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2일)
  • 엡 4:1-16
  • 설교자: 이종실

2003-01-12
교회창립 3주년 기념예배
제목:  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본문: 에베소서 4:1-16

<본문>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설교>
이제 저희들이 교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겨우 2년이 지났습니다.
짧은 2년이지만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어느 한인교회들도 시도하지 못한 현지교회와 함께 호흡을 같이하는 신앙 공동체를 저희들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1년이 조금 넘자 유럽교회들 안에 소문이 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독일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저희들의 에큐메니칼 예배를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들과 유럽의 한인교회들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 슈토렉 목사님과 저가 패널토의의 발제자로 참석하여 저희 교회 경험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저희 교회로 부터 배워 현지 교회들과의 교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짧은 기간이지만 체코교회는 물론 유럽교회와 유럽의 한인교회에 우리교회는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 우려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왜 이곳에 함께 모이게 되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작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매우 조심하며 말하고 행동하던 노력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우리교회 세가지 생활실천 목표를 정한 것은 이러한 우리들의 시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여러분들도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첫째, 자기를 객관화하는 생활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제 자신을 돌보자는 뜻이고
둘째,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은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자는 뜻이고
셋째, 숨은 봉사생활은 비판보다 나부터 실천해 보자는 뜻입니다.
이 노력과 함께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는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온도계가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말(언어)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곧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마디 못하는 체코말로도 마음이 통하면 말이 통합니다.
하고싶은 말 다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창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한국 사람들 끼리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8)
말과 마음이 서로 통해 놀라서 하는 말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니 서로 만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우리 주위에 말이 통하는 한 사람의 친구만 있다면 해외생활은 훨씬 덜 힘들 것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면 자꾸 만나고 싶고, 자꾸 만나다 보면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가진 것을 좋아 하는 사람에게 퍼줍니다.
한국에서 누가 갖다 준 골뱅이 통조림, 과자, 유효기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싱싱한 라면… 귀하고 살수 없는 것을 막 줍니다.
결국 니것 내것 없이 통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유무상통의 하나님 나라를 체험 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여 함께 떡을 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른 떡 한 조각만 먹으며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불편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난은 염려와 걱정에 긴장으로 모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과 말이 통하면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넉넉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산다고 하여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평생을 다투며 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는 서로 말과 마음이 소통하는 화목으로 행복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어 박해 속에서도 성장해 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이 새해에 그리고 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의 생일날에 진심으로 소원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교회를 섬겨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우리들이 초대교회의 그런 모습을 원한다면 기도만 가지고 안됩니다.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자기싸움을 해야 합니다.
욕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성장하면 사망입니다.
우리들은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손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손해 보며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priority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게 소중하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지금 까지 욕심을 부리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의 새로운 삶의 가치의 발견과 변화로 이전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땅에 속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이 땅에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땅의 욕심을 버리려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하면서도 땅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그 하늘은 땅의 욕심의 신기루이지 진정한 하늘이 아닐 것입니다.
성령을 기분으로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말과 마음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결혼 상대자를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게 됩니다.
이 들의 삶은 단지 사랑과 돈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 그 만남 자체가 삶의 생명력이 넘쳐 충족감을 주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됩니다.
한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그리고 자녀와 부모가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한다면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화만사성 입니다.
집안이 평안하면 하는 일들에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지금 마른 떡 한 조각 갖고 있는 것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가정을 통하지 않으면 통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눈앞에 버는 돈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운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사업주와 종사자들이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받는 은사와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말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여도 우리가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한 사람에게 모두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나 한 부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부분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진실로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합니다.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겔 34,17-19)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 모든 것에 불평이 생깁니다.
불평은 불화의 뿌리입니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는 사람이 범한 죄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긴 죄입니다.
둘째 다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죄입니다.
세번째 죄는 더럽혀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양들이 먹게 한 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가정에서 사회에서 여러분들의 사업터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 그런 가정,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먼저 서로 좋은 점에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좋은 점에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부덕하여 더 좋고 더 많은 장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것이기에 감사해 하는 교인들이 되십시다.
목회자인 저도 여러분들의 단점을 보기 보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하나님의 은사에 감사하며 그것을 격려하며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들을 이 한해 섬겨갈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격려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을 비워야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와 욕심을 먼저 버려야만 합니다.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을 보고 살므로 땅의 욕심 버릴 수 있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가정에서도 만나고 직장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나는 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 한인 예배 (2002년 12월 08일)
  • 눅 1:26-38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1208 (대강절 두번째 주일)
본문: 누가복음 1장 26-35절, 37-38절
설교자: 다빗 유레흐
제목: 거룩하신 예수님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개역한글판 눅 1장)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증언에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깊게 생각하도록 하게 할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이름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천사는 이스라엘의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이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 나사렛으로 옵니다.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곳으로 옵니다.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라고 하는 한 약혼녀에게 다가 가고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로 인해 무엇인가를 알리시려 합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다가와 인사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그 상황이 어떠했을지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 마리아는, 그녀에게 이렇게 인사하는 이 이름 모를 사람으로 인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인사말은 그럭저럭 이해는 하지만,  은혜를 받은자여 이 인사는 무슨 뜻입니까?
천사가 설명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녀를 덮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입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구약에서 이 비슷한 천사 (여호와의 천사)의 말이 나옵니다. – 하갈의 아들의 탄생 때(창16:11)와 삼손의 탄생 때(삿 13:3) 입니다.
아사야서 에서 이런 약속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이라는 뜻입니다) (사 7:14)
이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는 자신의 힘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선택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는 들었습니다.
예수, 히브리어로 여호수와  – Jozue 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시고 있는 사람의 보내심은 인간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마리아로부터 메시아 즉  구원자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계속 말을 하였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가브리엘의 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시 구약성경을 살펴봅시다.

