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교의 과제

  • 연합 예배 (2003년 03월 02일)
  • 행 11:;12: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30302
사도행전 11장 12장
<본문>
제 11 장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제 12 장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설교>

이방인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시 교회에 대해 대단히 도전적인 일입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이것은 바로 교회이고 이방인이 유대인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법과 제도를 거스리는 것이며 전통과 그들의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지 않은 것이며, 심지어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을 받을 때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리고 그의 사도들은 어떠한 하늘의 뜻에도 복종하였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제단의 음식들을 이방인들이 먹게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세리 사개오 이야기를 압니다.
그 같은 죄인이 얼마나 남몰래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발견하고 그와 함께 먹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예도 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습니까!
그녀는 주의 식탁에 모든이들이 참석할 수 있고 그것을 감히 요구할 수 있다는 대담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을 개에 비유를 하며 개들도 주인의 상 아래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우리들이 먹을 때 – 주의 성만찬을 함께할 때,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무엇이 성만찬이며 무엇이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경계선을 전례없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입니다. 큰 변화입니다.
그것은 쓸모없는 이들,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들
주의 만찬에 참여한 이들도 누가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선택된 손님들의 모임의 반대입니다.
멸망하는 것을 찾아 구원하기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의로운 자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환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며 우리들의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의 수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체 교회에 퍼지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거룩하지 못한이들과
함께한 베드로의 식탁은 제사를 드리기에 불결하게 되었기에 유대 기독교인들의 눈으로 볼 때 복음의 섬김을 위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4가지 관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령강림 시대에 성령의 은사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깨달은 모든 유대 디아스포라들에게 임하였을 때, 2. 믿음의 모든 공동체는 세례를 받았고 아무조건없이 이방인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습니다.
3. 성만찬을 행함으로 베드로는 그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4. 완성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은 놀라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하시고 교회로 인도하셨다. 하며 놀라와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감옥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교회가 환란과 박해를 경험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죽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이전 동업자 어부였습니다.
헤롯은 군중심리를 이용해 기독교를 유대사회에서 내쫓으려하고 베드로를 잡아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금세 표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여는데 찬성했던 자이었기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에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기적으로 감옥을 나온 후 베드로는 박해로 열정이 크게 사라진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야고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오랫동안 베드로에 대해 사람들이 알지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 단지 일부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몰락의 조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인 바나바와 사울에게 다시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예루살렘의 교회는 자신의 문제에 빠져있었고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나중에도 볼 수 있겠지만 부활절이 가까워질수록 박해뿐아니라 권력의 구성이 이루어집니다. 그 권력의 구성은 이방인들의 선교의 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이방인 사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디옥은 50만명의 인구로 로마제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로 그의 찬란함으로 헬라문화적 전통과 동방의 신화와 신비의 중심도시였습니다.

회 공동체의 성장과 유대의 종교의식으로부터 점차적인 일탈과 그리고 점증하는 이방인의 경향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찍 독자적인
집단을 생각하게 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안디옥에서 그들을 기독교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론 없이 선교의 비전을 지닌 바나바는 중요한 사명을 받았고 바울은 그의 눈에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아주 의미있는 공동체가 되게 한 교회의 스타일인 선교의 기회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을 주선하여 자신의 교회 공동체의 미래의 여정을 분명히 설정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회당과 관련없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동시에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유대인들이 누렸던 특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뿌리는 같지만 천년의 원수가 된 시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제국에 무너집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사명을 갖게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완전히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럽의 기독교의 몰락 아니면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멘

섬김

  • 연합 예배 (2003년 01월 05일)
  • 창 25:19-23
  • 설교자: 이종실

05.01.03
Gn 25, 19-23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개역한글판 창 25장)

에서와 야곱

  • 연합 예배 (2002년 12월 25일)
  • 창 25:19-27 눅 2:1-14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1225
에서와 야곱                 

창세기 25, 19-27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1)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개역한글판 창 25장)

눅 2,1-14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개역한글판 눅 2장)

<설교>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복음의 소식은 누가복음서의 마리아의 아들의 탄생입니다.
언제든지 교회가 이 복음서를 읽으면 구약의 예언들이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이 몇 세대에 걸쳐 기다려온 예수의 탄생을 알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몇 세대의 희망을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구약이 없이는 교회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개혁과 반나치즘 운동에서 다시 한 번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깊은 관심 없었다면 어두운 대량학살의 시대와 상업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시대에 복음은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은 부분적으로 아람 사람과 혼혈이기에 자신의 가문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탄은 한 가문만의 일이 아닙니다.
성탄은 모두의 일이고, 처음부터 민족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이면서 세계적인 뉴스입니다.

