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설교 – 2018. 09. 02

Text: Římanům 10,16-21
본문: 로마서10, 16-21

Ale ne všichni přijali evangelium. Už Izaiáš říká: ‚Hospodine, kdo uvěřil naší zvěsti?‘ Víra je tedy ze zvěstování a zvěstování z pověření Kristova. Ptám se však: To snad nikdy neslyšeli zvěst? Ovšemže slyšeli! ‚Po celé zemi se rozlehl jejich hlas, do nejzazších končin jejich slova.‘ Ptám se tedy: Nepochopil Izrael, co mu bylo zvěstováno? Nepochopil; už u Mojžíše se přece říká: ‚Vzbudím ve vás žárlivost na národ, který není národem, proti národu pošetilému vás popudím k hněvu.‘ A Izaiáš má odvahu říci: ‚Dal jsem se nalézti těm, kteří mě nehledali, dal jsem se poznat těm, kteří se po mně neptali.‘ O Izraeli však říká: ‚Každý den jsem vztahoval ruce k lidu neposlušnému a vzpurnému.‘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Kázání
1. Ne všichni přijali evangelium. To je skutečnost, kterou musel apoštol Pavel vzít na vědomí. S bolestí ji po dvou tisících let bereme na vědomí i my. Evangelium se zvěstuje, dokonce v nejzazších končinách země. Je málo míst na světě, kam by vůbec neproniklo. A přece: ne všichni ho přijali.
모든 사람이 복음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어야 했던 사실입니다. 지난 2 천 년을 돌아볼 때 안타깝지만 우리 또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증거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2. Můžeme se ptát, zda jsme zvěst o Kristu předali a předáváme čistě – překrucování a komolení, které z původní průzračné vody dělá nechutnou břečku, co se nedá pít. Musíme také uvážit, jak svědčíme o Kristu vlastním každodenním životem. Možná hlavně kvůli našim různým proviněním a chybám se evangelium stává pro druhé nevěrohodným.
우리는 순결한 복음을 전했는지 또 지금 전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처음 순수했던 물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개울가의 물처럼 마실 수 없는 물로 만들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됩니다. 왜냐면 우리의 여러 허물과 잘못으로 인해 복음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지 못 할 것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Katolický teolog Karl Rahner řekl, že člověk, k němuž se křesťanství dostalo ve znečištěné a nevěrohodné podobě, má právo ho odmítnout. Dnes se slovem „křesťanský“ označuje mnoho věcí, které s Kristem nemají nic společného. Pak se nemůžeme divit, když lidé Kristu nedokáží říci své ano. Vždyť by jednali proti svému svědomí!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만약 어떤 사람에게 기독교가 불순하고 믿지 못 할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기독교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적인“ 이란 단어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가리키는 그런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들의 „yes“를 말 할 수 없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그들의 „yes“를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4. Přesto ale nadále zůstává původní Pavlova otázka: Proč evangeliem zůstal neosloven starozákonní Boží lid – tedy ti, kdo ho směli zaslechnout skutečně jako Boží slovo, a ne jako lidské slovo, které se za Boží jen vydává? Už mnohem dřív se Izraelcům Hospodin zjevil jako jejich Pán, Stvořitel, Zachránce. Tak proč nyní nepřijali Krista, v němž tento Pán přišel mezi nás? Apoštol Pavel neřeší všeobecný teologický problém, který se dá prostě odsunout z pracovního stolu, když si s ním nevíme rady. Trápí ho cosi velmi osobního. Pavel byl Žid a ke svému původu se vždy hlásil – a to nejen předtím, než se stal křesťanem, ale i potom. Proč si moji bratři a mé sestry, ptá se Pavel, nenašli cestu k Mesiáši, kterého přece oznamovali odpradávna proroci a k němuž se upínaly naděje Izraele? Proč Ježíš přišel do vlastního a jeho vlastní ho nepřijali?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처음에 언급했던 질문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왜 복음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습니까? – 즉,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만 사람들을 통해 전파된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왜 복음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습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창조와 구원의 주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괴롭히는 아주 개인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되기 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이 되고 난 후에도 그가 유대인인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의 형제 자매들이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메시야라고 말해왔던 그 메시야께로 가는 길을 찾지 않았는지, 왜 그 메시야에게 희망을 두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에 왔지만 왜 그의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