예가 독일이다.  우리 총회는 EMS와 선교협정을 체결하고 EMS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EMS와 협의 없이 우리 임의대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에큐메니칼 관계 따로, 해외선교 따로 시행되었던 “세계선교부” 이전의 이야기아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계선교부”가 신설되었다.

세계선교부 발족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총회 파송선교사의 양적인 증가이다.  세계선교부가 여러면에서 점점 전문성을 갖게되어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교회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아울러 그 관심들을 집중하여 매년 수십명의 선교사가 새롭게 파송되고, 선교비 예산도 수억원씩 늘어나고 있다.  특별히 옛 소련과 베트남 등 공산국가에 선교사 파송이 많아졌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관계와 해외선교는 세계선교부 발족이전의 총회해외선교와 큰차이가 없어 세계선교부 신설의 뜻이 빛바래가는 안타까움이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총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식민주의적 모델이다.  복음이 필요한 곳에 자발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방적 선교형태이다.  두번째는 동역 선교모델이다.  즉 현지 교회의 요청에 의해 필요한 인적자원을 파송하는 경우이다.  이때 원칙은 선 선교협정 후 선교사 파송이며 세계에큐메니칼 회원교회들이 동역 가능한 교회이다.  다른 하나는 나눔의 모델이다.  세계선교협의회를 축으로 하여 회원국간의 인적 물적 경험의 나눔으로서 선교를 한다.  여기서 해외선교의 용어는 나눔으로 대신하며 나눔은 일방통해이아닌 쌍방통행의 선교형태이다.  이것은 서구 제국주의 선교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것이다.

이와같이 상호모순을 갖는 모델들이 세계선교부 설립 이후에도 계속 공존하거나 확대되고있다.  이로 인해 세계 선교부는 교회, 선교사 그리고 해외교회들에게 선교활동은 있지만 선교정책과 선교행정의 원칙이 없다고 비판을 받게되었다.  따지고 보면 해외선교에 대한 많은 비판들 – 원칙 없는 선교사 파송, 동역교회를 배제한 현지 선교부 설립, 선교활동에 대한 사전 조율없이 선교사들을 같은 국가, 같은 지역에 파송하는 일, 선교사들 사이에 있는 불협화음, 주먹구구식의 선교행정, 선교사 개인의 판단과 절차에 따라 결정되는 세례식, 성만찬, 목사 안수, 장로 장립의 문제, 선교사의 안식년 문제 등 – 은 모순을 갖는 세계선교부의 활동에서 기인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순의 본질적인 해결이 없는 세계선교부의 선교정책은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선교모습을 초래하게될것이다.

선교현지교회와의 관련성을 갖는 해외선교모델 개발은 세계선교부의 긴급한 선교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분산된 빛들을 한곳에 모아 강력한 열에너지로 바꾸는 렌즈와 같이 파송 선교사들의 다양한 해외선교 모델들과 독자적이며 동시에 역동적인 개교회의 해외선교 열기를 하나의 촛점으로 집중하게 하는 세계선교부의 해외선교모델이 존재할때 비로소 총회의 해외선교의 방향성이 정
립될것이고, 지금까지 진행된 선교활동, 교회(후원교회), 총회 그리고 해외교회들과의 정당하고 일관성있는 협력이 이루어지게 될것이다.

이 뼈대가 구축되면 선교사의 후생복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자연스럽게 제시될 수 있을 뿐아니라 선교정책을 포함한 제반의 문제들이 점점 발전적 지향을 갖는 대안을 창출하는 토론의 장을 확보하게될것이다.

체코 사회의 여성의 문제

체코 사회의 여성의 문제
강연자: 즈덴까 스메따노바(총회장 스메따나의 부인)
호남신학대학교 여성지도자반 개강 세미나 강연, 1997. 3. 10.

