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08일)
  • 요 1:19-28
  • 설교자: 이종실

01/12/08 (대강절 두번째 주일)
본문: 요한복음 1: 19-28
제목: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공동기도>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례 요한 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이 메시야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설교>

가는 아름다운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 5-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사람들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으로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징이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은 재앙이었으며 수태하지 못하는 여자와 후손이 없는 남자는 실패한 삶, 저주 받은
삶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삶은 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입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가 그의 아들을 낳았을
때 수태를 하지못하던 야곱의 여인 라헬의 고통입니다. 마침내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이 나의 수치를 씻으셨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라헬의 이 고백 속에서 단지 아이를 갖지
못한 이유 때문에 당했을 억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겪은 여인들의 한들이
천지를 진동할 때 그 여인들의 태 속에 곧 다가올 새로운 시대가 요동을 치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자녀 없는 부모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뿐 아니라 억울하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의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음서 가운데 특히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요한의 이야기와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요한의 수태를 알렸고, 처녀 마리아에게는 직접 예수탄생을 알립니다. 늙어 수태를 한 친척 엘리사벳을 보고 천사의
처녀 수태 예고를 받아들인 마리아가 어느날 해산이 가까운 엘리자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찬양을 하고 사가랴도 찬양을 합니다.
비록 할례를 받는 난지 8일이 지날 때 까지 아들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탄생 전에 이미 요한과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많은 병행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병행되는 이야기들이 요한과 예수가 누가
그리스도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되는 이야기 요한을 통해서 더 분명히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그리스도의 탄생 불과 몇 달 앞에 태어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기다림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공회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네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는 매우 단정적인 질문입니다.


질문에 대해 성경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란 말은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숨기지 아니하다”란 말은 “거절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한 완벽하고 진실한 고백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일등에 대한 애착이 많은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외국기자는 “한국에는 일등은 많고 이등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외국인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모두 1등을 만들려고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모두 1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할 때 타인을 인정할 수 있어 비로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됩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명제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며칠전 여성도 성경 공부반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WEC 이라는 유수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가 선교사를 파송하기전 훈련을 하는 데 그때 가장 강조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보다 6개월 형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목수의 가문인 반면 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꼬?”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은 듣고 잊어버리는 매일 일어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 지지않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요한이 조그만 긍정했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꼭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면 모르냐” “꼭 내입으로 언급해야 너희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어도 그는 최소한 한 종파를 이루어 지도자로 군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어
숨기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잘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자기를 긍정하게 하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그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일꾼삼으십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하여 적합한자가 아닙니다.” – 자기 부정을 했을 때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동반하여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 보냈습니다.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깨끗게 하시고 그를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때 예수께서는 그를 택하여 “사람을 취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대인의 격언가운데 “네 혀에게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겸손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은 21절 과 22절에 나오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사냐?” 이에대해 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요한에게 질문자는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계속해서 처음에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음에는 “나는 아니라” 마지막으로 “아니라” 부정을 하고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부정에 대해 그들은 요한 스스로 자기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
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을 세번 부정한 후에 한 자기 긍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자기 인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PR하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 같은 자기의 존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한 인격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인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리를 세상에 아름답게 내는 기능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인간-세상은 조화로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자신을 알고 자기 기능을 알고 자기 자신에 충실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는 겸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인역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기 자신을 잘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리로 철저히 자기를 그리스도의 뒤로 감춘  세례요한의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기쁨이 이 대강절에 여러분의 생애를 지배하시길 빕니다.

<설교후 기도>

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단지 그리스도의 소리로 자신을 규정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던 요한 처럼 우리들의 삶이 오실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죽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놀라운 역사 일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세례 요한의 질문

  • 연합 예배 (2001년 12월 02일)
  • 마 11:2-6
  • 설교자: 이종실

스믈네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일: 대강절 첫번째 주일
본문: 마태복음 11장 2-6절
설교: 이 종 실 목사

<본문> 

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설교>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어 질문하게 합니다. 대강절 첫번째 주일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의 질문은 당신은 나보다 더 위대한
분이십니까?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 질문을 했을까요? 의심때문입니까?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이 보냈을 사람에 의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기를 희망했을는지 모릅니다. 요한은 둘은 같은 주인을 위해 일한다는 사인을 예수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습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룸발이가 걷고 문둥병이 깨끗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들 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는 옛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증거를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감옥으로부터 풀어줄 것을 언질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로 요한은 희망을 갖게될 것입니다.

