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보는 교회

  • 한인 예배 (2002년 01월 13일)
  • 행 9:1-31
  • 설교자: 이종실

02년 01월 13일
본문: 사도행전 9:1-31 
제목: 환상을 보는 교회

<공동기도>
저희를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는 교회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체코선교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며
응답과 순복이 있는 교회로 성장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더라.(행 9:31)

<설교>
세상은 꿈과 신념으로 움직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환상으로 움직입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업적은 꿈 꾸는 사람, 신념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와 역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시각 장애자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을 들라면 헬렌 켈러일것입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시력보다 더 불행한 것은 환상이 없는 시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어 단어를 빌리면 환상은 비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이성적으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이상한 정신현상이 아닙니다. 꿈은
인간의 신념의 영상이라면 환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스러운 영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신비스러운 영상
– 환상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의 성취를 위한 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주신 환상이 함께 하지 않으면 큰 섭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꿈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위한 목적을 가질 때
하나님의 환상이 그 꿈위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갖도록
행하신다”(빌2:13) 고 말합니다.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열심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의 일은, 교회의 사역은
하나님의 환상이 없으면 안됩니다. 아시아 선교를 위한 바울의 계획과 노력은 하나님의 환상에 의해 선교여행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공동체 창립 2주년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이 깊이 깊이 생각해야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절정을 이루어 믿는 이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신도들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흩어진 자들을 하나님이 복음화 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8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9장에서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일에 다메섹
회당이 협조하도록 요청하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는 그 현장에서
돌로 치는 사람들의 겉옷을 맡아 보관하는 일로 박해에 협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잡아가둘 대제사장의 명령을 손에 쥐고 있는 박해자의 선봉이되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을 따르던 고위
종교인사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모세의 종교를 위협하는 것으로 알고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인 사울은 율법과 예언을 잘 알았으나 자신 앞에 있는 메시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박해 선봉에 섰던 이 바리새인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을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사울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근처에 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환히 비췄습니다.
사울이 땅에 엎드리자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5절에서 사울은 질문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만남은 예수를 완전히 제거해야
된다는 사울의 믿음과 신념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종교를 굳건히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 달려온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확고한 신념과 평생의 꿈이 무너지고 새로운 자신을 세우는 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저는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는 말씀에서 충분히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이제 보이지 않는 사울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사흘동안 사울은
과거의 자기와 고통스러운 투쟁을 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율법의 시력은 잃어버리고 환상을 보게됩니다.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 들어 와서 손을 얹어 다시 눈을 뜨게 해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 사흘간의 기도와 환상은 며칠 후에 다시 보게된 후
예수님에 대해 사울이 그렇게 능력있게 설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새로운 환상이 사울을
변화시켰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환상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환상으로 만 두해째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우리 모두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울이 성경을 잘 알고 있던 바리새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사울과 같은 질문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감히 여러분들에게 이 질문을 요구합니다. 올바른 신앙은 성경을 많이 알고 그것을
교리로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알고 있는 신념과 교리의 껍질을 벗겨버려야 바른 믿음의 모습이 드러나게됩니다.
바리새인 사울이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환상은 자신이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던 것을 부인하게 하여 바른 확신을 갖게합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올바른 신앙인들은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회의하고 질문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환상으로 바른 확신을 갖는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하나님 앞에 질문을 했습니다.

“주
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입니까?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입니까?”(시15:1) 다윗이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갖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장하고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대면시키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봉사
속에서도, 교회를 섬겨가는 일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거울처럼 볼 수 있는 질문을 해야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도 사울의 질문이
필요합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질문하는 그 주님은 –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알고있는 것 보다 더 위대하고 크십니다. 우리들이 평생을 알아도 다 알지 못 할 분이십니다. 공동체의 날 수가 많아지는 만큼 공동체 안에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더 많이 드러나야 마땅할 것입니다.


나님을 아는 것이 사울을 변화시키는 방법임을 우리는 보고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교회는 그 만큼 변하고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고 계신분임을 우리들이 알 때,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인지 우리들의 영혼이 더 크게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개인으로서 교회로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더 나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겨우 두 살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의 의욕은 넘쳤지만 참았습니다.
우리들의 꿈과 계획으로 교회를 이루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지난 2년간 교회의 밑그림을 그려갔습니다.


