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하나님의 형상

가장 오래된 해석은 그 형상을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본질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입니다.즉, 인간 안에는 신적인 존재를 반영하는 어떤 독특한 능력이 장착돼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이성적 사고 능력이 아니겠는가 생각돼 왔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짓는 독특한 속성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즉, 인간은 그 탁월한 이성적 사고 능력 속에서 이성적인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초대교회 시대와 중세 시대에 이런 해석이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이 해석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성경 본문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본문들은(시19:1;롬1:19),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한 때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짓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속성이, 알고 보니 그들과 공유하는 속성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해석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그런 본질적인 능력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이성적 사고 능력을 어린아이나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도 적용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태생적 능력과 연관시키려는 접근은 자칫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인간성의 테두리에서 배제시킬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형상을 ‘기능적’(functional)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형상을 ‘관계적’(relational)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어떤 ‘기능’이 하나님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신적인 존재의 형상을 지닌다’는 생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고대 근동 문화권에 두루 알려진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 표현이 내포하는 의미는, 그 사람이 ‘신적인 존재의 공식적인 대리자’라는 사실의 선언이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왕이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때, 이는 그가 신을 대신하여 통치 기능을 수행하도록 지명된 존재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학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을 인간은 하나님의 공식적인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기능을 부여받았고, 그 기능을 잘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잘 반영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의 이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당시 주변 문화권의 것과 구별되는 점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특정 누군가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고 선언한다는 점,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기능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관계적 존재이시듯, 인간도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하게 되는 것은 그의 관계성 속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 지음받은 인간(아담)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또한 다른 인간(하와)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의 타락 이야기를 보면,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야기하고, 이어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차례로 문제를 야기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서로 관여하고 서로 대화하는 관계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이 관계적 성격은 인간성의 일부인 여성과 남성의 차이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처럼 성적으로 구별된 존재로 구성하심으로써, 그분의 삼위일체 관계성을 반영하는 본질적인 관계성을 인간성 안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8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아담 옆에 “돕는 베필,” 즉 ‘적절한 조력자’를 붙여주어야겠다 생각하십니다. 사실 당시 아담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성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된 인간성을 위해선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생각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아담으로부터 다시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이 그와 같은 본성을 지녔으나 그와 다른 한 사람과 대면하여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격적인 관계성 속에 계신 분이고, 바로 그것이 인간이 반영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모습이라면, 어떤 인간도 그 혼자서는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그 인격적 관계성의 반영을 위해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적절한 조력자’ 하와를 주신 것이며, 그와 같은 본성을 지녔지만 그와 다른 인간과의 그 인격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을 잘 반영하며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능적’ 해석과 ‘관계적’ 해석은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현존과 주권을 대리하는 기능을 부여받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맺는 모든 관계성 속에서, 특히 자신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자신과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성을 잘 반영하며 살아감으로써 그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 안에 이 하나님의 형상이 흐려지게 하였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그가 맺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잘 반영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기능도 잘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