소경이 보고 절룸발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치유되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을 선포하는 이사야 35장을 인용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복된 소식을 말하는 이사야 61장을 예수님은 인용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가 나를 보내심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의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사야 42장을 인용한 것도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는 갇힌 자를 옥에서 풀어주는것에 대해 말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유함과 해방이 온다는 말을 하지않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있습니다. 그의 소명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설교와 세례로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길을 죽음으로 준비해됩니다.


한은 세상의 권력자의 손에 죽음으로써 예수의 길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의 계획 요한의 갈망 요한의 꿈들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갈망 하나님의 꿈이
실현될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여기 모든 사람들의 큰 적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옥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꿈과 계획의 끝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기다리며 사라진 우리의 희망과 꿈과
함께 우리 자신의 감옥에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있습니다. 불행할때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좋지않는 일들은 행복할 때에 우리들이 저질렀던
잘못에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 가졌던 자신들의 경험들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경향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복할때가 좋지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건강 소유 행복 그리고 평화 이것들은 좋은것이며 필요한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단지
감사하는 믿음을 우리는 배워야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현존과 동등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에게 문제는 우리가 이들을 가지고 있지않을 때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소유하고 싶어
만족하지 못하고 슬퍼함으로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가 좋았던 그 시절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별로 편안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존재하심을 믿는 것을 배웁시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음을 듣는 한에서 우리는 행과 불행의 어떤 상황에소도 하나님의 현존을 확신하게 될것입니다.

요한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이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여러분과 제가 원치않고 기대하지 않아도 오고 계십니다.
아멘

미련한 자들의 슬픔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25일)
  • 마25:1-13
  • 설교자: 이종실

01/11/25 (삼위일체 후 스물네번째 주일)
본문: 마태복음 25장 1-13절
제목: 미련한 자들의 슬픔

<공동기도>
세상을 사랑하시어 구원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믿는 다고 하지만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없어
불안해 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미련한 자들의 슬픔이 우리들의 슬픔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설교>

년 전 저의 아이 김나지움 입학시험 발표를 보기위해 학교를 갔습니다. 체코 학교는 합격자 발표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학교 현관 유리에 A3용지 한 장이 붙어있고 사람들이 거기에 옹기 종기 모여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합격자 명단인 것을
알았습니다. 수험생 백 여명의 성적이 1등부터 차례로 모든 과목의 점수와 총점을 밝힌 성적 리스트가 현관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30등 학생 이름과 성적 밑에 빨간 밑줄이 똑 바로 그어져 있었습니다. 빨간 줄 아래 이름들은 불합격입니다. 합격선 위 아래
학생의 성적차이는 불과 0.01이었습니다. 억울한 불합격생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체코학교는 “odvolani”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불합격된 학생의 학부모나 가르친 선생님들이 합격 청원을 하면 심의를 해서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한국에서
입학시험을 떨어지면 이차 삼차 아니면 재수를 해서 원하는 학교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떨어지면 두 번
다시 치르지 못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불합격되었다고 하소연 해도 관용이 없는 시험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천국
입학시험입니다. 오늘 본문의 천국비유는 특히 신자들인 우리들에게 정신이 번쩍 나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합격한 줄 알고 넋 놓고
있다가 떨어진 사례입니다.

천국은 혼인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결혼 풍습은 팔레스틴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부장 사회로 결혼예식은 신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이 결혼식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신랑과 신랑 일가친척들은 신부의 가족과 신부의 가격을 협상하고 있습니다. 딸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협상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딸을 크게 사랑하는 가족은 딸을 잃게 되는 것을 마음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마음을 보여 주려면 흥정은 자연히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이나 물건의 가치에 대한 흥정이 아니라 양가 집안의 관계성과
상호 존중과 존경을 세우는 협상입니다.