단추를 잘못 채우면 모든 것이 헛수고입니다. 해외의 한인 교회들이 겪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대부분의 유럽의 한인 교회들이 지난 50년간 똑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오고 가는 유동인원이 많은 우리 교회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게 교회의 그림을 그려가야 됩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꿈으로 그린 그림은 후에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이 될 수 있기때문입니다.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보다 먼저 하나님을 더 깊이 더 많이 알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세상을 완전히 바꿀 잠재력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로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자신의 사역을 위해 적합하게 만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육신의 덩어리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그
자체이며 모든 수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지속적으로 주를 더 닮도록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원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을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광이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우리들이 되게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께 올릴
영광을 생산하는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22절이 말합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박해자가 진리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그의 나라를 사역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사용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쩌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사도 바울과 비교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을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찾아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할 만한 사람들이 안 되는 우리들을 왜 교회로 부르셨습니까?
50년의 한인교회 역사가 있는 이 유럽에서 현지교회와 함께하고 호흡을 같이 하는 한인교회의 모습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때에
더구나 한국인 이주의 역사가 짧은 이 체코에서 우리를 새로운 한인교회의 형태로 왜 불러모아주셨습니까? 체코선교를 위해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원치않으십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9절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들이 약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가
사용하기에 온전하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완전하다고 할 때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그의 미래의 사역에 대해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역시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나니아의 시력으로 사울은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은 사울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도자였습니다. 9장 15절입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가 우리교회를 환상이 아닌 단지 자연의 시력으로
바라본다면 교회당과 종탑과 친교실과 같은 시설들 만이 보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 모임들이 보입니다. 그것도 우리 자녀들 까지
다해야 50여명 남짓모이는 보잘 것 없는 무리가 보입니다. 우리들의 단지 친교의 대상으로서의 체코 공동체가 보입니다.
외국생활에서 스트레스 받아 병든 우리들의 몸과 마음들이 보입니다. 체코 교우들과 함께 하지만 언어와 다른 문화이해를 극복하지 못해
만남 자체가 피곤해 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음식 나누어 먹고 차 한잔 마시고 찬양연습하고 일년에 한차례 바자회나 해서
어려운 사람 외로운 이들에게 선물이나 돌리고 이런 저런 일들에 헌금한 것을 분배하는 일을 교회 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살얼음판 딛듯이 서로가 인간관계에 상처 내지않고 조심스럽게 예배 드리고 가끔 은혜 받는 것으로 안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주의 일 헌신이라는 것은 교회관리와 운영에 조금 협력하고 맡은 일 잘 처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사생활에 침해를 받지않는 여분의 시간에 적당히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삶의
문제가 없을 때는 별로 생각이 없지만 문제가 있을 때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이해해주고 마음을 같이해 주는 교회를 원하는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환상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건물과 사람들 너머의 교회가 보입니다. 환상은
우리가 정규적으로 교회에 오는 단순한 사람들의 무리가 아님을 보게합니다. 환상은 보잘 것 없고 고집스러운 저와 여러분의 모습 안에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잠재력을 보게 합니다. 환상은 체코교회 안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노력 너머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사울이 기독교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살기가 등등할 때 하나님의 환상이 나타나 오히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두 해전 체코 기독교인들과 한국기독교인들이 예배로
만나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계획과 꿈들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개혁교도의 종친회와 같은 체코인 공동체 안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일부에서 체코민족들만이 체코어로만 드리는 예배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두 가정이 교회를 떠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련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련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별이 더욱 밝게 빛나듯 시련이 클수록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은 더욱 더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체코 한국 기독교인들의 연합예배라는 인간의 계획과 꿈 위에 “선교하는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환상이 바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 공동체”였습니다.

첫째, 개혁교도의 종친회 같은 체코 교회가 열린교회로
둘째, 개혁교도의 종친회 같은 체코 교회가 지역사회의 센터로
셋째, 개혁교도의 종친회 같은 체코 교회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우리를 통해 체코교회를 변화 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첫째,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드리는 예배 공동체 – 예배를 한주일의 행사가 아니라 일주일동안 말씀과 기도로 씨름하며 매일 매일을 예배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둘째, 배우는 공동체 -가르치고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타인으로부터 경청과 배움이 있는 공동체
셋째, 함께 일하는 공동체 – 목사부터 어린자녀에 이르기까지 작은 일 하나라도 함께 섬겨가는 공동체


리 공동체는 모두 함께 일하는 일터이자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세워가는 훈련장입니다. 함께 일하는 공동체 이기에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교회 봉사자들이 교회의 사례를 받지않습니다. 그리고 봉헌한 물질은 선교와 구제와 봉사를 위해 사용하기로 처음부터 선언을
하고 시작된 우리들 입니다.