사랑하는 자매들 그리고 형제여러분
우리 나라 체코공화국으로 부터 진실한 인사를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립니다. 체코는 유럽중앙에 있는 작은 나라이며, 여러분의 나라에서 수천 킬로미터떨어져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같은 믿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서로 연합하고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과 만나서, 우리자신들의 경험을 서로이야기 나누고 믿음 안에서 서로격려하기위해 우리들을 여러분의 나라로 초청해주신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이 만남을 무척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고백해야되는것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 제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주저함이 없이 무대에 서거나 아니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이야기하는 여성에 속하지 못합니다. 제 남편은 언제나 이야기를 하고 나는 조용히 듣는 것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때 혹시 떨거나 불명확한 것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 무엇을 말씀드려야할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랬더니 딸아이가 \"엄마! 지금까지 살아온 엄마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세요. 틀림없이 모두들 좋아하실 거예요.\"하고 저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저의 이야기여서 죄송합니다.

저는 2차세계대전 당시 태어났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에 저는 어린 시절 그리고 사춘기를 보냈습
니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어린 우리들에게 우리들은 우리부모님이나 조상들의 생활보다 더나은 \"새로운 청소년\"이라고 주입을 시켰습니다. 우리 소녀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남자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들은 남자들과 평등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하며, 각각 자신의 할 일과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우리의 가정일을 맡게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부엌주방을 빙빙 돌지 않을 것이며 대신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탁아소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이들 주위를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할수있다는것입니다. 그것은 희소식이었고 우리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졌습니다. 저는 매우 하고싶었던 직업을 가졌고 돈도 벌고 여가도 즐길 수 있어서 나는 만족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남편이 목사로 일하는 시골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첫딸이 생겼고 6개월 후에 저는 다시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무엇이 노예인지 알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12 킬로미터 떨어진 시내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돌보는 유아원이 단지 시내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쉬는 시간 정오때 아이들을 찾으러 가야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음식 장만하는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약속한 식당 역시 시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다른 모든 집안일 들을 했습니다. 정말 저는 노예였습니다. 남편의 노예가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의 노예였습니다.

둘째 딸 그리고 셋째 딸이 생겼을 때 더 이상 직장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11년간 아이들과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직장다닐때 처럼 노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집안일 하는 여자들은 마치 아주 이상한(이국적인)동물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전혀 일하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막내딸 아이에게 부모님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질문을 하면 딸아이는 얼굴만 빨개져서 한마디 말도 못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 계시며, 아버지는 목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놀림감으로 취급되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9년 우리 나라에 찾아온 자유와 민주주의로 많은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 하나님께 매우 감사하며 그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 엄마들은 아이가 4살될때 까지 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수 있게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전 세계에서 4년간의 육아 휴가가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혁명 직후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으로 희망적인 기대를 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인도주의적인 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활동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혀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자 어린이들을 돕는 Vybor dobr v le 와 같은 재단이 등장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첫 번째 부인이 그 재단의 설립자였습니다. 그녀는 어떤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우리 교인들 보다더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 교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설립하는 재단들이 생겨났습니다. 몇년전에 우리기독교에 Sdru en na podporu Domova Sue Ryder 가 설립되었습니다. 영국 국적의 카톨릭 교인이 설립자인 Sue Ryder 재단은 동역자들에의해 1953년부터 전 세계에 90여 개의 시설(집)을 건축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랑의 집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에 이들 희생적인 사람들은 이해부족과 재정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매일 그 일을 위해 기도모임을 갖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합니다.

혁명이후 그러나 더 나쁘게 변화된 것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영향들 역시 우리 나라에 침투하였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독주를 마시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들 결국 최근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까지 널리퍼져버렸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너무 많이 일터에 있어 어디서 어떻게 자신의 아이들이 방과 이후의 시간을 보내는지 지켜볼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은 매춘문제 입니다.
젊은 처녀아이들 어떤 경우에는 아직 어린 아들인 그들이 빨리 그리고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 나라 시장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비싼 수입품들을 구입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돈벌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서유럽으로 가는 우리 나라 국경부근의 도로 가에 그렇게 돈벌려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얼마전 자기 남편의 동의로 집 장만을 위해 매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중년부인과의 텔레비전 대담방송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여성들을 위해 계속적인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절감하게되었습니다. 어떤 한 지역에서는 이미 에큐메니칼한 기도 모임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런 불행한 여성들을 위한 기도를 규칙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혼자 사는 여성들 즉 과부나 이혼한 여성들의 문제입니다.
이미 어린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특별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아이들이 엄마의 양육아래 두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의무는 아버지에게 있지만 거의 대부분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어머니들은 생활비와 자녀양육을 하는데 필요한 돈을벌기위해 직장에 다녀야만합니다. 대부분 커다란 재정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아프면 좋은 직장을 떠나야하는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직장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고용자들은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 혼자 사는 여성을 채용하기를 꺼려합니다. 그것은 중년 또는 장년 층의 여성들에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1989년 혁명이후 몇몇 국영회사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잃게되었습니다. 새로운 회사들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개인회사여서 그들은 외국어와 컴퓨터 사용법을 배울 수 있고 많은 다른 능력이 있는 젊은 여성들을 선호합니다. 그들의 나이로 하기 힘든 매우 피곤한 일들만을 그들은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은 이미 그런 것을 배우고 익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찾지못하게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들 보다 더 나이든 여성들이 힘든 일로 하루를 마치게됩니다.

