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요14:2-3)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 계신 그곳으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은 그 영원한 집의 주인 자격으로 친히 그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환대를 표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후에 그들이 두고두고 이 때 일을 기억하며 끝까지 담대하게 그곳을 소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또한. 그들에 대한 ‘용납’(acceptance)의 의미를 갖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준다는 건, 그의 더러운 부분을 내 손에 댄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씻겨주는 자나, 씻겨지는 자 모두에게 부담스런 일일 수 있습니다. 한 쪽에게는, 나의 부끄러움을 그와 공유하게 된다는 의미이고. 다른 쪽에겐, 나의 깨끗함이 그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의 이 반응은 “어떻게 주님이 내 발을… “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께 내 발을… “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공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공유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안으십니다. 이로부터 내 안에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나는 점점 더 나를 그분께 내어드리게 되고. 그에 따라 예수님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셔야 했습니다. 그가 조만간 실패하고 좌절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 때 일을 기억하며 다시 용기내길 바라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의 더러운 발을 자기 손으로 받아 안으셨다는 걸 생각하며 말입니다.
이제, 관계적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 날 예수님이 발을 씻어 주신 사람들 중에 ‘그 사람’도 있었을까. 1절에서,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말하고. 바로 이어 2절에서 뜬금없이, 가룟 유다 얘기를 꺼낸 요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럼 유다는 그 생각을 가지고 딴 데 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까. 힌트가 되는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10절 하반절에,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21절에,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26-2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어 30절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로부터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날 저녁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 주신 사람들 중에 그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사람까지 사랑으로 섬기셨는가. 그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의미였을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가 후에 자기를 팔아 넘길 걸 아시며 그를 제자로 택하셨을까요. 그렇게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분명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유다는 돌이킬 수 있는 여러 기회들을 모두 살리지 못하고 끝끝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나가 파멸한 이의 대명사라 할 것입니다. 그는 돈의 유혹에 취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틈을 파고듭니다. 예수님의 길에 실망한 그의 마음에 그분을 돈받고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나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그 나쁜 생각을 몰아내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 2절과 27절 사이의 시간에 주목합니다.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넣어준 나쁜 생각이 존재할 때와. 아예 사탄이 그의 속에 들어가 이를 실행하게 되는 시점 사이. 그 사이의 시간은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역할을 맡기로 이미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렇게 되어버린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마지막 기회의 시간에. 예수님은 그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환대와 용납을 그에게 베푸신 것 아닐까요. 혹시 그가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가 돌이킨다면 아직 예수님 안에 그의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끝까지 그의 발을 씻어 주시며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닐까요.
하지만 베드로와 달리 유다는, 끝끝내 돌이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그저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말하곤 하지요. “그래봐야 소용없어! 결과는 똑같애! 원래 그런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