우리 교회는 원대한 일들을 계획하고 도모하기 전에 먼저 이처럼 자신을 성찰하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인간의 계획과 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환상으로 지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래서 첫날인 2000년 1월 9일 첫 설교를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그날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각자 각자의 믿음의 토대위에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고자 모인 첫 예배의 설교시간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믿음을 가졌는가?’ ‘자기의 무기력함과 죄인임을 깨닫고 어쩔 도리가 없어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도우심과 용서를 간구하는 우리들인가?’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로 – 완전히 벌거벗은 자로 설 때 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가 바르게 서갈 것입니다.”
2000년 1월 9일 첫 설교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회 일은 인간의 계획과 꿈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환상으로 성취되어가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의 계획과 신념과
꿈을 세우는 인간의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환상을 밝히 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빕니다. 인간의 시력은 표면적이고 제한된
것을 보지만 환상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보실 수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잠재력을 보게 합니다. 체코교회를
향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의 환상에 순복할 줄 아는 공동체가 되십시다.

<설교 후 기도>
교회
의 개혁이란 언제나 처음으로 처음의 교회 초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압니다. 이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 우리의 공동체를
세워주신 처음 그때 우리들의 마음과 결심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새로워지게 하여주시옵소서. 해를 거듭할수록 반성이 없는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그런 어리석은 저희들이 되지않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앞에서 바른 신앙을 갖기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리고
교역자부터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동역하며 섬겨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인간의 계획과 경험과
꿈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환상으로 움직여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교회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모든 이들의 복의 근원이 되는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성탄이후의 고통과 하나님의 통치

  • 연합 예배 (2002년 01월 06일)
  • 마 2:13-23
  • 설교자: 슈테판

스물다섯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현주일
본문:마 2:13-23
제목:성탄이후의 고통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에 성탄일 다음으로 중요한 주일로서 민속적으로 세분 왕 으로 불리우는 주현주일로 우리들이 함께 지킵니다. 세분 왕 이야기로부터 저는 오늘 두번째 의식 절차인 거룩한 가정의 애굽 피난을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밤중에 서둘러 피난하고, 헤롯이 분노하고, 베들레헴 어린이들의 피가 흐르고,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어머니들의 절규와 신분을 숨긴채
애굽에서 체류하는 가족… 이러한 이야기들이 성탄절의 말씀입니까? 그러나 교회는 성탄절의 중간에 첫번째 순교자 스테반 집사를
회상하고 „유아 살해“를 기억하는 이유를 잘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기쁨의 그리고 가정의 날로,
슬프고 희망이 없는 잿빛 날들의 중심에 몇몇 아름다운 날들이 작은 섬으로 성탄을 이해하는 오늘 그렇습니다. 정말로 오늘은
우리들에게 성탄의 행복에 힘든 현실을 밀어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빛을 우리 자신들에게 비추기 위해서도 아니며 더구나
오늘 사람들이 성탄과 연결하는 작은 좋은 것의 기쁨을 우리들이 세상에서 부패 시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기쁨과 평화는
세상으로부터 성탄이 정당한 것임을 인정 받는 내용을 창조합니다.

성탄은 하늘에서 뿐 아니라 땅에서도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승리한 교회에서 뿐 아니라 투쟁하는 교회에서 역시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 뿐 아니라 현재에도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우리의 성탄절들은 상당히 이 땅의 삶과 관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한밤중에 하나님은 하늘을
찢으셨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자신의 영광을 비추셨으나, 우리들에게 탄생한 아들은 기쁨도 없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빛은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비추고, 그의 탄생은 “기쁨과 소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빛의
오심은 어두움이 모든 여력을 모아 절망적인 반격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유아 살해의 위험을 알립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속임을 당한 헤롯이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게되고 자신의 목적을 수행한 어떠한
방법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자리를 차지한 그는, 더 잘 설명하면, 로마를 협력하는 대가로 유대왕의 왕위를 차지한 그는 약속된 다윗
왕국의 길에 자신의 위치를 세우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 스스로 메시야 시대에 모든 민족을 준비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그를 선택하였던 부르심이 모든 전선에서 방해받았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보호를 받습니다. 구약의 말씀대로
그의 하늘 아버지의 거대한 손이 그를 깨웁니다. 아기와 어머니의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요셉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명령에 순복합니다.