그리고 나이 많아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자녀가 없거나 자녀들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이 어머니를 모실만한 거처도 없고 또 어머니를 돌볼만한 시간도 없어서 양로원으로 들어갑니다. 체코에 있는 양로원들은 대체로 좋습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방하나에 침대 하나에서 세 개까지 있고 음식도 맛깔스럽습니다. 시골에도 모두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양로원은 본질적인 인간존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노인 분들에게 인간적인 말들을 나누는 분위기나 시간이 없는 일에 눌려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로 부터 경시 경멸 때론 무자비함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양로원 노인들/솔직히 말씀드려 노인여성들 – 대부분이 여성/은 서로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삶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질병들 육신의 고통, 나쁜 기분, 걱정, 세상에 대한 비통함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처럼 노인여성들은 결국 품위가 없고 창피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보내게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만나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여러분들께서 기도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공허하고 죄 많은 삶을 이긴 왕이심을 알게된것을 우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의 피가 아주 이기적인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아래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순수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허락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개강 세미나 강연, 1997. 3. 10.
강연자: 파벨 스메따나 ( 체코형제 개혁교회 총회장), 통역(번역) 홍지훈 교수
이 강연은 후에 호남신학대학에서 출간하는 신학이해 15 (1997) 397-407에 발표되었다.

1. 보헤미아 종교개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보헤미아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개혁자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수 있는 15세기의 영적인 전쟁을 가리킨다. 얀 후스는 아마도 1371년 남부 보헤미아의 마을인 후시네츠(Husinec)에서 태어나 프라하 까렐 대학 신학부의 교수요 학장을 지낸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와 작품들에서 당시의 세속화된 로마 교회, 특히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교황은 그를 출교하였고 결국 그는 콘스딴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1415년 7월 6일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후스의 후예를 후시텐 (Hussiten) 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저들의 개혁 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개혁 프로그램들은 1420년에 나온 \"네 가지 프라하 조항\" 으로 표현되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그리고 이해되도록 선포할 것. 2.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양종의 성찬을 나눌 것. 3. 사제나 감독은 세상의 권력을 포기할 것. 4. 심한 죄를 지었다면 성직자를 불문하고 모든 계층을 처벌할 것.
1414년에 프라하의 \"벽속의 성 마틴 교회\"에서 처음으로 양종성찬이 시행되었다. 이것 때문에 전 유럽의 영적. 세속적 권세는 보헤미아의 후스파 개혁을 심하게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반후스파 전쟁까지도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12년이나 진행된 후에 1433년의 바젤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타협점을 찿아 전쟁을 마감할 수 있었다.
얀 후스와 후스파 개혁자들이 15세기 전반에 보여준 종교개혁적인 노력들은 (이것은 독일의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훗날 \"보헤미아 형제연합\"이라는 이름으로 1457년 동부 보헤미아의 쿤발트(Kunvald)에서 후스파의 영적 후예들에 의해 결성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운동이 새로이 진행되는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 시대의 영적인 투쟁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보헤미아의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조금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4세기의 후반부는 보헤미아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까렐4세의 전성기였다. 그는 유럽의 십자로 중심부에 위치한 프라하를 상업의 중심지요 문화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이미 1344년에 그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프라하에 대주교좌를 설치하였고 1348년에는 대학을 중부 유럽의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하였다.
그는 경건한 군주로써 당시의 중세적인 후기 고딕 양식에 맞추고 있었다. 세상 적인 삶을 즐기고 좋아하고픈 생각은 참회하는 포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더 높은 교육을 희망하는 마음은 기적 신앙과 결합되었고 이성적인 스콜라주의는 거의 마술적인 힘이 가미된 성례를 위하여 신비적인 열광과 연결되었다.
황제 스스로는 그의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승단을 국가에 두었고 성자의 유물들을 수집하였으며 수도원과 새로 짓는 교회를 풍부한 헌금으로 후원하였다. 사제나 수도사 가운데는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자도 있었다. 교회는 점점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특권에 의하여 세속화되어 갔다. 까렐 4세와 그의 세력(프라하 대주교를 정점으로 하는)들은 이러한 과정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따랐고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사제와 수도사들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도록 시도하였다. 1378년 그가 죽은 후에 전 로마 교회는 역시 교황청이 분열되는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체코의 교회와 공공의 삶 가운데는 이러한 상황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시작하였다. 교회의 모습을 개선해 보려는 신학자와 설교가들은 결국 메아리만 발견할 뿐이었다.