다시 한 번 잠시 구약성경을 읽읍시다.
40년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과 노예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노예 비천함 기다림의 시간이 끝남의 암시입니다.
즐겁지 않은 대강절입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기뻐하라 민족이여.

하지만 아직 걸림돌이 남아있습니다. 리브가는 잉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즐거운 성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간구를 들으시고 리브가의 몸에 쌍둥이가 생겼났습니다.
두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테마입니다.
왜, 선택된 하나님의 장남 이스라엘이 꼭 두번째가 되어야 합니까.
가인가 아벨, 에서와 야곱, 민족과 이스라엘, 신약에서는 방탕한 아들 – 둘째아들, 그는 모든 것을 두배로 받았고 그리고 첫째 아들은 질투합니다.
여호와의 계획안에 있는 장자권의 테마는 현재에도 교회안에서 존재합니다.
왜 우리는 꼭 두번째이며, 흩어진 자들이며, 왜 세상 사람들은 성공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탄이 그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구약성경의 관점으로 신약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하면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성경의 증인들의 해석에 의하면 결국 장남들과, 숫자가 많고, 힘센 민족들은 실패합니다.
야곱은 형의 발목을 잡습니다.
방탕한 아들은 성대하게 받아들여졌고 가장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도 다를바 없습니다.
결국 둘째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던 그 날밤에 축복의 야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에서는 그렇지않습니다.
야곱의 모든 구약성경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도 첫째로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어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기회가 많은 첫째아들들은 마지막에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첫아이를 낳아 그를 구유에 눕힌 내용을 읽을 때 우리는 그녀의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 처럼 힘없고 권력없는 사람에 속하지만 높은 자리에 오르며 많은 강한 민족들이 그를 섬길것입니다.
야곱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이렇게 성취될것입니다.
이와 같은 첫째아들 또는 독생자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와 민족의 역사와 우리들의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우리들은 놀랍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교회가 자신에 대해 놀랍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얼리스트 이 외의 사람들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선택이 자만심의 이유가 되지않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민족들과 사람들과 땅을 차지하기위해 다툽니까?
교회의 비밀은 다른 관점을 열어주고있습니다.
이 교회당에서 성탄은 차별당한 사람들,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권리의 침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거룩한 날입니다. 동시에 도전을 주는 날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장자권과 축복은 가치가 있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모든 노력에 기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지기 전에, 여호와가 준비한 것이 우리들에게 성취되기 전에 우리들은 많은 변화를 분명하게 체험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으로 장자권을 거부한 그 분이 우리를 이미 구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탄생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AMEN

이웃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26일)
  • 잠 3:27-35
  • 설교자: 이종실

030126 (세번째 주현주일)

본문: 잠언 3:27-35

제목: 이웃이 되는 길

<본문>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설교>

부모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꾸짖고 매를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폭력은 자녀와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친교와 신뢰를 강화시켜줍니다.

부모와 자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젖을 빨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다 보면 사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사회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의 매를 들고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것을 교회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사회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다.

복음을 전하면 체코의 우리의 이웃들은 배타적이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교회를 체코 한인사회의 암적 존재로 까지 인식합니다.

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느낌이 아니라 10여년을 체코에서 살면서 늘 느끼는 느낌입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교회당이 그리고 교인이 이웃에 있으면 더 기대에 부풀고 환영하고 좋아해야 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교회당과 교인을 이웃과 사회가 회피합니다.

교인들을 만나면 물들고 사람을 버려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 까지 처해있습니다.

저는 체코교회를 종친회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입니다.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기세력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려는 종친회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쓸데없어 길바닥에 버려지는 것 처럼 우리는 사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너가 많이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것이다.

그러자 율법사는 성경에 대한 지적인 욕구를 발동시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서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심지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치료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었음을 율법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희들이 우리들의 이웃과 사회에 이웃이 되어주면 우리들을 배타하고 적대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율법사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입니다.

이 실천을 우리가 믿음과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건강하고 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유럽순회를 하는 대학합창단을 이끌고 오신 단장님을 만났습니다.