사야서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사 9:6-7)
다윗의 보좌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은
사무엘하에서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표준새번역 삼하 7:12-14)
마리아의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질문밖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같은 질문만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자와 동침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것에 대하여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에서 덮으신다는 뜻은 그림자로 가린다 라는 뜻으로 즉 보호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편 91편에서 우리는 덮어준다는 의미의 말씀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성벽이 될 것이다. (표준새번역 시 91:4)
이곳은 산부인과 의학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우리의 믿음을 위한 곳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섭리에 대한 믿음을 위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로부터 거룩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을 하십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표준새번역 사 6:3)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고 세상에 뛰어나고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분 그 분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이 처럼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 이름에 절대적인 거룩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그 분이 거룩하시며, 오직 거룩하신 한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고 거룩한 것을 알게하신 것 그것이 거룩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깨달은 그 분 그가 거룩하십니다.
마리아로부터 태어날 이 아이가 바로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드디어 이렇게 마리아는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가 되고 자신의 좋은 평판을 잃을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일에 자발적인 결심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에서 구약의 말씀이 기다리던 그 분이 탄생할 아기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이야기에 집중해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인 오늘 성경본문을 저희들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간단히 되새겨 보십시다.

먼저 마리아에 대해서 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마리아에 대해 잊어버리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리아를 카톨릭적인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의 역사 속에 특별한 사명을 받았고 여인들 가운데 축복을 받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메시야, 구원자를 신비롭게 인류에게 안내한 분으로 기억해야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오늘 성경본문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의미있는 길을 인류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기로 결정한 은혜롭고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어날 그 분은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위한 일반적인 사람, 철학자, 정치가, 인류의 지도자 또는 혁명가가 아닙니다.
태어나신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된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고 영원히 왕이 되십니다.

이천년 전에 태어나셨던 예수님 그리고 저희들이 두 주이상 그의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할  예수님, 그 분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사랑과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들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그 사랑을 여호와께 찬양돌립시다.
아멘

죄 용서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탄생

  • 연합 예배 (2002년 12월 01일)
  • 막 1:1-8
  • 설교자: 이종실

02/12/01 (대강절 첫번째 주일)
본문: 막 1:1-8
설교: 이 종 실 목사
제목:

<본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설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헬라어 에반겔리온을 체코어 성경은 에반겔리움 그리고 한국어 성경은 복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체코어 에반겔리움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에서 그리 거리가 멀지않지만 한국어 번역은 원래의 뜻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을 복음이라고 하는 헬라어 에반겔리온은 행복한 소식 또는 기쁜소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에반겔리온은 복된 소식 또는 기쁜 소식보다 더 깊은 뜻을 갖고있습니다.
에반겔리온은 중요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들려오는 낭보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에반겔리온 단어는 적들을 패배시키고 승전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위대한 황제와 장군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주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의 서두는 승리의 팡파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기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승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이 복음서를 읽을 때 마가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승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주의 길을 평탄케함을 의미합니다.
마가는 이사야 40장에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 40:3-4)

