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진리: 말, 집, 아버지

말 – 제자 – 진리 – 자유
마치 이것은, 앞엣 것이 뒤엣 것을 가능케 하고, 다시 그것이 그 다음 것을 가능케 하는 단계적 연쇄구조 같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자유롭게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에서 비롯되고, ‘진리를 아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에서 비롯되고,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 말씀에 거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순차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의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분을 믿게 된 사람’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을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하는 사람이라 해서 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여기서 ‘거한다’로 번역된 단어를 다른 영어성경들에서는 ‘hold’ 혹은 ‘abide in’ 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 혹은 가르침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 가르침을 꼭 ‘붙잡는’ 것, 혹은 그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제자는 예수님 말씀 중에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붙잡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상황이 좋을 때만 예수님 편에 서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예수님 곁을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꼭 붙잡고, 그 말씀 안에 자기를 세우려 애쓰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진리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는 계시되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예수님이 서 있고, 자기 앞에 성경이 놓여 있어도, 그들은 거기서 진리와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고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을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정확히 계시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 삶 속에서 그분과 인격적으로 관계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 그는 예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바로 이 진리 안에서 주어집니다. 진리의 빛이 환히 비쳐진 곳에서 모든 어둠에 속한 것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진리는 지금 내가 속한 현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그간 나를 지배하며 얽어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길 소망하게 되고, 마침내 진리 안에서 해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떤 ‘말’에 거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을 붙들고, 그 말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참된 말은 곧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키워드는 ‘집’입니다. 본문 35-3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사람들은 집을 통해 안정감을 얻곤 합니다. 그래서 안정감이 약한 분들을 보면 특히 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유의 삶으로 초청하시는 예수님께 유대인들이 반문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합니까? 여러분, 이 말이 사실입니까?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이전에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었고, 그 후에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 유대인들은 계속 이방나라들의 압제 아래 있었고, 그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은 로마제국의 속국 신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자기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로마의 압제 아래 있다고 우릴 종으로 보는가? 누가 뭐래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로마가 힘으로는 우릴 종처럼 부릴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은 그 누구도 노예로 삼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나는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자꾸 ‘자유’니 ‘구원’이니 얘기하면서 나를 귀찮게 하는가? 그런데, ‘내가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 내가 자유로운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내가 진실을 말하겠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리고 너희가 그 상태 그대로 있는 한, 너희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인가? 37절과 40절에서 예수님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가 마음이 바뀐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죄’를 뜻하는 헬라어(하마르티아)에 담긴 의미 그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과녁을 빗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가?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위협받는다 느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