그 인편에 제 친구목사가 제게 물건을 보냈기에 그 물건을 받으러 그분을 잠시 만났습니다.

단원들이 다음날 일찍 바로 헝가리로 가야하는데 간식을 준비못했다는 말을 듣고 늦은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교회부근의 테스코로 왔습니다.

단원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지휘자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취침과 기상시간을 엄격히 관리하셨습니다.

저녁 10시 30분에 소등하고 취침을 하면서 보고를 받고 아침 6시에 정확히 일어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역앞 길에서 구시가지로 잠시 빠져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호텔은 뿌르호니쩨에 있는 클럽호텔이었습니다.

10시 30분 취침시간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들 꾸중들을 것 같아 고속도로 입구니 20분안에는 도착할겁니다.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을 보며 멋적게 웃었습니다.

순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성방송 아리랑에서 간혹 한국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방송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친구가 연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했던 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일 하나도 아는 것 하고 아는 대로 사는 것하고 일치하기가 참 쉽지않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인간의 재산이며 영적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람이 습관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서 대인이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합니다.

의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의한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습관이 붙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행의 습관입니다.

선행이란 먼저 27절에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움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돕는 것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되면 미안하다 내가 도울 수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부탁을 드려보자. 이렇게 이야기 해야 될 것입니다.

한인사회의 역사가 짧은 체코의 경우에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 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자칫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자랑과 자기 과시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28절 말씀은 선행은 아끼지 말고 지체함이 없이 베풀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마음 내켰을 때 아끼지 말고 지체 없이 해야지 시간을 끌면 시험이 듭니다.

인색한 마음이 한번 들면 계속 계획을 축소시켜 결국 선행을 베풀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에 하나님은 부득이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나 인색한 마음 또는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 자원하는 심정으로 선을 베푸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 이하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셨습니다.

정오에 길 지나가는 행인 셋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그들에게 달려가 자기 장막으로 초대를 하면서 발 씻을 물을 떠다 드리고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특별 요리를 만들고 버터와 우유를 짜서 손님들에게 대접을 하였습니다.

길 지나가던 손님들은 마음이 흡족하여 큰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가 두 천사의 모습으로 롯에게 나타납니다.

롯은 그들을 아브라함처럼 장막안으로 모셔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식탁 내용은 아브라함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마른 무교병 한 조각을 구워냈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의 경제적 상황을 직접 비교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이별하던 상황을 추론해 보면 롯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재산이 있었고 그가 선택한 땅은 아브라함 보다 초목과 물이 있는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 롯은 아브라함 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한 식탁을 손님들에게 내어놓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롯은 깍쟁이 노릇을 했던것입니다.

그 다음날 소돔성에 내리는 유황불에 의하여 모든 소유와 재물과 가정과 짐승 떼를 다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잠언 11장 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선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됩니다.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도움도 도움을 베푼 사람에게는 그것 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만큼 그것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결국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립니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고 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다툼과 분쟁으로 풀지않고 자신의 마음에 잘 정립시켜나가면 하나님은 이것을 고귀한 증거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시면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의 예물 즉 행위가 하나님에게 증거가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는 곧 아벨의 예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예물로 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옳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잣집앞 쓰레기통을 뒤지며 버려진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부자와 거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집 앞에서 그래도 쓰레기일지언정
우리집에서 나온 음식으로 굶주림을 피한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동화 같은 이 예수님의 비유는 선행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을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의 집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교회지역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 사회 선교적인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한 인생은 누구에게로부터 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심어서 긍휼을 거두고, 악을 심어서 형벌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떠하든지 이웃과 사회를 향해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을 붙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의 좋은 습관이 붙은 사람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31절에 나오는 악한 습관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는 이웃을 모함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나쁘게 하지 않은 사람을 모함하거나 그와 다투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은 단순히 물질이 풍요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콩 한쪽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베푼다는 것은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말로, 기도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 … 그리하여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 (표준새번역 딤전 6:18-19)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이 한해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오니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삶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복의 터전의 기초를 세워 참된 생명과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얻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섬김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9일)
  • 마 20:25-28
  • 설교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030119 주현주일후 두번째 주일
설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본문: 마태복음 20장 25-28절