이사야 40장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인간 소외의 상징입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서로 교통 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불안 갈등 분노 잔인 혼란 테러 전쟁은 사람이 서로 교통하는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광야의 주의 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로 나아가고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입니다.
건설되고 있는 이 길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이 불안 갈등 분노 잔인 혼란 전쟁의 인간관계가 단절된 세상으로 들어가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로 부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거칠고 그렇게 황량하고 그렇게 무서운 광야를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과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단지 오신 것 만이 아닙니다.
그는 목적과 함께 왔습니다.
죄의 용서가 그 목적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세상이 길 없는 광야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마다 신 같은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하고 자신이 스스로 법이 되려고 합니다.
죄는 인간을 자기 중심의 독재체재를 만들고 군림하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이 자신의 법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법을 폐기시키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우상, 자신의 법을 추구하면서 결국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킵니다.

죄는 우리를 속여서 심지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말과 잘못된 행위를 하게합니다.
승리의 선포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죄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에 따르면 피의 대가 없이 용서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서의 예언이 성취됨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행위 안에서 발견합니다.

비록 분명하지 않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테마는 오늘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연상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술에 취한듯 황홀경에 빠져 방언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언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는 그의 고난과 죽음과 관련되어있습니다.

10장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게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받게될 세례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경험입니다.

승리의 선언인 에반겔리온은 이와 같은 성령 세례의 토대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 다가가도록 준비하기위해 건설되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신 같은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자신의 길들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위한 죄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것 이것보다 더 분명히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단을 체코형제 개혁(또는 복음) 교회라고 부릅니다.
체코어로 에반겔리츠까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 중심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의미로 이해되고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에반겔리츠까 즉 복음적인 이란 말이 신학 성향의 특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 저는 한국교회에 우리 교회를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교회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란 타락한 교회에서 에반겔리온(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교회를 에반겔리츠까 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에반겔리츠까 교회는 단지 기쁘고 복된 소식만을 전하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 관계가 단절된 삭막한 광야 같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기쁜 소식 – 에반겔리온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의 우리의 사명은 단지 좋은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긴 성도들의 승리의 소식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길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며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아멘

근신하며 기다림

  • 한인 예배 (2002년 11월 24일)
  • 눅 12:42-48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1124
본문: 누가복음 12: 42-48
제목: 경계와 기다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5)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늘은 교회달력의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일은 아드벤트 첫번째 주일로 새해의 시작입니다. 아드벤트는 강림 이란뜻입니다. 그리고
아드벤트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아드벤트 단어의 뜻 속에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매년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를 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이 특별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탄생과 이 세상에 오심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선물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만약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청지기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고 올바른 삶의 길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말씀과 비유로 우리가 자기를 건축할 충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신실한 청지기처럼 우리들은 그것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것에 따라살아야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여호와가 우리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실천하고 그것을 잊지않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불충한 청지기의 행위가 나옵니다. 그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심지어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그종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그 불충한 청지기는 자신의 주인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자신의 주위사람들과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주인이 당연히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주인의 대리인으로서 충성을 표하였고  그리고 주인이 믿고 그를 대리인으로 세웠던 사람으로서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흉내를 냈습니다. 어쩌면 일주일에 한번 주일날에 주인의 집에 와서 책임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을 위한 일들만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허락한 직위를 남용하고
악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청지기로 위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일의 대가를
계산해야될지 잘 알았지만 그렇게 살지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되는지 잘 알았고 심지어 그 일을 위탁받고 그 일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이익을 혜택으로 받았지만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이제 주인이 돌아오자 충성된 종은 높임을 받고
불충한 종은 해고를 당하고 주인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않은 사람은 그것을 알지못해 책망받을 짓을 한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합니다.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 48b)