신부의 가격을 결정해야 신랑과 그의 일가친척들은 신부와 그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혼인식과 잔치에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흥정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늦어져 밤까지
지연되고있다. 요즈음 시대 같으면 전기와 가로등이 있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당시는 들러리들이 등불과 횃불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들러리들의 역할은 길을 밝히고 그 불빛은 결혼식의 분위기를 연출하게 될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들러리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 4절까지 말씀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로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태 25장 1-4절)


러리들이 10명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외모로 누가 지혜로운 들러리인지 누가 어리석은 들러리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10명의
아리따운 들러리 처녀들은 하나같이 옷 단장을 하고 머리를 깨끗이 손질하고 얼굴에 분을 칠하고 장식을 달아 치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등불은 모두 밝게 켜져 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면 언제든지 바로나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신랑과
그의 일행이 오는 일이 점점 지연이 되자 모두들 기다리는 것에 지쳤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도 모두 하나같이
기다리기에 지쳤습니다. 벽에 기대어 졸고 자는 그들의 모습을 만약 여러분들이 둘러본다면 누가 어리석고 누가 현명한지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장한 옷들이 구겨질까봐, 머리가 흐트러질까봐 조신하며 피곤한 몸을 잠시 기대고 졸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마치
즐거운 혼인잔치 참예의 단꿈을 꾸는듯 하였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연되자 졸고 자며 긴장이 풀어져 있는 한 밤중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라.” 누군가가 소리를 쳤습니다.
처녀들은 졸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 그 순간 혼돈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처녀들의 등불에 기름이 떨어져 연기가 나더니 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 까지 10명의 들러리 처녀들에겐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러리들의 책임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섯 들러리들은 그들의 등불에 여분의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계획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빈 등불에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기름이 없어지자 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단 한가지 책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랑을 마중
나가는데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랑과 무리들이 도착하자마자 예식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미련한 들러리들은 신랑의 행진을 맞이할 불이 없었습니다. 시골 농가 마을의 문화상황에서 이 미련한 들러리들의
행위는 신랑과 신부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식당에 저녁을 초대해 놓고 지불할 돈이 없다고 하는 황당한
경우입니다. 뒤늦게  기름을 구하러 나가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콘서트가 시작되면 극장의 큰 문은 닫힙니다. 누구도 입장이
허용되지않습니다. 결혼행진과 예식과 잔치는 그들의 등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함께 결혼 예식을 기다리다가 그만
참가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들러리의 이야기는 마지막 때의 심각한 상황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주라 고백하여 천국 행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마지막 때의 상황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공의로 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누구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분이 없는 들러리들 사이에 심판의 순간에 구분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열심이 있고 도덕적으로
신실하고 순수해도 마지막 때에 시험에 통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것은 우리들이 진정으로 준비되어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등불에 기름이 채워져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등불의
기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들러리 처럼 치장을 하고 등불을 들었다고 모두 들러리라고 말할 수 없듯이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존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님께 복종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안에 결단성 있게 거하고 그의 빛을 받고 그의 가르침으로 살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존경하며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더욱더 성장하고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믿음으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은 우리들의 더 깊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 성장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복음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그 은총이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준다”(딛 2,11-1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인 이 복음은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성장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자신들을 냉철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받아들인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의고사를 한번 치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양심과 영혼이 그
증인이 될 것입니다.