Text: Matthew 20,25-28
When
the ten heard about this, they were indignant with the two brothers.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eir high officials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Not so with you. Instead,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International
Version Bible)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 인들은  그들이 믿는 존재를  표현하는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은 하나이고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인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역사에 있어서  믿는자들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하였던 다양한 방법들을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가에 관한것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뿐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분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이시고 내  믿음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질과 다른 사람 과의 관계가 우리가 올바른 성경적인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할때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나 묘사들을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신학적인 언어로된 추상적 개념보다 훨씬 잘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식으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후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때때로 다른 하나님의 상이,  심지어 나쁘고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 상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시중들도록 요구하시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요구하시는 통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상은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멀리있는 통치자 정도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된 그림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문제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없게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하나님 상은 잘못된 것 일뿐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유사한 통치를 하려는 태도를 불러 이르키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사람이 가능한한 많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성경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서,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서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상에서 뿐만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 우리 회중에, 또한 우리 개인 개인의 인생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완연히 상반된 상태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제자중 두 명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 나라와의 완연한 차이를 저희에게 인식하게 하십니다.
 이말씀은 요한 복음에  명확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초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과 가이사와의 차이에서 명백히 보여졌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구주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식으로 그들은 가이사처럼 통치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안에 그들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하나님은 그의 신민들과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을 섬기기 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십니다.
이말은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다른사람을 작게 만드는 위대하심이 아니며 , 하나님의 강하심은 다른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강함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다른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사람은 다름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강하게 하기위하여 권력과 힘을 사용하는 그런 사람인것입니다.
주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그가 하고 계심과 같이 우리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서 온 세상에 주님의 진정한 모습이 명백하게 보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Christians use different ways, in which they express, what they believe in.
The center of christian faith is one and unique– it is the new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established through Christ.
Howev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 communities we find various ways, in which
believers articulated their relation to God, and therefore their image
of God.
Even in the Bible itself we can find different means, how to
characterize God, and the way in which is He related to all the other
beings.

For every believing Christian it is of vital importance to find proper and correct image of God.
It is really important for us to find out, who is God, who is He not only generally, but quite personally.
Who is He and which kind of role does He play in my own life of faith.
It
is important, because the quality of our faith and our relation to
other people depends on whether we  have correct, biblical image of God.

When the Bible speaks about God, it uses very often images and pictures, taken from ordinary life.
These pictures reveal to us the peculiarity of God’s character better than abstract concepts of theological language.
Jesus Himself, and his disciples used to speak in this way – simply and plainly.
Lat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some of its periods, predominated
sometimes different, and sometimes even bad or incorrect images of God’s
character. 

Many people in the history, and many even today,
think of God as about Sovereign, who sits on the throne and requires all
the other beings to serve Him and praise Him glory.
This image presents God as a distant ruler, who doesn’t really care about daily, ordinary life of His subjects.
This static picture doesn’t allow for people to hope in God’s action amidst problems of human life.
And
moreover, such an image of God is not only wrong, but it leads to
serious consequences, because it produces similar ruling attitude
towards the other people.

In our time almost everybody wants to have as much power over the others, as possible.
 In our time, it is important to hear to the voice of Scripture, which speaks about different God. 
Bible presents to us picture of God, who doesn’t sit on the throne.
God of Bible comes down. 
God comes to people, so as to become one of them, to share in the human life and human destiny. 
Bible
points to the living and acting God, not only in the past, in the
history, but especially in our own time, in our congregations, in our
individual lives.

In our text from Gospel of Matthew, we can find these two images, standing in a complete contradiction.
Two disciples of Jesus asked Him to give them highest positions in His Kingdom. 
In His reply Jesus makes us aware, that there is profound contradiction between God’s Kingdom and every kingdom of Earth. 
This idea is clearly expressed in the Gospel of John: “My Kingdom is not from this world” (John 18,36). 
This contradiction was for the first christians clearly visible as a contradiction between Christ and the Caesar.
They expressed their faith as a faith in Christ the Lord. 
In this way they proclaimed faith in God, who doesn’t want to rule as Caesar, to make others servants. 
True God of Bible comes as a Lord, who wants to serve to his subjects, to all the citizens of His Kingdom.
This
means that God’s greatness is not greatness, which makes others small.
God’s power is not power, which makes other powerless.
And it is exactly the same, which expects Jesus from His followers.
In the sight of Jesus only that one is great, who makes others great.
Only that one is strong, who is exercising power to make others stronger.
Jesus
wants all His followers to do the same, what is He doing, and in this
way to make God’s true character visible to all the world.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