거칠게 이는 인간의 죄의 파도가 들이치는 것을 원치않으시는 하나님이 마귀의 격랑에
자신의 첫아들을 보호할 하나의 댐을 건설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가정은 한 밤중에 몰래 급하게 피난을 떠납니다. 이름이 알려진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않은 화가들이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낯선 외국 어느 지방 한 밤중에 요셉이 끄는 나귀 위에서 아기를 팔에
안고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왕위를 찬탈하는 자를 피하는 유대 왕; 꼭두각시 왕을 피해 도망가는 진짜 왕; 과거에 속한 사람 앞에서 미래에 속한 사람; 힘없는 아이 – 우리가

망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절대권력자를 피해가는;  죄에 죄를 쌓는 범죄를 피해 도망가는 죄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자(시 2:1-2)를 대적하는 계획을 하는 세상의 왕들과 무신론자들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이스라엘과
선택받은 민족의 모든 구약시대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이방의 나라 애굽으로 도망하고 있습니다. 7년간의 기근을 피해 열한명의
야곱의 아들들이 형제 요셉을 찾아 애굽으로 갔습니다; 노예의 땅 애굽에서 모세가 민족을 약속의 땅, 자유의 땅,  예언자
이사야가 애굽인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꿈을 꾼 그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애굽에서 유대의 왕은 피난민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장 11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을 자가 없느니라“(눅 4장 24절)
이 모든 것을 성인 남자가 겪는 것이아니라 아직 어린아기, 피난민 아기가 겪어야만 했던것입니다.


롯의 유아살해 작전은 죄의 모습이며 모든 무기를 드는 마지막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이며 문명사회의 모든 전쟁들이 밟아왔던 마지막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입니다.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까지 사내아이“ 단지 예수와 같은 나이, 거주지 그리고 성
때문에 죄가되어 목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P Brueghel의 커다란 그림을 혹시 보신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 시골풍경을 배경으로 헤롯의 군대들이 기웃거리며 자신들의 희생물을 찾고있고 모든 것은 혼란스러워지고 불탄자리 눈물 피가
강이되어 흐르고 고요하고 모두 잠든 조그마한 마을 베들레헴을 악이 달려들고 파괴된자리 눈물 비명 두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은
고통스러운 모습 맹세 반항 그리고 좌절이 담겨있는 그림입니다. 전쟁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던 것을 느낄 수 있는 악들의 격렬하고
광신적인 잔인성 – 악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그 잔인성입니다.

베들레헴의 죄없는 아기들 이때 죄없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없는 아기들은 포악한 통치자에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포악한 통치자는 베들레헴의
예수를 깨우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에 비해 더 힘이 없습니다. 헤롯의 잔인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잔인성에 대해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 보다 암퇘지가 되는 것이 낫다 라고 잔인하게 희화화 시켰습니다. – 피흘리는 궁전의 혁명을
공격하였다.

계몽주의 시대는 베들레헴의 유아학살에 세번째 제국(히틀러 통치시대)의 수용소에서 유대의 대량학살
희생자들이 된 그 숫자를 알 수 없는 유대 어린이에 비유한 쇼킹한 코멘트를 첨부하였습니다. 오늘 유대 어머니들은 모세의 그리고
예수의 백성들에 속하기 전에 다른 어떤 죄도 없는 자신의 아기들을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회당을 공격한
것이 교회를 공격한 것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중한 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유대인의 별을 달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한 편이 되어 그들을 돕지 못한 중한 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헤롯의 코멘트가 있습니까?

스라엘 군대가 성탄 전야의 성경의 베들레헴의 한 밤의 고요함을 지켰습니다.(지켰어야 했습니까?) – 통역자주: 최근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금번 성탄절에 팔레스틴의 테러를 염려해서 군대를 주둔시킨 최근의 뉴스를 두고한말.