2. 얀 후스의 선배들

14세기 후반에 개혁적인 신학자를 거론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크렘니에르의 요한 밀리츠(Kremsier의 Johann Milic)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는 정치적인 역량을 쌓았으며 프라하의 시의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새로 생긴 까렐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교회봉사국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는 자기 교구의 사제단을 감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는 이 직분을 매우 성실하게 감당하였고 그래서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해당 사제들을 권고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아주 깊은 회심을 느꼈다. 그의 깨어난 양심은 그 동안 자신이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지 못해 왔다는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그 역시 자신의 교회적인 위엄과 직분을 큰돈을 지불한 대가인 교황의 보호에 의하여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교회 직분을 사임하기로 결심하였고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바치기로 하였다. (아마도 프란치스칸 수도회 중심으로 진행된)갱신 운동에 따라서 그는 기독교 금욕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사람은 휴매니즘 문화의 사람이요 (배운 사람의 언어인)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 부터는 체코어로 설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타협할 줄 모르고 교만한 자들과 음란한자들과 탐욕스런 자들을 크게 질책하였다. 로마 교회의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왕이라고 해서 보호해 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높은 계층에도 동료가 있었다. 그의 웅변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계속적인 성서 해석과 공적인 생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통하여 천년왕국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의 정신적인 혼란을 위한 신학적인 답을 찿아서 교황 우르반5세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 그는 거기서 이단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에 그는 라틴어와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의 주위에 모여든 학생들과 젊은 사제들을 규합하여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그의 회개 설교를 들은 프라하의 윤락여성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고 회개하였다. 그녀들을 위하여 밀리츠는 1372년 도피성을 건립하여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협력자들과 함께 그녀들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적인 교육을 하는데 헌신하였다. 많은 이 들이 자기의 가정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들은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꾸몄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이단으로 판정 받아야 했던 아비뇽 교황청의 심판대를 경험하여야 했다. 그는 거기서 1374년에 죽었다. 그의 업적은 외적으로는 마감되었지만 그의 유산은 이제부터 다가올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열매맺는 씨앗이 되었다.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장을 처음으로 연 밀리츠의 정신적인 유산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1.무엇보다도 교회의 설교 직분과 설교 선교에 대한 강조이다. 내적인 확신에 가득치 성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곳에 청중이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2.둘째는 경건한 설교가의 사회 봉사이다. 그는 죄지은 여인이 설교대 아래에서 회개하는 것으로만 만족치 않았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3.셋째 그의 유산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찿을 수 있다. 그의 금욕적인 생활은 그 안에서 특별한 안목의 능력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포하고 선교하는 힘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살아 있는 교회의 참된 성장을 보았던 것이다.

