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8월 26일)
- 에베소서 2장 1-10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은혜로 받은 구원 - 에베소서 2장 1-10절.docx
<에베소서 2장 1-10절>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아마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을 기독교 교리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것이 여러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5절 하반절에,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리고 8절에서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 두 구절 모두 ‘구원’을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이미 완결된 사건이란 뜻이라기보다, 이미 체험된 사건이란 의미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이미 우리들 속으로 뚫고 들어왔고, 이제 우리는 전과 다른 새로운 실재 안에 있음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구원 이전과 이후를 대조하며 묘사하는데요,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살게 되었다! 전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다! 전에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 선한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렇게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 사랑을 입고 나타내는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나? 은혜로! 은혜에 의하여!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앞에 ‘오직’이란 말을 덧붙여 그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첫번째 구호로 삼았습니다.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우리를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내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그 일에 우리 자신이 기여한 바가 하나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구원이 우리의 결핍과 기대와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완전한 공짜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결핍을 인식하고 그 결핍된 것을 채우려 애쓴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하다 생각해 구한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결과가 아니며, 우리가 기대하고 욕망했던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딱 그만큼 채움받은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연히 “이건 아닌데…” 느낄 때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내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던 그 때에, 우리는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누리는 이 새로운 구원의 실재에 대해 그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걸 욕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 이전의 상태는 구원에 관한 한 ‘무지’의 상태입니다.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주어질 것들을 아직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후에야, 그 새롭게 주어진 더 나은 실재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 이전에 내게 결핍되었던 것, 그래서 진정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과거를 돌아보며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에 의한 또 한번의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욕망과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욕망과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는 듯한 모습의 메시야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결핍으로 인식한 그것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노력과 성취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행위에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원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결핍과 욕망에서가 아닌, 우릴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서 발원하여, 우리의 행위와 공로가 아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를 통해, 가장 완전한 공짜의 선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별없이 넘치도록 주어졌습니다.
물론 이 구원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릴 위해 하신 그 일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에게 실효성을 갖습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견해차가 존재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말할 때, 이는 우리의 믿음도 온전히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다시 마틴 루터에 따르면, 우리는 믿는 것이 아니라 ‘믿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은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위에 앞서 값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