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 보내신 곳에서 겪게 되는 의외의 일들에 주목합니다. 이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들은 여러모로 바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드로아에서 환상 중에 보았던 사람은 ‘마게도냐 사람’이었지요. 정확히 말하면, ‘마게도냐 남자’였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달리, 체코어와 영어성경에는 모두 그를 남성으로 표기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들었던 사람들은 그처럼 여성들이었고, 최초의 회심자 역시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루디아라는 여인은 두아디라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어디에 있는 도시일까? 지도를 보시면, 두아디라는 바로 여기,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서, 당시에 염색업, 특히 푸른 기가 도는 자줏빛 염색으로 유명하던 상업도시였습니다. 그 자색 옷감은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옷에 사용되던 고급 옷감이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루디아는 그 두아디라의 고급 자색 옷감을 마게도냐 지방으로 들여와 판매하던 부유한 여성 사업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유럽 본토인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이주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럽 땅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유럽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신비롭게 일하시지요… 바울이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 전하는 걸 막으시더니,이렇게 그를 유럽으로 이끄셔서 거기 와있던 소아시아 출신 이주여성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녀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거기 그녀를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하십니다. 바로 이 교회가 후에 빌립보서의 수신자가 되는 빌립보교회입니다. 이후 두아디라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수신자가 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분명 루디아는 그 두 교회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예전에 영국 런던에 갔을 때,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분은 어떤 큐티책자를 가지고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책자는 하루에 한 미전도종족씩을 소개하고 관련 기도제목을 수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이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한 아시아인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그날 아침에 읽고 기도했던 그 미전도종족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골짝에 모여 사는 그들, 찾아가 만날래도 만나기 쉽지 않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대도시의 다문화 환경 속으로 섞여들면서, 바로 우리집 문지방 앞에서, 바로 내가 다니는 길 위에서 만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변화된 상황이 새로운 전도의 문을 열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참 놀라운 방식으로 일하시곤 합니다. 우리는 이 순서로 꼭 이렇게 돼야 한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든 다르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 길이 막혔으므로 이제 그 일은 끝이라 생각하곤 하지만,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다른 경로를 통해 새롭게 그 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선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셔서 거기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십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듣는 이의 마음을 여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역할을 약화시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보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또한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먼저 믿은 자들로서 이 복음의 좋은 일꾼들이 될 수 있을까요?

빌립보의 바울에게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겠습니다. 안식일에 그는 기도할 곳을 찾아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아갔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성문 안에서 불가하였기에 성문 밖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하는 영적인 일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해 올라갔고, 바로 그 길에서 하나님의 치유사역에 쓰임받았습니다. 본문에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안식일이면 늘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갔었고, 그날도 습관처럼 그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여인들에게 예기치 않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제 빌립보에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그날 그 시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 답을 얻었습니다. 아니, 그 가는 길에 그는 거기서 해야할 그 일을 어느덧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습관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직업 특성상 주일에 매주 교회 나와 예배 드리기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매주 이 꼬빌리시 교회당에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그분들도 여기서 매주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그처럼 주일에 예배를 건너뛰는 일이 잦아질 경우, 자칫 그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조차도 시나브로 약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날 그 시간에 어디 계시든 그 자리에서 잠간이라도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