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연합 예배 (2011년 09월 04일)
  • 에베소서 2:1-10
  • 설교자: 에르딘게르
1.
우리 인간은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잊지못하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과거는 현재의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에서 염려와 우리를 둘러싼 좋지않은 소식들로 남아있습니다. 현재의 염려들은 과거의 염려와 사건들로 인하여 일어난 과거입니다. 과거는 생생하게 현재를 억압합니다.
2.
이처럼 인간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생각합니다. 과거는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며 현재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에서 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갈등들, 용서받지못한 죄들, 절망과 두려움이 미래에 심판이 되지않도록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중요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듯이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미래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미래를 알아 돈을 벌고 성공을 하며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 입니다. 최근에 체코에서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도 등장할만큼 점치는 직업이 큰 사업으로 등장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연약해지고 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3.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그 가운데서 살았으며… 악한 영에 순종하며… 그들에게 속한 자였고… 육체의 욕심에 무릎을 꿇고…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오늘 본문말씀 1-3절의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기심, 무절제, 끝없는 욕망, 긴장감, 불순종과 같은 우리의 과거는 사도 바울의 이 한마디 말씀에 다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를 계속 반복하면서 우리의 과거로 부터 고통을 받습니다.
4.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었다” “과거는 죽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을 하십니다. “긍휼이 퐁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현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신것은 죄인됨을 고백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 그리스도가 죄인인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심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믿음이며 사랑입니다. 자비하심이 여러분을 구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시각의 커다란 변화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현대 주석가 한 분이 오늘 본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자는 과거로 부터 현재로, 하나님의 용서의 선언이 표현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시간으로 지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의 구체적인 결론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물이며 은혜이다. 인간은 이 은혜를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 선물과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된다.”
6.
우리는 미래에 있습니다.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미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입니다. 이 삶은 인간의 존엄성을 도와주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죄용서를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미있는 미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는 하나님에 의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 미래는 우리들의 활동이나 업적이 아니라 소망과 온전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고 소망이 가득한 미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부로서 일터에서 그리고 이 꼬빌리시 교회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멘

이것을 알라

  • 한인 예배 (2011년 08월 28일)
  • 딤후 3:12-17
  • 설교자: 이종실
1.
디모데 후서 3장은 전체 두개의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1절부터 13절이며 두번째는 14절부터 마지막절까지 입니다. 첫째단락인 1절의 시작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이고 두번째 단락의 시작인 14절은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장의 메시지는 오늘이 말세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배우고 확신한 일을 지켜 행하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때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말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이하를 보시면 말세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랑합니다.
교만합니다.
비방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습니다.
무정합니다.
원통함을 풀지않습니다.
모함합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습니다.
선한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신을 합니다.
조급합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합니다.
(아이러니하게 말세의 고통에 그리스도인들도 일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말세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시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하고 속기도하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말세가 진행될 수록 사람들은 더욱 악해지고 세상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2
이런 말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와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을 소금이며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13-14)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시지 않고 “소금이다 빛이다” 우리의 존재를 규정 선포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인 우리의 존재가 말세에 말세의 고통의 때에, 악한 세상 속에서, 점점 더 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오늘 사도 바울은 두가지를 권면합니다.
3.
첫째,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 소금이며 빛인 우리의 존재방식입니다.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8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인간과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을 위해 낮아지고 또 낮아지시어 결국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만이 세상의 죄와 악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과거는 죽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게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호칭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능력이며 절망에서 소망을 주는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가 그 안에 있는 복음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죄를 구원하시는 예수의 사랑과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가시는 그런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소금이라 빛이라 선포하신 여러분의 존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 속에서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4.
두번째 성경의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왜 성경을 말하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이제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전에 믿음으로 낳은 아직 젊은 디모데가 마음에 크게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은후 디모데가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때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다른 누구가 아닌 성경으로 부터 지혜를 얻기를 원햇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늘 엉뚱한 곳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짐작과 자신의 이성과 이해의 범주안에서 자신의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이며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의미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성경을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영혼을 파고드는 칼이며 영혼을 고치고 새롭게하는 능력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글자와 내용이 살아 움직여 나를 고치고 새롭게하는 체험을 하게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사람들이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5.
제 자신이 성경을 단순하게 읽다가 성령세례를 받고 변화된 체험이 있어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읽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성경을 읽으시도록 안내를 하였습니다. 신구약 성경 총 장수가 1189장입니다. 하루 평균 3-4장 정도 읽으시면 일년에 성경일독이 가능합니다. 성경 3-4장을 빠르게 읽으시면 5분정도 소요됩니다. 하루 5분만 시간을 내시면 성경을 일년에 일독을 하실 수 있습니다. 금년에 저희들이 성경 일회 정독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작하지 못하신분들은 지금이라도 시작하시길 간곡히 권면합니다.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하루에 단 5분도 대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건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교회는 이 해외에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인도받는 체험을 하도록 교육하길 원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에서나 다른곳에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 우리 자녀들의 마음 속에 엄마 아빠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떠오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앞길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우리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단계별로 말씀을 외우게하여 격려하고, 자녀들이 공동으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서 쓰며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은 교회가 아니라 가정입니다. 부모님들께서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말씀을 나누는 삶이 가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알게하는 것 보다 자녀들에게 부모님들이 물려줄 수 있는 더 좋은 유산은 없습니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복음의 가르침에 서고 그리고 성경을 통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는 신앙의 삶을 통해 말세에, 악한 세상 속에서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의 생명을 나누는 참 이웃이 됩시다

예수의 생명을 나누는 참 이웃이 됩시다!
본문: 눅 10:25-37
메시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예수의 생명을 나누는 참 이웃의 삶으로 부르신다.
요약:
영생은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영원히 채워줄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의 생명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부르고 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아는’ 것을 넘어 실제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참 이웃을 ‘찾는’ 삶이 아닌 참 이웃이 ‘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두려움’을 넘어 ‘책임과 나눔’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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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설교 전문.
 