무슨 뜻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진실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세례로 우리들은 이미
이전부터 우리들을 긍휼히여겨 우리를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복음의 섬김으로 불러주셨고 성경으로 우리들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셔서 삶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증거하게 하십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우리의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해야합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들에게 믿지않는 자들 보다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믿지않는 자들 보다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성경 두곳을 읽어드립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개역한글판 마 5장)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개역한글판 마 25장)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입니다. 어떤 새로운 법도 없습니다. 모든것은 성경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합니까? 몇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리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상호간의 적의와 논쟁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용서함을 배워야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타인을 비난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일어났던 나쁜일들을 잊지맙시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생에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합시다.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의 기도에서 우리들이 용서한다고 하나님께 말하면서 우리가
용서하지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사명은 잘못된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것 입니다.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는 파멸의 길로 우리의 이웃이 걸어가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바른 길로 그를 안내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단지 믿음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닐것입니다. 술과 마약에 빠진 사람,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곳에서 우리들의 사명은 바른 이웃으로서의
증언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연약한 자들은 우리의 주목을 받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실천적인 도움을 아는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다른 사람들이 연약한 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 부자들
성공한이들은 대체로 단지 자신들만을 생각하기에 연약한 이들과의 연대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기쁨은 기독교인의
특징입니다. 세상의 어떤 물질로부터 오는 기쁨은 진짜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새 자동차로 새 옷 새로운 모바일 전화기를
가졌을 때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역시 사랑과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식의 깊이에서 바르고
뿌리깊은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삶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기쁨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자신과 이웃과 모든 세상을 위해 간구를 합니다.

우리들 사이에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바른것을 찾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권능이 있으셔서
우리들이 영원히 살도록 그리고 오늘 본문의 충성된 청지기가 칭찬을 받는 것 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에 칭찬을
받도록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힘주실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설교의 결론으로 성경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13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개역한글판 살전 5장 13-24절)  Amen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 한인 예배 (2002년 11월 17일)
  • 엡 2:11-22
  • 설교자: 이성춘

021117
설교: 이성춘 목사
본문: 에베소서 2장 11-22, 
제목: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본문>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개역한글판)

<설교>
한국을 떠날 그때는, 저는 30세 초반이었고, 저희 아이들은 4살 그리고 2살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5년 그리고 독일에서 5년을 살다보니 처음 한국을 떠날 때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큰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리 아이들이 이제는 12살, 14살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필리핀 땅을 밟을 그때에는, 낯설게 소리치는 필리핀
사람들이 다 도둑으로만 보여 공항 밖으로 한 발자욱을 더 넘어가지 못하여 마중 나온 선교사님을 만나지 못하고 밤늦은 시간에 2시간
동안 서로 찾아 헤메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필리핀에서도 그리고 이곳 독일에서도 아무런 거끼림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외국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의 모습과 그리고 이제 지금의 모습에서 큰
차이와 성숙을 보면서 언어의 연수, 문화의 적응, 사역의 전개 등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들을 이기도록 인도하시고 오늘의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의 말씀, 11절부터 13절에서, 그때는
그리고 이제는 이라는 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신분상 큰 차이점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데, 가로막는 담, 중간에 막힌 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천이나 산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이쪽 마을과 강 건너 마을은 서로 눈으로도 볼 수 있고, 소리질러 대화를 할 수도
있는 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멀고 먼 동네로 여기고 평생 한번도 건너가보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산 동편과 서편에
있는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정말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딴 나라에 사는 것처럼 왕래도 없고, 그리고 한쪽 동네 아이가
다른 동네를 지나칠 것 같으면 몰매를 맞기도 하면서 서로 낯설은 이방인처럼 살아왔습니다.  하천을 끼고 구분된 동네, 산을 끼고
거리가 있는 동네는 단순히 공간적인 거리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움 감정과 편견과 그리고 서로가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깊이 페인 골과 간격을 가지고 평생 상종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1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신 분이고,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당대의 사람들을 그리스인과 바바리안이라는 야만인으로 구분을 하여 자신들을 아주 문화인으로 특권을 가진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족들만이 세상의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주변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오랑케로 여기면서 한국도 동쪽에
있는 오랑케라는 뜻을 지닌 동이로 불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양반과 상놈으로 신분을 구분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으로 여기고, 자신들 외의 모든 백성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단지
이방인들을 지옥의 연료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땅에 두었다고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아이를 낳으면, 연료감이 더
늘어난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지만, 혹 결혼하는 사람이 생겨나면,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장례식을 치루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은 좀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이 안듭니까 ?  유대인으로
이러한 취급을 받은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좋은 모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대감, 원수됨, 벽이 있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담은 양보하지 않고  남편 마음대로 하려는 모습 속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도 있습니다. 또한 나눌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해 어렵고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미움과 원수라는 담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 지역 공간 안에 함께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도 깊은 문화의 장벽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장벽들을 허물어 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인의 뜰,
제사장의 뜰, 그리고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고, 각 뜰들은 담과 건물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돌판에는, 이방인이
경계선인 울타리를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돌을 맞아 죽을지라도 자기의 책임, 과실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구분하는 돌담은 견고하고, 그리고 그 결과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밖의 삶에서도 그
구분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막힌 담,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그 막힌 담을
헐어버렸습니까 ? 인부들을 돈을 주고 사서 헐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유대전쟁을 통해서 로마병사들이 그 담들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담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허신 분입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원수된 것을 소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화평입니다.

