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하시는 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2일)
  • 요 9:1-7
  • 설교자: 김영만

030622
제목: 하나님의 하시는 일
본문: 요한복음9: 1-7 요절/ 요한복음9: 3 

<요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설교>
오늘 말씀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또 이 소경을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면서 나눴던 소경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러면 과연 소경은 어떤 사람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그 소경을 놓고 제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예수님은 그 소경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볼 것입니다.  끝으로 결국 소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세상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
웃을 때도 있었지만 슬퍼 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외로움이 밀려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뻤던 일은 잠시 같은데 슬펐던 일은 이에 비해 많은 것 같고 기뻤던 일 보다 슬펐던 일 들이 더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남이 나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능력 없음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려 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여 보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실수도 하였습니다.  외국 삶 속에서 정처가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그러면 소경은 누구입니까?  그는 물론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더구나 그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 본 적이 없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캄캄할까요?  답답할까요?  불편할까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요?  그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을 봐 본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소경은 보지 못하는 자이고 두 번째 소경은 슬픔의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을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
앞에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제자들이 이 소경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경과 이 소경을 두고 질문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더구나 8절에
보면 이 사람은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소경이요 거지 되게 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그의 인생에 관여했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입니까?  세상 때문입니까? 
최소한 소경 자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경이 되리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이 되는데 무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지금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 중에
태어나서 앞으로도 불행하게 소경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어떤 것들은 나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선택해야 될 것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나
자신 중에 나의 외모일 수도 있고 내적인 성격 등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생기고 나의 자아
중에 깊은 부분 그런 부분을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해서 그런 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속 상할 때가 많지만 부모님들
때문에 자녀들이 상처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또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깨어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주어진 것 중에는 생명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고 건강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어진 것들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겼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이 없을까?  왜 나는 하필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허구 헌 날 술만 마시고 왜 우리 부모님은 매일 같이 싸우기만 하실까?  나는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났을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다면 누구 때문일까? 내 죄 때문일까 부모님이
죄가 많아서 그럴까?  이렇게 생각되실 때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선택 중에 하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일 겁니다.  직장도 본인이 선택을 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체코라는 나라에 와서 사시는 분들인데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많은 선택 중에 혹시 본문의
소경처럼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해 보지도 못하고 선택한 경우는 없습니까?  그 선택이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 우리에게 그 선택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또다시 본문의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러면 이 소경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이 왜 이렇게 질문했을까요?  다르게 말 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를
들어 제자들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 소경이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소서”  왜냐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소경이 나음을 입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경이 저렇게 된
게 뉘 죄로 인함인지 물었습니다.  “참 소경이 불쌍은 하다 그런데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주위의 어떤 누가 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그것 봐라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로 은혜를 못 받다가 주위의 어떤 사람들이 좀 힘들어 지면 그 때 은혜 받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이 무엇을 잘 못 해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에는
인과응보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인과응보적인 요소 하면 생각 나는게 욥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죄로 인한 환란과 곤고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꼭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면 구약의 요셉의 삶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까?  욥기에 욥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되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둘째로 제자들의 생각 속에는 “할 수 없지 뭐 저렇게 된
거” 라는 체념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소경인데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거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 든 가 저 사람이 어떻게 뭐 치료가 된다 든 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체념입니다.  저 사람 문제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문제가 중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해결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소경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누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많으면 모를까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이면
모를까 아픔이 많다면 가장 많은 사람을 통해 비천하다면 가장 비천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보실 때 제자들처럼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기초해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할 수 없다고 생각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 가장 상처가 많은 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 소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패하시고
이새의 아들 중에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예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습니다.  이새는 사무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들들을 한 곳에 불러모았습니다.  사무엘이 모여있는 이새의 아들들에게 들어가 보니
엘리압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하여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압을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인 아비나답,
삼마도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덟 중 일곱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이
모두를 주목하여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은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은 정작 그곳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없었을까요?  아마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 다윗 쯤 없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로 일곱이나 있는데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엘리압도 있는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다윗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는 별로 귀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소경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의 삶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삶을 주관하시고 소경의 삶을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아픔은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설움은 그의 모든 눈물은 그의 모든 상처는 이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속에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
속에 봄볕에 눈 녹듯이 녹아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크신 계획 속에 높은 경륜 속에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무가치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가치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목적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는
대책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높은 경륜속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아픔이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의미 없이 느껴지던 것에 의미가 부여되며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이래서 이랬구나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기대 할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경륜을 붙들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6절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29절에서 두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는데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띄워 주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34절에도 보면 소경들의 눈을 만지시며 그들의
눈을 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릅니다.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제 소경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눈에 이겨진 진흙을 바른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절 마지막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다 소경을 보셨는데 성전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약 4 km가 된다고 합니다.  4 km라는 거리는 도보로 가면 건강한 사람에게도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듬어서 실로암 못까지를 가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갈까요.  가다가 언덕을 넘기도 하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논 둑을 따라 걷기도 했을까요?  실로암 못을 찾아 걷고 있는 소경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7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25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 이니이다”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희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김영만 선교사는 UBF 자비량 선교사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15일)
  • 요일 4:12-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년 6월 15일 (삼위일체주일,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요한일서 4장 12-16절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통역: 남유정 교우