3. Jan Hus

모든 개혁교회는 그의 정신적인 유산과 연결이 된다. 그는 1371년에 태어났다. 까렐4세 황제가 죽었을 때, 후스는 7살이었고 막 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남부 보헤미아에서부터 그는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자 프라하로 왔는데 이것은 신학 수업을 받게 하려는 경건한 어머니의 소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사제가 되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매우 열심히 성서를 연구한 결과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찿아왔다. 까렐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제 철학 과목의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1402년에는 새로 생긴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가가 되었다. 프라하에 있는 교회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을 의미하였다. 이 교회는 밀리츠의 제자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거기서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체코어로 설교되어지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후스는 두 가지의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그가 대학생들을 교육하는 대학교회와 프라하의 모든 계층 앞에서 거룩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 학생, 수공업자, 사제와 궁정 신하 심지어는 왕비까지도 모여들었다. 후스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청중이 그의 선포를 잘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이해랄 수 있도록 해석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서를 새로이 번역할 필요를 느꼈으며, 고대 교회의 신조를 해석하고 예배의식에 체코식의 찬양을 넣을 필요도 느꼈다. 후스는 교사요 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상담자요 고해성사 사제 역할도 하였다 그의 목회적인 영적 자질은 벤젤(Wenzel)4세(까렐4세의 아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어서 그는 마치 프라하의 대주교와 같은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점점 성직자들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많은 그의 친구들은 떨어져 나가서 오히려 그의 적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주교 츠에서 그의 설교직을 박탈하자 그는 이 직분이 그리스도로부터 수여되었다는 근거로 대항하였다.
후스의 대적들은 후스의 사상이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과 연결된다는 점을 들어 그를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작품은 이미 당시에 이단으로 판정 받은 바 있었다. 위클리프의 서적들을 불태우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에 대주교는-곧 뒤이어 교황도-그를 출교하였다. 후스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는 네아플 왕과의 전쟁 비용을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저들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해졌다. 출교는 이제 프라하에서의 성직금지 명령으로 강화되었고 모든 교회적인 의식이 금지되었다. 이제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교회의 개혁을 위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자신의 저술들을 발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 해제, 십계명 해석, 주기도문 강해, 성직 매매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그러는 사이에 교황청의 분열을 해소하고 이단을 박멸하며, 교회의 갱신을 시행하기 위하여 남부독일의 콘스탄쯔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역시 후스도 미신이라고 여겨지던 자신의 가르침을 취소하도록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의회 앞에서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는 사람임을 증거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쯔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심문 받았고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당하였다. 반
년 가량이 지난 후에야 후스의 친구들은 그의 공개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후스의 대적들은 어떠한 신학 토론도 하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후스를 공의회의 결정에 순종하도록 강압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기독교 교훈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질문의 가장 높은 판단 기준은 교회 정치가의 모임이나 회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후스는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즉 콘스탄쯔 종교회의의 기본적인 논제는 교회의 참된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교황을 중심한 교회 공의회가 그 정점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교회의 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말씀인가? 결국 후스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공의회, 즉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던지(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판 대가이다)아니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던지(이것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의 선택이었다. 이것은 물론 후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내적인 갈등을 야기하였을 것이다.-이것은 지금까지 수집된 후스의 서신이 증거 한다. 후스는 죽음의 공포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신뢰해 온 청중과 동료들을 그릇된 길로 다시 빠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그리스도의 진리을 배반할 수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콘스탄쯔의 감옥에서 겪는 그의 영적인 투쟁은 그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수호하려는 그의 모습은 콘스탄쯔 공의회 참석자들에게는 심한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1415년 7월 6일 화형을 선고받고 장작더미 위에 올라야만 했다.
