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10월 14일)
- 마태복음 23장 23-3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반면교사 – 그들의 잘못을 거울 삼아 - 마태복음 23장 23-37절.docx
십일조 규정은 이렇게 허브식물들에까지 적용하며 철저히 지키게 하면서, 정작 그 율법의 근본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어디다 갖다 버렸느냐?
‘정의’(justice)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따라 사람이 그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는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생존권과 공정한 소송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잘못된 상황에 개입하여 이를 바로잡고자 애쓰는 일과 관련됩니다(레19:13-16).
‘긍휼’(mercy)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이를 너그럽게 용납하고 마음을 합하여 그와 고통을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긍휼’은, 가난한 이웃을 향한 너그러운 나눔과 배려, 내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일, 고통받는 이웃을 피하여 숨지 않고 그와 마음을 함께하는 일과 관련됩니다(레19:9-10,17-18;사58:6-10).
또한, 여기서 ‘믿음’(faithfulness)이 의미하는 바는 ‘신실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또 이웃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실함’은 우상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 이웃에게 거짓말하거나 그의 것을 속여 빼앗지 않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길을 가는 것과 관련됩니다(레19:3-4,11-12;합2:3-4).
이처럼 율법의 모든 규정들은 사실, 작은 생명 하나도 업신여겨지거나 침해되지 않도록 그 팔로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정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고, 그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결국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수와 가르침 속엔 이 본질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무수한 규정들 하나 하나를 지켰냐 안 지켰냐에만 관심을 두었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평가하고 정죄했으며,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정하고 해로운 자들로 분류하며, 소위 ‘참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배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마치 사람들을 체로 걸러내는 일과 같았는데, 예수님 보시기에 그것은 작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큰 낙타는 삼켜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철저히 구현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모든 규정도 철저히 준수하라는, 부담을 더 얹어주는 말씀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율법규정을 준수하는 일과 그 속에 담긴 근본정신을 기억하고 구현하는 일이 서로 분리되지 않게 하라는 권면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십일조 규정이든, 안식일 규정이든, 제사 규정이든… 모든 율법 규정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주신 것이니 성실히 행하려 노력하되,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잊지 않고 구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당시 그들이 범했던 잘못은 얼마든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빠질 수 있고, 우리가 이웃에게 행하는 구제 속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빠질 수 있고, 우리 서로간의 관계와 교제 속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실함이 빠질 수 있고, 우리가 말과 삶으로 행하는 전도와 선교 속에도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이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 연수가 오래 되고, 성경 지식이 많고, 영적 체험도 많이 한 사람이 어떻게 저리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알맹이가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신앙 행위가 한번 두번 이어지다 시간이 흐르면 얼마든 그렇게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때로는 정반대로, 정신과 마음이 중요하지 외적인 종교행위 자체는 별로 의미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바람직하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다시금 겸손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를 실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이 되기를 기도하며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들이 겉만 신경쓰고 속은 더럽게 방치하고 있다 하십니다.
본문 25-26절 말씀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깨끗한’ 물건만 접촉해야 한다는 의식에 과도하게 얽매였습니다. 그래서 잔이나 대접 같은 각종 주방기구들의 청결에 매우 신경썼을 뿐 아니라, 이방인이나 죄인들과는 부정을 염려하여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피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그들 눈에 좋게 보였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이렇게 외면적인 정결에는 집착하면서도, 정작 자기 내면의 더러움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하시며, 실제 그들 속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 하십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체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개인적 욕구에만 집중하며 강력한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겉과 속의 모순을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이, 그들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사람들이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