<본문>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2~16)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때려주시기 위해 시냇가에 앉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깎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보셨다면 그 말씀 안에는 다른것도 있지만  성부, 성자, 성령에대해 말하고 있음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말씀이 읽혀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 주일 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유대교, 이슬람교등 다른 일신교들과의 대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늘 끊이지 않는 질문에 속합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것이 정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계속적으로 질문하게 합니다.
인간은 이 질문을 알아맞혀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3위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3위로 나타나시는 유일한 하나님
한분의 하나님.
하나뿐인 신성
그리고 그 유일한 신성은 3위 속에 함께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3위는 우리의 이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 이성을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본질과 3위라는 말은 논리적입니다.
하나의 하나님이 3명의 신이라든가 하나의 형상이 3개의 형상이라는 말은 비논리적일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은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분이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사실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3위 일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앞에 자신의 무지와 놀라움을 겸손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인 루터의 대답으로 다시 다가갑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의미를 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그리고 성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현존에 속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 공동체와 인간관계도 특별한 의미를 회복하게 됩니다.
공동체가 신의 존재에 속하는 것이라면, 공동체는 또한 사람의 존재에도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없이 따로 떨어져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말씀은 조금 전에 우리가 했던 말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그 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한계적인 인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그 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게 만드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로, 죄악되고 한계적인 사람과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다리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 일서 4:9,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리
우리가 이 계명을 주꼐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요한 일서 4:19~21)

이 말씀이 오늘 서신에 써 있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떄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노여움과 냉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사랑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랑은 우리 사람들 사이의 부정과 미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 절 부터 39절까지 말씀 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쨰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 입니다.  (아멘)

<기도>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늘 당신의 말씀에서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립니다.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물로 성령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리의 구원을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을 믿는 믿음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기뻐 찬양받으실 성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거룩한 능력의 주님으로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 닛시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08일)
  • 출 17:1-16
  • 설교자: 이종실

030608 (성령강림주일)
출애굽기 17: 1-16
여호와 닛시

<본문>
반석에서 물이 나다(민 20:1-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아말렉과 싸우다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설교>
오늘은 교회달력에 따라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에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요한복음 14장 26절과 27절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낭독을 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시며 우리를 가르쳐서 근심과 두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명절 음식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장)

우리는 사람들이 원치않는 고난과 시련을 피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평안을 세상의 평안이며 그것은 자신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환란을 세상에서 우리는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세상의 문제들을 피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시련을 도피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고 있지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시련의 길을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 광야(시나이 반도 – 현재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반도)를 떠도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
광야의 거친 환경에서 살면서 그들은 물과 식량의 부족에 늘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곳에서는 유목민들 사이에 물과 식량 확보를 위한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아말렉이 르비딤에 이르러 거기서 이스라엘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물을 뺏기위해 공격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신 광야에서부터 만나를 먹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진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우물을 갖게 된 과정이 오늘 본문의 전반부인 1-7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멀리서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있고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지도자를 원망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 목이 말라 거반 다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우물을 빼앗는것은 시간 문제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 대한 모세의 평가가 후에 신명기에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신 25:17-18)

오늘 본문 9절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한 모세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 달 전에 그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손에 들고 나갈 만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전반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3절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어서 4절을 보시면
이일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그들은 모세를 향해 돌질을 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향한 하늘을 찌를 듯한 원망과 분노의 상황이 지금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 그들을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아직 피곤하였고 직감적으로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은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돌질을 하여 죽이고 싶을 정도 원망과 분노가 풀릴만큼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지않았지만 아말렉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고 자기 자신은 살짝 비켜 설 수 있는 삶의 문제가 있지만 때론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이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인 결단을 요구하며 우리를 시험하는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호수아와 그가 지도하는 군대의 싸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느냐 죽느냐는 긴박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쟁터 대신에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 꼭대기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그곳은 모세와 아론과 훌이 있는 곳입니다.
이야기는 더 코믹해집니다.