후스는 한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신학에는 스콜라주의의 신앙적 유산이 남아 있기는 해도 그는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향을 행사하였다. 가장 지존하고 능력 있는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담고 있었다. 교회란 인간의 공동체이지만 복음을 믿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공동체이다. 교황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복종하는 한 후스도 교황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후스는 교회의 봉사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모범을 보이는 삶을 기대했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그는 그의 신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여라, 진리를 애써 찾고,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라! 진리를 사랑하고, 죽기 까지 진리를 수호하여라!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죄와 사탄과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민족에게 커다란 동요를 불러 일으켜 강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후스의 후예들은 까렐 4세의 둘째 아들로 형 벤젤(Wenzel)이 죽자 보헤미아 왕으로 등극하려던 황제 지그문드에게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의 지방 영주들도 그를 왕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후스의 신변을 보장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에서는 후스가 심판 받고 처형되자 지그문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심각한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보헤미아의 반항은 처음에 소위 후스파 전쟁으로 불렸는데 이 전쟁은 약 20년간이나 황제와 교황의 십자군에 대항하여 지속되었다.
후스파는 거의 모든 전쟁에서 우위를 점거하였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보헤미아에 커다란 고통과 황폐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적대자(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을 훼방해도 결코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헬치체의 뻬뜨르(Petr z Chelcice) 같은 사람인데 그는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인 동시에 후스파가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이 민족 사상가는 훗날 보헤미나와 뫼렌 형제단 결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4. Petr z Chelcice
1380년에 태어난 그는 후스보다 몇 살 어렸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이 시작된 남부 보헤미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체코어로 된 작품들을 읽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훗날 왈
도파의 신앙과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거의 모든 논쟁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의지는 성서를 통하여 계시되며 인간 행동의 기준이 되므로 그는 교회 안에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모든 공동체에게, 세상과 교회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하며 자신의 실존을 이 세상 적인 권세의 보호 아래서 구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신앙으로 헌신하며 사랑과 소망의 길을 따라야 한다. 믿는 사람을 심판하고 성서를 반대하도록 허락된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이 있거든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헬치체는 심판자로써의 교황과 주교권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그는 성지 숭배나 성물숭배에 반대하였고 연옥설을 거부하였으며 면죄부 판매나 화려한 생활 그리고 수도원 고행 등도 반대하였다. 사제들에게 기대하는 바로는 진실한 신앙, 예배 때에 순수한 정신과 모범적인 생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보조 도구로써 엄격한 교회 훈련을 실행시켰다.
또하나 그의 중요한 사상은 그리스도에의 복종과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죄와 악마를 대항한 싸움이다. 그는 결코 국가권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사람을 귀족, 성직자, 평민 세 가지로 나누는 것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민족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까지 사라져가는 소수자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당시의 교회는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업는 타락한 집단이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그리스도 교회의 그물은 두 마리의 고래에 의하여 찢겨졌는데, 그 고래는 교황과 황제라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잡은 고기를 다 놓쳤다.
헬치체 역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체코어로 된 것으로 그 가운데는 중요한 것으로 \"영적인 투쟁에 관하여\" , \"세 가지 계층에 관하여\", \"설교집\", \"진실한 신앙의 그물\" 둥이 있다.

