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손신일

성경본문: 야고보서 2 1-7

1 형제들아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있든지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1. 사도행전 10장 34-35절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말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시장했을 때 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하늘의 계시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에는 나라나 민족으로 인한 차별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율법을 받은 백성과 율법을 모르는 백성을 구별했습니다.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유대인)과 외국 백성인 이방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엄격하게 나뉩니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도 이방인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베드로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2. 매년 3월 1일은 한국인들이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며, 올해는 10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한반도는 열강의 아시아 침략 가운데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한을 품고 민족대표 33명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세우며 1919년 3월1일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운동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만, 이 3.1운동이 2차대전 후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배는 양 민족 간의 원한과 갈등을 낳아, 현재까지 한일 두 나라를 가로막는 높은 벽으로 남아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 일은 비단 한국과 일본만이 아니겠습니다. 체코와 이웃 나라 독일 사이에도 서로를 떼어 놓으려는 힘이 늘상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족 간의 갈등을 갖지 않는 나라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이나 문화가 다른 민족 사이의 차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다양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빈부의 격차로 인한 차별이 있고, 학력이나 출신지로 인한 차별이 있습니다. 사회의 마이너리티에게는 까닭없는 차별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세계 어디에도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사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3. 아쉬운 일입니다만, 주님의 교회에는 아무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민족 차별, 남녀 차별, 성적 마이너리티를 향한 차별, 지위나 빈부의 차이로 인한 차별 등이 교회 안에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특히, 부정(不淨)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일반 사회 이상으로 교회 안에서 커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세상의 모든 죄를 깨끗이 하여 주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깨끗함을 받는다면, 모든 차별이나 편견은 사라져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부정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의 죄이며, 부정한 것이라 하여 차별하려는 죄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벽을 만듭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멋대로 부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 사회의 모든 갈라놓음,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리여야만 할 것입니다.
  4. 봉독한 본문 말씀 야고보서 2장에서 사도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차별’이란, 부자를 잘 대접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옷차림의 사람은 친절히 대하고, 보잘것없는 행색의 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에 대해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  사람을 빈부의 차이로 다르게 대접한다면, 교회 안에 차별이 있게 됩니다. 빈부로 인한 차별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부자가 우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주님의 교회에서 그것은 악한 생각으로 인한 잘못이며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에서 부자에게 아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푸대접하는 일은 주님의 뜻을 배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접하는 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차별한다면, 그 토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5. 2장 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심지어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택하시고, 믿음으로 인도하시고, 약속의 나라를 잇는 자, 즉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지혜나 능력이 있고 문벌이 좋은 자가 택함을 받지 않고,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 없는 사람들을 택하신 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멸시 받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는 교회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는데,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천대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교회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장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연히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습니다.
  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우리의 구원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깨끗이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십자가 밑에는 어떤 차별도 편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결코 사람을 갈라놓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은 약한 자, 미련한 자, 멸시 받는 자, 가난한 자를 택하시고 믿음에 풍성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교회가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하십니다.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그 다름으로 인해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깊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데 그 다름이 기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보다 풍성히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름이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를 갈라놓는 차별의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증거하는 우리 주님의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