11절을 보시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전쟁의 승패가 전쟁하는 장군과 용사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모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직접적으로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분리되거나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이슈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우리들은 상황에 영향을 받고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많은 예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아간 이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수 7장).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는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솔로문의 불신앙 때문입니다.(왕상 11장)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 예루살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기에 앗수르를 물리쳤습니다. (왕하 19장)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는 2천년전 전혀다른 민족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사건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고 일하지 않는 사건은 하나도 없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시각각으로 환란을 겪었습니다.
환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절망을 뚫고 열리는 길들을 걸었고 광야의 바위로부터 쏟아지는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전쟁의 실재상황에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있고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였습니다.

산꼭대기 서서 손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저와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이세상의 모든 환란들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식으로 풀이합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만 본문은 모세가 기도하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히브리말로 기도하는 동작을 손과 관련시켜 말을 할 때 보통 손을 뻗쳤다. 펼쳤다고 합니다.

을 높이 든다는 표현은 창세기 13장 22절의 맹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늘 본문의 손을 높이 든다는 표현의 경우는 이사야
26장 11절과 신명기 32장과 미가서 5장에 나오는 어떤 힘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성서
학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모세는 하나님이 환란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는 이야기를 모세가 어떤 마술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도 환란을 겪을 때 마다 원망을 하고 분노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모세는 손을 들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도 없고 전술도 없고 전쟁의 경험도 없는 자신들이 모세의 손이 들려있으면 이깁니다.
그런데 그 손이 내려가면 무참히 패배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모세의 손을 통해 그들은 지금 자신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투성이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이라는 보다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시련들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깨닫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만과 자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굳은 살처럼 딱딱하여 왠만한 자극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고백한다면 오늘 모세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다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싸움을 걸어와 따지고 든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싸움을 걸어 모세가 답합니다.
여러분들은 나와 다투어 어찌하자는 겁니까?
여호와를 시험하여 어찌하자는 겁니까?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아마 모세가 노무현 대통령처럼 조리있게 설명을 잘하고 언변이 있어 토론을 잘했더라면 공개토론회도 열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모세는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 대체로 화를 금방 잘 냅니다.
모세도 성격이 급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달려가 불평을 할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가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이제 그만 이 노릇 하고 싶지않습니다.
다시 미디안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양을 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백성들이 자신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 처럼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않았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틈만 있으면 불평과 원망을 터뜨릴 때 마다 모세가 한 유일한 일은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등지고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완벽하게 소극적인 태도로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께 의존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무능이 아니라 유능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한 만큼 강해지고 무능한 만큼 유능해지는 비밀을 사도 바울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 11:30)

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지워도 지워도 끝없이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아가야할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아말렉 전쟁처럼 쉽게 끝나지않고 오래 걸립니다.
모세가 계속 손을 들고 있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함께 간 아론과 훌이 돌을 하나 가져와 모세를 그 위에 앉게하고 모세의 두팔을 양쪽에서 떠받칩니다.
이렇게 하루종일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부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 그 길을 방해하는 무서운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친히 그 세력들과 싸워 이기시지만 우리 모두는 제나름대로 서로 도와야함을 또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교역자, 집사님 그리고 봉사자들이 제 나름대로 맡은 일들을 충실히 하면서 서로 도와야 교회가 부흥발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모세는 전쟁의 승리로 여호수아를 칭찬하지않았습니다.
대신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닛시는 깃발, 승리의 깃발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승리의 깃발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환란과 인생의 문제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환란과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우리가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이 추구하고 기대하는 세상의 평안과 다른 그리스도의 평안을 체험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승리의 깃발, 여호와 닛시라 고백하는 생의 체험으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는 약속의 땅의 희망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서 보라!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25일)
  • 출 14:5-14
  • 설교자: 이종실

030525
출 14:5-14
서서 보라!

<본문>
5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설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도로 애굽을 나왔습니다.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의기양양하게-공동, 당당하게-표준새) 나갔음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살아왔던 애굽으로부터 도망치지않았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 전역에 재앙이 번지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이 성경 출애굽기 12장 3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이처럼 국민 여론에 정부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승리의 해방자로 당당히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태도를 바꿨습니다.

