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평화의 왕

이 스가랴서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기 9절에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뜻합니다. 또한 10절에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은 남유다를 대표합니다. 이를 감안해서 읽으면, 대체로 이런 뜻이 됩니다. 한 왕이 이스라엘에 임할 것인데, 그는 공의와 구원과 겸손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며, 마침내 이스라엘과 이방에 화평을 전하고, 온 세상을 통치하리라. 여기서 두 단어가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는 ‘겸손’입니다. 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온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승리와 구원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화평’입니다. 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임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언급된 이 ‘겸손한 화평의 왕’은 누구를 말하는가? 그는 바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셔서 온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겸손한 화평의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그 땅에 가져오길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저 사람들’, ‘저 이방인들’, ‘저 죄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만 응징한다면, 그들로부터만 해방된다면, 바라던 세상이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문제의 근원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죄…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또한 그들 서로간의 관계 속에 속속들이 파고들어있는 죄와, 그것이 초래하는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들을 보시며 슬퍼하셨고, 또한 때때로 분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방인과 죄인들을 다른 시각과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고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은 그들을 배척하고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복을 그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죄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 피흘리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의가 또다른 불의를 낳고,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낳고,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는 그 죄의 악순환을 끊고, 의가 또다른 의를 불러오고, 평화가 또다른 평화를 불러오고, 기쁨이 또다른 기쁨을 불러오는 구원의 선순환을 일으키는 길.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그 소망 가운데 자기를 낮추고 모두를 품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며 함께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에 시작점이 되는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장사하는 집,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놓은 그곳이 다시 만민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집이 되도록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그분의 희생이 많은 사람을 위한 생명의 양식, 죄 사함의 새 언약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이어 종의 모습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이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밤에 몰래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를 잡으러 온 무리에게 저항하지 않으시고 잡혀 모욕과 수난을 겪으신 후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그를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찢긴 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죽어 묻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드러내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다시 그들을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남겨진 제자들은 얼마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능력있는 증인들로 다시 세워집니다. 이후 그 제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누구든지 그 복음을 믿는 자마다 새 생명을 얻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이전과는 다른 곳에 속하여 이전과는 다른 생명으로 살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 일이 바로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그 받은 은혜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의 길에서 의의 길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경험하고 이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은 오래전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그 구원의 선순환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불의에 불의로 반응하지 않고, 폭력에 폭력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용납과 용서의 삶을 실천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며, 선으로 악을 이기려 합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 위에서도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의 꽃을 피우려 애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땅에 만연한 죄를 가벼이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그것에 대해 슬퍼하고, 그것에 대해 저항합니다. 하지만 그 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 자신에 의한 보복과 응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 가신 겸손한 평화의 길을 따르려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온전한 평화, 온전한 승리, 온전한 구원을 소망하며 겸손히 몸을 낮추고 내 주위 사람들을 끌어안고자 노력하려 합니다. 어느덧 빼어들고 있던 칼을 도로 칼집에 꽂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내 생명을 의탁하려 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5)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4:18)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만이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기적은 또다른 기적을 불러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