귀에 끌려가는 인간이 저질러 놓은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의 고통과 인간의 놀람들은 성경에 묘사되어있습니다. 시편에서 예언서에서
울부짖는 욥에게서 그리고 예레미야의 눈물에서 나옵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왜 악인가? 이 질문에 대해 설명하거나 이유를 대는 
대답이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인간의 악의 표현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단지 동방 박사들이 헤롯에게 하늘에 대해
속이지않았습니다. 특별히 이빨로 깨기에 너무 딱딱한 마귀가 이끄는 그 악이 헤롯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은 헤롯의 기다란 팔이
예수에게 다다르게 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폭군은 단지 제한된 시간을 통치할 것이며 그의 통치는 노예가 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만을 남겨둔다는 한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헤롯은 죽을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옥에 갔다고 우리들은 말하고
싶지않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의 예를 위해 그를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고 시도하지않을 다른 통치자들이 헤롯의 뒤를 이을것이며 별로 그리고 박사들로 혼돈스러웠던 것을
오늘 더욱 신선한 새로운 것을 위해 잊어버립니다. 어머니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는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마귀의 일을
멸하는“(요일 3장 8절)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는 곳 갈릴리 나사렛 집으로 돌아올 수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도 막지 못한다는 커다란 희망을 찾읍시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고
할지라도; 작년 9월부터 핵무기로 위협하는 새로운 시대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전지구적으로 위협받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음을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밀폐된 벽이 남한과 북한을 나누고 있고, 아프칸 난민의 어린이들이 기아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귀의 마지막 행진임을 우리들은 믿어야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미래는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던“(요 1장 5절) 빛에 속해있습니다. 이 성탄의 복음의 빛 안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새해 2002년을 바라 보아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오늘 설교하신 슈테판 목사님은 찰스대학 개혁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이며 꼬빌리시 교회 교인이다.

신앙인의 망년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30일)
  • 고후 7:10
  • 설교자: 이종실

01/12/30 (성탄 후 첫번째 주일)
제목: 신앙인의 망년
본문: 고린도후서 7장10절

<공동기도>
우리를 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해동안 교회를 통해 말씀과 은혜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부족한 것과 넘치는 것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설교>

난 28일 금요일은 한인회가 송년의 밤 행사를 가졌습니다. 미국 대륙과 서유럽 아니면 광활한 땅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대륙으로
희망과 미래를 찾아 이주한 한인들의 삶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작고 외국인에 대해 폐쇄적인 체코의 한인들의 삶의 양태와 아직
세분화되지 않은 한인사회가 한인회를 구성하고 이렇게 송년의 밤을 갖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성이 많고 넓은 공간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에 비해 비좁디 비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는 마치 감옥 밖의 삶과 감옥 안의
삶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좁은 공간에서 나는 온갖 인간의 냄새는 절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여명이 넘는 교민들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를 하며 한해의 마지막을 그렇게
어울린다는 것은 새로운 한해를 희망 안에서 받아들이려는 몸짓이라고 믿습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친구들과
아는 이들과 어울려 한끼 식사 한잔 술을 나누는 것을 이맘때 되면 망년회라 하여 한차례 예식처럼 치르는 것도 한해의 좋고 나쁜
기억들을 과거로 하고 새로운 해에 새로운 관계를 다짐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허물과 실수로
점철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은
이말 저말 하지 않고 술잔을 부딪치고 취해 서로의 섭섭한 마음을 풀고 어깨동무하며 헤어집니다.

맺혔던 인간관계를 풀고 새롭게 하는 이러한 망년회가 우리 성도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마음에 쌓인 담을 헐지않으면 더 깊고 맑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에게 망년은 더욱 필요합니다.


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일원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편스러운 인간관계는 우리들의 삶을 매우 힘들게 합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
사업관계로 각종 모임에서 괴롭지만 생활을 위해 피할 수 없이 만나야 되는데 안식을 누리고 싶은 주일날 교회에서 까지 그 관계가
연장이 될 때 그 고통은 더욱 큽니다. 최소한 주일만큼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어야 할 그날이 불편한 인간관계가 오히려 더
악화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츰 후회와 원망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교회를 나왔던가?” “이렇게 덕이 안
되는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되나?” “그냥 마음에 맞는 한 두 사람이 모여 테이프로 설교 듣고 헌금해서 좋은 일에 쓰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섬기던 교회에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얼마 있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갈 내가 왜 한국 사람들과 이
교회에서까지 이렇게 어울리며 살아야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권면한 오늘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고후 7장 10절

원망과 후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이 아닙니다. 원망과 후회는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망과 후회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쇠약하게 하는 사탄의 달콤한 계략입니다. 원망과 후회는
세상 근심으로 사망을 이룹니다.