짧은 기간동안 거룩하게 귀하게 보이기는 쉽지만 우리의 믿음이 오랫동안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삶의 오랜 과정에 의해 드러나게 됨을 오늘 이 비유는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기다림”으로 묘사하고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이 2천년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심은 이미 준비되었고
방심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장 27-28절)

사도 바울은 우리들은 모든 은혜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전 1,7)  이처럼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 들인 사람들은 기다림이 그의
소명이 됩니다. 이 기다림은 무작정 넋 놓고 기다리는 낭비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상관없이 산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만하며 하늘만 바라보는 수동적이 기다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로마 군대에 체포되기 며칠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확신을 시켜 준비된 자로 기다릴 수 있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에 다가올 고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천국 무대는 즐거운 혼인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슬픈 장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수님의 오심은 좋은 소식이지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가까운 친구의 기쁜 재림을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우리들의 마음의 깊은 갈망과 기쁨의 완성입니다.

거짓 들러리들이 쫒겨나고, 인생의 질투와 무자비함들이 사랑에 의해 정복되고, 거짓말과 비난들이 진리 앞에서 밝혀지고, 잔인함과 폭력들이 평화로 정복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망과 한탄과 다툼과 분쟁들을  시시비비로 가려내고 악을 악으로 갚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의롭고 신실하고 선한
세상의 주인으로 나타나 약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그의 나라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임하는 그날을 바라보고 인내하여 악을 선으로
승리하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던 그 날에 우리들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아니면 “저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들이 항변을 합니다. “우리는 주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눅 13, 26)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복 받을 자여 나아오라” 아니면 “저주 받을 자여 나를 떠나라.”

<설교 후 기도>

님,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이시간 주님의 재림의 때를 생각하며 나는 미련한 자인지 슬기로운
자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그 은총이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준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복음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 나 자신의 독한 품성과 세상적인 행실들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구원의 생명의 복음을 우리들의 영혼깊이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주님의 때가
우리들에게 혼인잔치의 기쁨의 자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복 받을 자여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사랑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마음과 교회 봉사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18일)
  • 빌 2:5-11
  • 설교자: 이종실

01/11/18 (삼위일체 후 스물 세번째 주일)

설교본문: 빌립보서 2장 5-11절
설교제목: 봉사와 그리스도의 마음

<공동기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봉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겸손을 간직하여
세상 속에서 주의 영광을 들어내는 교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너
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헤 뛰어난 이름으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교>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 그의 두 손에 빌립보 교우들이 보내온 헌금이 들려있습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헌금을 해서 에바브로디도 인편에 보냈습니다. 편지 속에는 빌립보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와
사랑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더구나 헌금을 보내온 그들의 처지가 편안하고 모든 일들이 잘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더욱 눈물겨웠습니다. 1장 28절과 29절은 빌립보 교우들의 상황을 가늠케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두절의 말씀 속에서 빌립보 교회는 대적자들의 박해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갓 태어난 어린 교회가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는 그 모습이 사도 바울을 감동시켰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2장 17절)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좀
더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 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이 진하게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얼마 전에 비디오로 “친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조직 폭력배들 사이에 일어나는 가슴 찡한 의리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술과 담배를 하는 일탈행위가 그들을 더욱 끈끈한 친구 관계로 형성시켜갑니다.
그들은 학교라는 집단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친구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폭력조직이라는 어두운 세계였습니다. 감옥을 드나들다가 결국 무서운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은 자신들만의 결속력이 있습니다. 마치 자폐증 환자들처럼 외부와 단절하고 자기집단의 만남과 즐거움만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 집단이라면 우리들은 이들을 이단종파라고 합니다.


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이 서로 나누는 심금을 울리는 오늘의 이야기는 그들의 대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마치 이단 사이비 종파
아니면 사회의 암적 존재인 마피아 같은 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조직폭력배의 의리를 다룬 “친구” 영화장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정통 유대주의 종교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세상 권력이 세례요한과 예수를 처형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이미 불법단체 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지금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확신의 근거를  우리들은 오늘 본문 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의 단체와 세상의 모임과 다릅니다.