5절에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준 것을 후회한 바로는 직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드디어 바로는 비하히롯 이란 곳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들이 캠프를 하는 곳이 해변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피할 수없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가 있었고 그들 뒤에는 애굽 군대들이 압박을 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 (체코어 성경에)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 상황에서 모세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이 위기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 그들이 애굽을 나온 후 첫번째 캠프 장소가 해변가였습니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위해 첫 야영지로 시야가 툭 터진 해변가를 택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의 14장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돌쳐서 –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 이 명령 때문에 백성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바다가로 갔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들이 직면하고있는 상황은 전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데서 기인한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인간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모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목격한 상황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도 우리가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체코땅에서 때때로 예상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늘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일 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역시 주님의 손에 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이야기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1절 12절 입니다.

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에 대해 모세가 대답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두 단어로 줄이면 서서 보라!

우리가 서있는 발판을 확인해야 서서 움직이지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 나는 누구인지 확신에 찬 자기고백이 없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바로 이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인도함을 받게된 까닭을 몰랐습니다.
즉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의 원인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합니다. .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단지 애굽의 힘든 노동 때문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애굽보다 더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애굽의 하나님의 이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규정한 말이 공동번역에 그 뉘앙스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 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공동번역)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 내어
끌어낸다는 단어는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을 나오기 싫어하는 소나 돼지를 밖으로 억지로 끌고 나온 것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이 뉘앙스는 오늘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원망과 맥이 통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그들을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어 내도록 모세를 사용한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마땅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여기서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애굽사람들을 섬기는 것에 익숙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전 애굽인들의 종들을 하나님의 종이 되게하기 위해 이끌어냈습니다.
그들이 이끌림을 받은 이유는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인들을 섬기던 백성들 그리고 애굽 신들을 섬기던 이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지않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이끌림을 받은 이유를 모르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의 시간에 직면하였을 때 우리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그리스도가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한 이유, 그가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고 확고히 서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확고히 서야합니다.
중요한것은 확고히 서는 것이며 우리들의 인도자로서 주인이 하는 것을 응시하며 우리가 행할 것을 흔들리지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러나 그들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이 추격하는 애굽군대를 무찌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눈에 끝이 났던 막다른 길이 그 끝을 뚫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길을 여신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바다가운데 열린 길을 따라 걷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22절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바다물이 좌우로 벽을 이뤄 바다 가운데 길이 생기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첫경험입니다.
갈라져 좌우벽을 이룬 거대한 물기둥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언제 아래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그 물기둥 통로를 건너는데 그들은 믿음이외에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인생의 경험과 과학 어떤 것으로도 그 길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과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건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싸우시는 동안 우리들 앞에 우리를 완전히 파괴할 어떤 악한 세력, 어둠의 세력은 더 이상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고 그와 동행하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되어 그의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면 죽음도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합니다.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 말하였습니다.
불평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의심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절망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희망 없는 사람처럼 원망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진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에 의지해야 하며 그가 우리 앞에 열어두신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이끌어내신 백성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이들 말씀들을 마음깊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구약의 말씀과 관련해서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믿
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애쓰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눅 12:28-31)

염려하지 말아라…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바라 보아야 할 시선은 이 땅위의 관심이 아니라 오직 약속의 땅 – 구원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관심에 자신의 존재를 세우면 안됩니다.
지금 이 해외, 이제 한인이주역사가 10여년이 갓 된 체코에서의 우리들의 삶은 한마디로 불확실성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발자취가 미래의 체코 한인사회의 모습입니다.
불확실성은 불안, 염려, 두려움을 생산합니다.
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하나님 나라를 찾는 우리들의 시선을 흐리게 하지 마십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면서 잠잠히 주의 구원을 기다립시다.
염려하지 말아라…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들은 들풀하나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고귀한 인생들입니다.
약속의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의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소망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셉의 유골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18일)
  • 출 13:17-22
  • 설교자: 이종실

030518

본문: 출애굽기 13:17-22

제목: 요셉의 유골

<본문>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설교>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지켜지는 초막절 명절이 끝나는 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 7:2, 37)

초막절에 대한 설명이 레위기 23장에 나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3:42-43)

이처럼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40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초막 = 천막)

그래서 초막절에 성전에 금으로 만든 커다란 등불을 켜서 밤에 예루살렘의 후미진 곳까지 모두 비추어준다고 합니다.