영국이 나은 제 2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카펠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독일군에게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마지막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남길 말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죽이는 군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애국심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에는 카펠의
동상이 있고, 그 동상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애국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강으로나 산으로, 그리고
언어나 인종으로 구분된 차이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합니다. 

5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둘,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새사람은
누구를 가르키고 있습니까 ? 예수님은 화평이시기에 어느 한편, 곧 유대인 편에 서서 이방인을 멸시하지 않으셨고, 또한 이방인의
편에 서서 유대인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F.F. Bruce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거나,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 3삼의 인물인 그리스도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주님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후에 예수를 믿는자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흩어지면서 안디옥에 까지 오게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바나바가 목회자로, 그리고 바나나의 초청으로 바울이 함께 목회에 동참한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교회에서 비로서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다수가 소수를 흡수하여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의 편이 되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 함께 예배드리는 체코인- 한국인 예배공동체도 힘 있는 쪽으로 주도권이 이동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편에 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시에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군이 처음부터 강한
이기는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군의 화력이 더 우세했습니다. 이 때에 링컨 대통령은 각료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링컨은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편이 되어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군이던, 북군이던 하나님 편에 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연약한 북군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페하여,
새로운 율법인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주님은 겞뺐  율법이나 선지자를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 왔다궛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페하고 완성한다는 의미는 율법을 폐지시킨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잘못된
해석을 고치고 율법의 본래의 의도인 사랑의 법을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법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갈 5, 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제가 이 말씀을 다르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도 더 이상 없고,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도 더 이상 없고,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만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2-3일에 걸쳐서 팔레스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저들은 전혀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도 더
이상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만이 존재하여 서로 공존하며 사랑하며 섬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그런데 역사는 우리의 기대와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주님 앞에 더욱 엎드려 무릎 꿇는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팔레스타인들이 폭탄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무장한 군인들을 보내어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입니다. 이는 이,
눈은 눈 이라는 탈리오 규칙도 지키지 않고 한 사람이 죽으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일상적인 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팔레스틴 현장에 있지 않지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담을 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혈로 허물어 버린 담 위에 우리는 또 다른 담을 쌓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이러한 담들이
높아질 때,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도 그 담 안에 갇히고 맙니다.

16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의 말씀과
같이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에서는 왕에게 나아가 알현하고 인사를 드리고자 원하는
사람이나,  자기들의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려는 사람들을 왕에게 소개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관원인데 관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18절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고 하는 말이 곧 이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 왕 앞에서 다른
사람의 소개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직접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리를
놓아줄 유력한 사람이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 기독교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19
절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외인이고 나그네였는데,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외인은 나라나 고향을 잃어버리고 아직 정착지를
갖지 못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관원들의 판단에 따라 그 나라의 땅을 밝고 살아 가던지 아니면 새로운 다른 나라를
향해 떠나야하는 연약하고 불쌍한 신세의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그래도 조금 상황이 나아서 정착을 하고 서서히 현지의 상황에 적응
해가는 단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외인도 나그네도 타향에서는 서러움에 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정착을 해야했고, 언어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외인이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씁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건너편 동네에도 못 갔습니다.
그리고 산 너머 다른 동네도 가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도양과 대서양을 건너 이곳의 유럽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다른 동네의 사람들하고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 사람, 체코
사람, 미국 사람하고도 함께 대화하면서 교제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새로운 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들을 서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세계화의 현장 속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이곳 체코에 까지 와서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 가야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유럽 땅에서 우리는 더 이상
체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또는 독일의 튀빙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의
한인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년 5월에 있는 유럽 한인공동체의 신앙 축제에 여러 성도님들도 함께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체코에서 한인공동체에만 속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함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일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코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귀중한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저 자신도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을 중심으로한 독일어 영어 예배를 꿈꾸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