원망과 후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는 영적인 눈을 상실하게 합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들의 가정과 나의 사업과 자신의 신앙생활에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없습니다. 원망과 후회는 나의 결혼을 통해
나의 가족을 통해 나의 직업을 통해 나의 교회를 통해 나의 모든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이유를 잊어버린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원망과 후회는 자신의 삶의 방식과 뜻으로 우리를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꺽으려는 시도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원망과 후회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요 10:10).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특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희망과 기쁨을 원망과 후회가 우리에게서 결단코 빼앗아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지만 원망과 후회하는 것들을 종지부 찍지 않는다면 묵은 해동안 우리들이 원치 않던 모든 인간관계를 고스란히
새해에도 이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신앙인들은 과거를 과거로 만드는 망년을 할 수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들은 한해동안 원치
않았던 불편한 인간관계의 사슬을 끊고 새롭게 희망가운데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최선의 것을 예비하셨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지않고 언제나 불평과 후회로 혼란스러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 밖에 있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을
결코 즐길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후회하고 불평하는 당신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받거나 포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제 2, 제 3의 계획을 계속 준비하십니다. 심지어 후회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통해
그들에게도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뜻을 우리들은 파괴할 수도 꺽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세상안에서 우리들의 생애 한 가운데서 그 뜻을 이루어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9-10)

무슨뜻입니까? 우리들의 한해의 삶이 설령 모두 엉망이된 쓰레기장 처럼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쓰레기장 같은 삶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우리들 세워두셨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원망과 후회의 배경에는 우리들의 허물과 실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해 동안 우선 목사인 제 자신부터 허물과 실수가 많았습니다.

에 허물과 실수가 있었습니다. 감정에 허물과 실수가 있었습니다.  생각으로 오해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말할 수 없는 허물과 실수를
저질르면서 살아온 한해였습니다. 저의 이러한 허물과 실수로 인해 원망과 후회를 하는 분들이 계셨을 줄압니다. 더구나 제 자신을
들여다 보면 목회를 위해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이 다가오면 “이러한 허물과 실수가
내게 있는데도 교회 공동체가 유지될까? 주일날 교우들이 교회에 나오실까?” 불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면
다가오는 느낌은 오늘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 하셔서 무사히 마쳤구나 하는 안도감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려운 일을 겪으실 때 마다 부족한 저로 인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지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었습니다.


러나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복주시기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그 누구도 목사의 부족함과 허물과 실수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목사 한사람의 능력과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망하게 하고
후회하게 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허물과 실수 때문에 나를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그런 약하고 무기력한 분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인간 역사상 가장 큰 죄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거룩한 분을 죽인 죄입니다. 이보다 더 큰 허물과 실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허물과 실수를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0)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장 27-28)

이것 모두가 무슨뜻입니까? 성경은 오히려 그 인간의 허물과
실수가 하나님의 통치계획아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실망시키고 후회하게하고 원망하게 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허물과 실수를 하나님의 통치계획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져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후회하고 원망스럽게 하고
좌절시키는 나 자신의 허물과 실수역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있으십니까?

나의 우리들의 형제
자매들의 허물과 실수에 대해 달리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오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해 원망과 후회를 일으킬 허물과 실수를 범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간구하며 살아갈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간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0-12)

무슨 뜻입니까? 원망과
후회대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 소리가 있는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도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위에서 죄 용서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삶을 따르게 되어 허물과 실수를 지속적으로
반복할지라도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않고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인 원망과 후회는 조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시간으로부터 영원합니다. 세상을 위한 그의 목적은 영원하며 여러분과 저를 위한 그분의 목적은
영원합니다. 우리를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그 목적은 바뀌지않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들의 허물과 실수와 그리고 우리의 나쁜 선택
때문에 변경되거나 좌절되지않습니다.

열두제자 중에 하나인 사도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던 어느날 베드로는 그의
친구 그의 주님으로 부터 도망하고 포기할 뿐아니라 그가 주님을 알고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마 26:69-75)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배반 – 그의 허물과 실수는 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키지않았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후 베드로를 용서해주실 뿐아니라 사도로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드로는 초대교회 설립자이며 지도자가운데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두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로 부르신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고향을 도망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위대한 왕 다윗은 자신의 부하의 부인을 취하기 위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왕위에 보존시켰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리워진 사울은 기독교인을 감옥에 가두고 추방하는 박해를 하였던
사람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인물가운데 허물과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무슨뜻입니까? 죄가 나쁘지않다는것이 아닙니다. 이들 사람들 모두는 죄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악한 죄일지라도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과 실수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성탄 후 첫째주일이자 2001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허물많고 죄많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교회절기의
시작이고 교회절기가 시작되는 대강절이 원망과 후회 그리고 허물과 실수로 점철된 한해의 마지막달 12월은 세상생활의 끝입니다.
이 절묘한 교회절기와 세상달력의 조화는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지나간 한해를 과거로 종지부를 찍을 것인지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망과 후회를 있게한 우리들의 허물과 실수 조차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믿으십시다. 우리의 나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시고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지하면서 새해에는 하얀백지위에 우리들의 사랑과 이해와 관용을 그림그립시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 소리로 우리의 교회를 가득채웁시다. 그래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를 통하여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체코교회의
숨통을 누르고 있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합시다.