초막절의 예루살렘 야경이 프라하 야경만큼이나 장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에 등불을 켜는 것은 예루살렘의 야경을 아름답게 하여 축제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오늘 본문 2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1-22절)

다시말씀드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광야의 어두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준 불기둥의 상징입니다.

등불이 아무리 커도 명절이 끝날 무렵에 이 등불도 기름이 다하여 그 불빛이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등불의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명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치십니다.

초막절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자신의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이끌리어 우리들은 약속된 나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현재 이세상을 여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히브리 말로 ‘펠리쉬팀’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한 전 지역을 팔레스티나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애굽(이집트)에서 내륙을 관통하여 지중해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하이웨이를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길을 따라가면 쉬엄 쉬엄 가더라도 넉달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길을 두고 1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직선도로를 두고 우회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넉 달이 걸릴 여행이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불 구불 우회도로를 빙 돌아서 걸어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의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 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외면하십니까?

왜 당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나의 눈물과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의 인생은 짧은 거리를 두고 이렇게 멀리 멀리 돌아서 와야합니까?

우리는 계속 질문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그리고 기독교회들이 하나님앞에 순복하지 못하고 살았던 죄의 결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 하는 삶을 사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순탄하게 빠른 길로 인도하시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최소한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지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짧고 순탄한 팔레스틴의 하이웨이가 아니라 홍해의 광야길로 돌고 돌아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17절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본문은 출애굽이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언제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살기 보다 익숙한 과거의 노예의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본성을 오늘 본문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교회는 건물과 조직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고쳐가는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교인들인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노예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삶이 상황과 조건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항상 이 한계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한계로부터 목사인 제 자신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비판은 바로 이 한계에 머무르려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그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은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습관으로 회기 하려는 비판과 원망은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거기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양보한다면 저는 이미 여러분들의 목회자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삯꾼이 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신앙인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길은 바로 바른 비판을 잘 수용하고 잘못된 비판을 거두어 들일 줄 아는 영적 싸움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싸움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과거의 노예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거듭난 삶을 사는 것도 햇수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려 50년이 넘게 미움과 증오를 키운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가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의 강대국들이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또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자기 자신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협력과 연대 보다 경쟁과 분열이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북이 갈린 50년 동안 동서가 갈라졌습니다.

학연 지연 조그마한 이해관계로 우리들은 이 좁은 체코의 한인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50년이 지나도 분열의 화해와 치유의 기미는 더욱 보이지않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40년 만에 노예의 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이된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팔레스틴의 하이웨이를 택해도 그리고 돌고 돌아가는 홍해의 광야길을 택해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잘 아시기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덜 심각한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은 인간의 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여행이 너무 힘들어 원망을 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3)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은 의중을 끝까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먼 훗날 언젠가 반듯이 그때 그 하나님의 의중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사도 바울 처럼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지는 19절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저희들이 자동차로 여행할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를 정비하고 지도를 구입하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천막 장비와 침구를 준비하고 그리고 여행 중에 먹을 음식을 챙깁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잘 이끌기 위해 책임감으로 천막과 침구와 옷과 음식과 지도 등 여행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고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같은 절에 설명되고있습니다.

그 설명을 풀어 이해하자면 요셉이 자신의 자손의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죽을 때 한 유언을 그 자손들이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이 요셉의 유언은 창세기 50장 25절에 나옵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이 유언을 하게된 이유가 바로 앞절인 창세기 50장 24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창 50:24)

다시말씀드려 요셉이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떠나라고 한 유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맹세를 잊지않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의지하라는 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면서 모세와 아론이라는 출중한 민족의 지도자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의 조상과 맹세한 하나님의 맹세를 요셉의 유골로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도 자주 원망하는 인간들에게 요셉의 유골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과의 약속을 회상시키십니다.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간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가는 행위는 단지 조상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맹세 이전에 하나님 자신의 맹세를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믿음이 모세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유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 때문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요셉의 유골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40년의 광야생활에 모래알 처럼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의 미족으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심력은 지도자나 능력 있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연령과 출생배경과 인생경험과 개인의 능력과 신앙의 배경과 삶의 환경이 모두 다른 저희들이 지금 어떻게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를 고리로 모이면 그것은 이익집단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 교인들 각자가 꽉 붙잡을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연약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목회자와 집사와
봉사자들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성만찬을 주시면서 세심히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에 지지않게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할 지라도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읍시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광야 같은 이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 까지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