훗날 후스파의 대주교인 프라하의 얀 로키차나(Jan Rokycana) 헬치체의 작품들을 그의 진실한 청중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남부 보헤미아 출신의 기독교 사상가는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영적인 아버지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에는 유일한 교회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들인 프라하의 루까쉬(Lukas z Prahy), 얀 아우구스따(Jan Augusta), 얀 블라호슬라브(Jan Blahoslav),얀 아모스 꼬멘스끼(Jan Amos Komensky 일명Comenius) 같은 개혁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밀리츠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인간 영혼의 구원이 모든 회개자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특징이 있다.
후스의 경우에는 모든 신앙의 영역에서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헬치츠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법이 모든 교회 적인 기관과 전통 위에 권위를 가진다는 강조가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사는 신앙은 자유롭게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교회에로 부르심은 이미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폭력도 거부하고 인간 사회를 구분 짓는 사회적 계급도 타파하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길, 그 길을 가신 주님을 따라 순종하며 걷는 것 거기에 승리가 있다.

미자립 체코교회의 미래

미자립 체코교회의 미래
– 파벨 스메따나(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코스트니츠께 이스끄리 (1997. 8. 30), 기독공보 (1997. 10. 4)

이질문뒤에 매우 구체적인 염려가 있다. 개교회들이 모든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불해야만 될때 많은 우리 개교회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개교회들은 서로 연합해야만
되고 그들의 일은 무기력하게 될것이다.
개교회가 물질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받아야 된다는 의식은 매우 낡은것이다. 중세시대에는 후원하는 귀족이 재정을 책임졌고, 건물 관리와 개인비용을 위한 사용이 가능한 넓은 땅과 산림을 교구와 특별한 수도원은 소유하였다. 교인이든지 아니든지 부과된 세금을 지불해야만했다. \"똘레랑스 허락\"(역자의 주 – 1781년 오스트리다 카톨릭이 체코 개신교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으로 100가정 500교인의 개신 교회가 생겨났고, 이 숫자는 목사와 교사의 인건비를 지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였다.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된 교회\"(역자의 주 – 오스트리아로 부터 독립되면서 장로교회와 루터교회가 연합을 하게됨 이것이 현재 체코형제개혁교회가 되다)는 모든 경비를 지불할 수 없는 개교회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개교회 상황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특별히 작다는것은 반드시 약하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소금과 누룩에 비유하셨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대규모의 사회로써 개교회를 묘사하지않았다. 처음 교회의 토대를 만든 예루살렘 공동체를 제외하면 비교적 작은 청중의 구룹이었다. 하찮은 숫자(매우 적은 무리) 그 자체가 교회를 불안하게 만드는것이 아니다. 신약은 기독교의 믿음이 인간 실존에 스며들도록 그리고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보여주기위한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의 노력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즉 양이 아니라 질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도시와 각 지방을 보았다. 그들 도시들에는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처음에 교회의 물질은 가난한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데 필요하였다. 초대교회의 운영비는 최소한이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고 큰 예배당과 교회의 건물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비용은 헌금으로 모았다. 하나님의 것에 대해 헌금하는것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생활이 되었다. 교회 수익으로된 모든 재산은 특별하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헌금에 대해서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할때 자신의 헌금은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바쳐야 한다.

디아코니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교회의 연합안에서 서로 돕는것이다. 그예가 고린도후서이다. 사도들은 관대함과 기꺼운 마음으로 헌금하도록 믿는이들을 일깨우고 있다. 말씀의 능력안에서 믿음의 삶,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도움안에 있는 믿음(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그리고 사랑의 사역에 동참하는 즐거운 마음을 그들은 믿었다.

오늘의 상황

<어떻게 큰교회가 되나?>
카라피아트(역자의 주 –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목회자)는 모든 성인 교인들이 주님의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고 하였다. 나에게 교회의 크기는 두가지 관점을 준다. 목회에 대한 관심이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교인 숫자를 의미한다. 개교회안에서 평생사역을 한다는것이 목회자의 신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모이지 않는곳, 신자들이 성경공부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곳, 교인들이 기대하지 않기때문에 목회가 이루어 지지 않는곳에 갈 수 있고 자립이 불가능한 교회도 가치가 있게된다. 외로운 형제 자매들 그리고 늙어 교회에 나올수 없고 교회의 일군이 될 수없는 형제 자매들을 진심으로 돌보게 된다.

<언제 개교회가 자립이 되는가?>
개교회가 자신의 설교자를 세울 수 있다. 반면 개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목사와 관리자를 세울 수 없다. 자립교회를 위한 결정은 당회의 기능이다.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에 따르면 설교자는 장
로들 가운데 특별한 사명을 가진 한 사람이 된다. 동시에 다른 은사를 받은 나머지 장로들이 봉사를 함께 해야한다. 미자립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의 장래는 장로들의 열성적인 봉사에 달려 있다.

교회안에서의 희생

희생에 대해 아주 드물게 논의 된다. 희생이라 하면 대개 경제적인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교회의 결정자는 경제적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력을 자진자였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역대 총회장 가운데 한분이 재치있는 농담으로 : \"믿음은 휙소리가나고 믿음아닌것은 땡그랑소리가 난다.\"라고 했다. 교회는 자기보호 본능으로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위하는것 보다 주느것을 더 생각해야한다.

<개교회간의 연대를 발전 시키기>
개교회간의 파트너십은 \"연대 기금\"(역자의 주 –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끝나는 내년 이후 교회가 재정적 지원을 하기위해 개교회들이 일정한 분담금을 총회로 보내는것)을 이룩한다. 만약 어느 정도 힘있는 몇몇 개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과시 그리고 자만이 아니라 감사가 된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때문이다.

<건물들이 큰 문제이다>
교회는 세워짐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모델은 단지 천막으로된 순례 여행의 모델이다. 혁명이후 지금까지 우리들은 주거지역에 한곳의 선교지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는자가없는 장소에 예배당을 세워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협력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분열된 교회는 소비적이다. 기독교인의 연합은 경제적이 된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찾자. 교회는 정부에 의지하는것이 아니다.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보며 주님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본다. 지상의 교회는 끝에서 두번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