<설교 후 기도>

사다난 했던 한해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묻혀살다가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로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교회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대과
없이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허물과 실수로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불러주신 형제 자매들에게 원치 않게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 일들이 있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망과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든 것 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임을 믿고 주님의 선한 인도함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한해동안의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웠던 모든 것은 과거로 종지부찍고 새해를 맞이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다윗과 아비가일

  • 연합 예배 (2001년 12월 25일)
  • 삼상 2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1/12/25 (성탄 예배)
제목: 다윗과 아비가일
본문: 삼상 25장

<설 교>


제 자매 여러분 우리들이 오늘 에큐메니칼 예배는 특별히 아름다운 예배로 기억될것입니다. 우리들 한국인 체코인들이 함께 있는 것이
절대로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한국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기서 손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탄생한 집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체코 형제들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 거주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기 예수와 연결되어있습니다.

한국교우 여러분 그리고 우리 체코교우 모두는 혈과
육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났습니다. 우리들의 상호 사랑 또는 호기심이 우리를 연합시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시고 연합시킨 연합예배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 처럼
집없는 다윗 추종자 집단처럼 결속력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다윗의 사람들 역시 먹어야 삽니다. 사울을 피해 산으로
도피한 자들이 나발(그의 이름은 Bloud 란 뜻인데 하나님에 대해 무식한 사람 – 바빌론 사람) 을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생활하였다. 마피아가 한것처럼 그것을 강요했는지 아니면 이기심 없는 마음으로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굶주린
약탈자들이 하는 것 처럼 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다윗 공동체에 많은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당연히 놀랄것이며 그리고
우리들이 그 땅에서 먹을 것이 있고 함께 재물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찬양하게 될것입니다.


러나 다윗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더 영광스러운 무언가가 더 준비되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다윗이
여자를 조금 밝히는 것을 아십니다. 다윗의 여행길에 한 여자가 청원하러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호소력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의해
배가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에게 자비를 얻어야했습니다. 완고하고 악한 남편의 잘못을 스스로 감당하였습니다. 세상 죄를 스스로
담당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로인해 다윗이 돕습니다. 벌 내리는 것이 멈춰지고 불쌍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발이 술잔치에서 일어섰을 때 그는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여 바로 죽었습니다.
치료하기는 늦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명의 여자가 건론되었습니다. 이들 여자들은 예수에게
안내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여자들이 다윗 왕국을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남자들에 의해 의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사무엘 어머니 한나 그리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시작하였습니다. 아비가일 없이 이스라엘의 다윗 왕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자신의 남편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교회를 지원하고 있는 경건한 여자들은 그리스도 왕국의 앞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여자가 주변이 되고 조용히 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은 다릅니다. 공동체적으로 교회적으로 멸시 받는 자들이 하나님
곁에서 앞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계획 앞줄에 멸시 받는 자들을 세우셨습니다. 환란당한 모든 자,
빚진자, 마음에 원통하는 자가 다윗의 아들 왕국에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서 남자는
옆줄에 세워져 있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에 그의 백성들이 모인곳에 많은 지혜로운자들도 권력있는 자들도 많은 신분 높은 자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약한 것을 하나님이 불러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눈에 비천하고 천한 것을 하나님이 선택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자랑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연합 성탄 예배가 아름다운것입니다. 남자의 뜻으로 그리고 여자의 뜻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기때문입니다.

AMEN

하나님의 선물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23일)
  • 엡 2:4-8
  • 설교자: 이종실

01/12/23 (대강절 넷째주일)
제목: 하나님의 선물
본문: 에베소서 2:4-8

< 공동기도>
아기 예수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영생의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 교>

대강절 네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라하의 성탄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탄나무 시장과 잉어 시장이 지난 주부터 거리를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맘때 되면 체코가정 마다
성탄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성탄일을 앞두고 집마다 대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성탄과자를 구워냅니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 과자
굽는 냄새가 집집마다 흘러나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성탄나무에서 은근히 풍기는 솔 나무 냄새와 과자 굽는 냄새가 어울려 후각의
성탄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습니다.

