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

여러분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성경을 통해, 그리고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얼마간은 알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늘 하나님을 더 깊고 온전히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 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관념 속에서 자기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창조하여 부리려 하지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욕망과 관념 속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실제로 어떤 분인지를 스스로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이를 일컬어 ‘계시’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분임을 안다는 뜻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점차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기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헤셋>인데, 이것은 자기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뜻합니다. ‘공의’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 <미쉬팟>은 하나님의 판결이나 결정이 올바름을 뜻하고, ‘정의’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츠다카>는 이 땅의 사람들을 바르게 돕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뜻합니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은 언제나 올바르게 판결하고 결정하시는 분, 하지만 동시에, 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곤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일방적인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리고 이 공의와 사랑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그분의 신적인 지혜로 이 땅의 사람들을 바르게 돕고 살리시고자 땅의 일에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분의 이름을 걸고 그분의 기쁨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되새겨주십니다. 공의와 사랑과 정의를 땅에 행하는 그 일을 그분은 기뻐하신다 하십니다. 자,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무언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모두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우리가 자랑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을 자랑합니다. 그분이 공의의 하나님인 것을 자랑하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자랑하고, 그분이 정의의 하나님인 것을 자랑하고, 무엇보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인 것을 자랑합니다. 어떻게 자랑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 하나님이 기쁨으로 하시는 그 일에 우리도 동참함으로써 그분을 자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처럼 공의와 사랑과 정의를 땅에 행하는 분임을 알고, 우리 역시 그 공의와 사랑과 정의를 행하며 삶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자랑합니다. 나같은 죄인에게 한결같이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 역시 신실치 못한 내 이웃에게 너그러운 태도로 사랑을 베풂으로써,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이에 근거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17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의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의미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 주장하며 자기 자랑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곤 하지만, 진정 누가 옳으며 칭찬받을 만한지에 대한 결론은 그 안에서 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그 사람, 그가 옳다 인정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칭찬하실 일, 그분이 기뻐하는 일이 무언지를 알고, 이를 성실히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 일을 행하는 중에 설령 억울하고 힘든 일들을 겪는다 해도, 그리 이상히 여길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그처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다 고난을 겪으셨으니까요. 우리가 겪는 고난이 우리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 행동의 결과 이 땅에서 얻는 보상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로 걸어간다는 그 담대한 믿음과 소망, 그것이 우리 자랑의 근거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쓸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매우 속상한 일을 겪은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간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깍아내리고 자기 자랑을 일삼았는데, 일부 교인들이 거기에 현혹되어 바울을 의심하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이에 속상해하며 다소 강경한 어조로 써보낸 편지가 이 고린도후서 후반부인데요, 여기서 바울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저 거짓 사도들이 자랑하는 그것에 대해서라면 나도 자랑할 것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육신적인 것들을 나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 3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지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약한 것을 자랑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주 예수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말하며 그는 ‘예수님’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이 지셨던 ‘약함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만은 이 말에 담긴 내 마음을 아시리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자신이 다메섹에서 체험한 일 하나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그가 다메섹에 있을 때, 왕의 신하가 그를 잡으려고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