 

하나님 나라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의 실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IBTS 학장 Dr. Parush
 
주 텍스트: 5:13-16 / 28:16-20
부 텍스트: 112 / 7:13-14 / 2:9-11
 
메시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옵션이 아니라 크리스찬 제자들의 존재 이유다.
 
질문: 중앙유럽 혹은 동유럽에 있는 한국 이주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현지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며 또 함께 일해야 하는가?
 
l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
 
마태복음 28 16-20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위임령(지상명령)은 그 안에 마태복음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결합되어 있는 전체의 요약이자 절정이며, 그것은 또한 선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성경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듣게 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선교적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위를 인식하면서 그분을 예배하는 공동체다. 진정한 선교는 언제나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교회는 밖을 향해 손을 뻗는 일에 참여하는 역동적인 공동체다. 교회는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자 복음을 가지고 밖을 향해 손을 뻗는 공동체다.
      이처럼 교회가 밖을 향해 손을 뻗는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함이요, 또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를 통해 보여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사람들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들을 제자 삼기 위함이다. 즉 선교하는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밖을 향해 손을 뻗고 또한 안으로 초대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수행한다.
      진정한 크리스찬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계시된 것처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시작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는 어떤 뛰어난 사람이 혼자서 해나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도우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교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느냐이다.    
 
l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기
 
      우선 그 일은 온전한 기독교적 품성을 가진 제자들을 세워나감으로써 시작된다.
      기독교 공동체의 최초의 선교 현장은 세상이 아니라 그 공동체 자신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생생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선교는 이 절망의 세계 한 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믿는 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의 산 증거가 될 수 있느냐, 즉 기독교적 순례자, 혹은 순례자 공동체가 될 수 있느냐와 관련된다.  
      한인 이주민 기독교 공동체는 현지의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낯선 땅에서 그 자신의 현존을 통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선교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투명하게 증거하는 것이자, 또한 그 증거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선교는 한 믿음의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예언자적이고, 사도적이며, 목회적인 일들을 감당하는 가운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변혁과 구속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즉 선교는 그 공동체의 바로 그 삶의 실천 속에 묻혀져 있다.
      선교는 우리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다. 그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동역자들로 부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하나님의 메신저가 될 수 있겠는가?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제자들이 갖추어야 자격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로,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그 독특한 맛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하는 빛의 원천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행동을 해야 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했던 것처럼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행하며,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이 땅에서 예수님의 종말론적 비전을 성취하는 일에 동참한다.
 
l  결론
 
      선교는 그리스도의 길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개인 혹은 공동체가 거기에 참여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 아니다. 선교는 소망과 구원의 복음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사실 안에 내포된 필연적인 본질이다.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은 단순한 동시에 심오하다. 우리는 이 외국 땅에 있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리고 체코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하나님의 얼굴이 되고자 한 걸음을 뗄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영한대조 설교 본문 첨부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 한인 예배 (2011년 08월 14일)
  • 딤후 2:14-26
  • 설교자: 이종실

2011년 8월 14일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사도 바울이 교회들 마다 편지를 보내면서 사랑, 하나됨, 용서, 관용, 믿음있는자들이 없는자들을 위한 배려, 양보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후메네오와 빌레도 두 사람 이름을 콕찍어 “약성종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 바울 다른 편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양보를 해도 하나님으로 부터 성도들을 떨어져 나가게하는 말과 가르침이 교회안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것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남께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도는 망령되고 헛된말을 버려야 합니다.
16절 말씀: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무엇이 “망령되고 헛된 말”입니까? 창세기의 인간타락을 보시기바랍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열매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듯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다 허락받았지만 하나님이 금한 단한가지도 원하였습니다. 인간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비틀며 자신의 불만을 내비칩니다. 인간은 간교한 뱀 사탄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자신들의 뜻대로 해석을 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알기 때문이라”고 단정을 짓게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오늘 본문 16절 후반절 처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간것”을 우리는 창세기 인간타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인간처럼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자기 생각대로 몰고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말들이 “망령되고 헛된 말”입니다.

인간은 기독교의 최고의 가치인 사랑도 자기의 목적과 논리를 위해 이용하는 죄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이 되면 그것은 곧 악마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악성종양”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뜻,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려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령되고 헛된말, 악성종양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말다툼을 중단하고
둘째,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21절 말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어도 그 그릇 속에 오물이 들어있으면 그 그릇으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주장을 변호하고 심지어 자기주장을 하나님의 진리로 바꾸려고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만큼 우리 자신은 죄악되기 때문에, 우리가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지않으려면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됩니다.

자기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정직하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 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자신의 마음을 주님을 향해 열고 그 마음을 주님의 보혈의 피로 적시고 다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죄인인줄 압니다.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보혈의 은총이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마음의 죄를 덮어 그 죄를 보이지 않게하십니다.
이 보혈의 은총을 날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채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멈추어서 안됩니다.
세째,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22절 말씀: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보혈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이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도록 가르침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인줄 모르고 엠마오로 함께 걸어가던 제자들이 그 분이 풀어 설명한 복음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주의 영을 받은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체험하고 깨달은 복음을 진심으로 풀어 설명할때 전하는 이와 듣는 이들의 모두의 마음속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은 돈을 버느냐 못버느냐, 건강하냐 질병이 있느냐, 행복을 누리느냐 아니면 고난을 겪느냐 그리고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복음을 알고 복음을 통해 내가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