온 가족들이 성탄 선물을 준비해서 성탄장식나무 아래에 갖다 놓습니다. 욕조 안에는
살아있는 잉어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준비될 기름에 갖 튀겨낸 따근한 잉어튀김과 차가운 감자 샐러드와
잉어내장으로 만든 국 – 성탄 잔치음식을 생각하면 입안에서 군침이 돕니다.

며칠동안의 성탄절 방학까지 맞이한
아이들은 흥분해서 이 방 저 방 뛰어다닙니다. 성탄장식 나무아래 놓여있는 선물꾸러미를 24일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몇번씩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소리를 들어봅니다. 포장지로 감추어진 물건을 손으로 더듬다가 그만 자지러지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깡충
깡충 뜁니다. 그 선물은 틀림없이 아이가 간절히 원하던 물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성탄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 만큼 성탄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성탄은 가장 값지고 꼭 필요하고 그리고 때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좋은 것을 받는 신나는 날입니다.


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요한 1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 5:11-12)


선물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살아있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리가 살면서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엄청나게 좋은 것은 평상시에 좋고 감사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없다고 상상하면 그것의 귀중함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만약에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가정이
없었다면… 만약에 교회가 없었다면… 만약에 목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성도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내 곁에 데려다 놓은 교우가 없었다면…
한번 상상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알기위해 먼저

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세상에 결코 온 적이 없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로 나누는
역사 연대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는 희망이 없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징하는
성탄절 선물도 성탄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탄일종이 땡 땡 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리네” 소외되고 잊혀진 자들을 기억하는 성탄절 노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없는 세상은 성탄절과 흰 눈이 없는 겨울과 같을것입니다.


수님이 없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가운데서 의미없는 삶을 살다가 그녀는 죽었을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의 고향에서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평생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의 잔인성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을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고기잡는 일 이외에 어떤
일도 더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엄격한 율법주의의 바리새인을 벗어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자들은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안고 살아갔을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자는 계속 다리를 절고, 눈 먼자는 어두움속에 계속
머물러있고, 듣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는 말을
우리들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않았다면 우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용서가 없다면 죄가 사라지지않고 죄에 대한 비난이 우리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신적이 없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아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용서와 화해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단지 율법의 복종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의와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려고 하기보다 그들이 지켜야될 것을 아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은 우리들 모두에게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용서가 가져오는 자유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용서할 수 있고 그리고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에게 주신 용서와 그로인한 자유함의
체험이 있기때문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1 3:1)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양이 되어 죽으심으로 열어주신 은혜의 행위로 용서함을 받았기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용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들의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지하철을 타면 안에
광고들이 즐비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내무부에서 국민 계몽을 위한 광고가 있습니다. “내무부가 경고합니다. 부정부패는 성품을
파괴합니다.” 부정한 일, 나쁜 일은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시키고 타인과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나쁜 음식 나쁜 공기를 마시면 육신이 망가지듯이 나쁜 행위, 나쁜 생각, 나쁜 말은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에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우리들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회개와 정의와 봉사와 섬김과 나눔입니다. 이 말씀들을 듣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들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인격과 성품 뿐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들의 영혼까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영혼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해외에서 우리들이 아름다운 교회로 가꾸어가는 노력이 매우 소중한것입니다.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 심지어 영생의 문제까지 영향을 주는 영혼을 주님의 모습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선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동번역 성경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단지 우리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용서의 주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에 그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 – 아기 예수 탄생은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천국 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고전 15:19)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영생의 소망이 존재하지 않으면 심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마 25:21) – 부활의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늘 현실이 모두 다입니다. 영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닫힌 관두껑과 차가운 무덤외에 어떤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기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다가올 기쁜 일들을 생각하며 악을 선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늘의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 아기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수님이 오셔서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그리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를 경험하자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체험으로 영생과 하늘나라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후 기도>
주님을 기다리는 마지막 촛불이
켜졌습니다. 우리들 앞에 우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하나님의 선물 –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을 살리실 뿐 아니라 주의 모습으로 날마다 변화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아버지앞에 가는 그날 까지 생명을 주는 주의 성탄의 빛을 드러내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