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구성원들이 다릅니다. 그리고 정말 다른 것은 세상의 단체와 모임이 알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의
활동이 교회에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교회를 세웠기에 그는 고난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의 터를 상실할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세상을 부패 시키는 존재로 변해버립니다. 그런데 사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막기위해 교회를 인간들의 마음의 터 위로 옮겨 놓으려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과 생각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분쟁과 논쟁이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 교회가 다름 아닌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던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자 빌립보 교회가 겁 없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일부가  “바울, 당신이 없어도 우리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이렇게 과시하기 위해서 열심을 냈습니다. 그들
생각에 자신들이 일을 잘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한 기득권 상실을 염려해서 옥중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빌립보서 1장 15-17절의 말씀입니다.       

주를 위해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남을 말씀으로 친절하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돕는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하는 마음,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마음, 결국 자기 실속을 차리기 위한 마음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러한 이기적이고 인간된 마음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권면을 한 것
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 지역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더 효과적인 교회 성장을
위한 방법, 복음전도의 방법과 같은 설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10월 마지막 주 루터의 종교개혁일을 기념하는 개혁주일 예배 같은
프로그램을 제시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거창한 구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관심을 우리들 중심에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과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우리들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말합니다. 

“너
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예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마음처럼
그렇게 하라”고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생각을 그대로 우리들의 마음으로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6절
이하 1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비천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위해 대신 고생하시고 죽으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그분의
사랑 그분의 낮아짐 그분의 겸손을 제대로 우리들이 안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 앞에서도 거만과 교만을 떨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요즈음 제가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다시 붙잡은 말씀입니다.


코 교회들을 분주히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경험을 소개하고 체코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어 선교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직접
간접적으로 돕는 일과  한인교우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과 체코교회를 연구하는 일 세가지를 모두 함께 감당하기 어려워 금년 4월에
연구하는 일을 잠시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으로 교회를 방문하고 목회자를 만나며 협의하던 일들을 가급적 자제하고 대신 총회의
전도부 교육부 선교부(이곳에서는 해외교회협력부) 세 부서의 회의에 참석을 하며 전국 교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년한해 한인교우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들과 저의 체코교회 프로그램을 가급적 일치 시켜 볼 수 있을 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수년동안 정성을 드리며 조금씩 조금씩 교회를 바꾸어가던 쁠젠 오픈 하우스 선교 프로그램을 한인 공동체와 접목시켜
보려던 시도가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체코교회에 의해 좌절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꼬빌리시 교회에서의 목회도 단지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 뿐 아니라 우리들의 기독교인의 삶을 체코교회를 위한 선교자원화 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언제나 체코교회와
한국교회의 큰 차이를 늘 실감하며 그 간격을 메꾸고 접촉 점을 찾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어야 했습니다.


편 선교하는 일로 목회가 태만해서 안 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심방을 하거나 교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앞에서 더 겸손하고, 여러분들을 더 섬기고 더 사랑하려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목회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하는 진실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증인이되신다.” 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다다르기 까지 저는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완성되고 완전한
저의 모습 보다도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늘 노력하는 저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한해동안 제게 허물과 잘못과 부족한
점이 드러난 것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생각하지 말고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그 모습들을 감사히 생각하며 격려와 사랑을 나눕시다.
 


별히 오늘은 두 해 동안 우리 공동체를 위해 궂은 일들을 기꺼이 맡아 수고하신 총무님과 서기님이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분들이
선출되는 날입니다. 비단 두 분만이 아니라 한해동안 수고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반주로, 성경교사로, 회계 보는 일로, 주보
만드는 일, 매주일 교회당 청소와 설거지 그리고 게으름이 피워지는 주말 – 토요일 아니면 주일날 새벽같이 장을 보거나 손수 장만을
하는 한 달에 한번 돌아오는 간식 준비하는 일, 교회관리와 예배 안내를 맡아 수고하는 집사님들의 봉사로 모든 교우들이 금년한해
수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를 우리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을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는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단지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것임을 저와 여러분이 잊지
맙시다. 금년과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기도와 말씀공부와 봉사 이 세가지가 우리 교우들의 습관으로 정착 되었으면 하는 목회자의 바람이
있습니다. 특히 봉사는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며 몸으로 읽는 성경입니다. 봉사는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더 깊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우리는 말씀과 자신을 대면 시키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년에도 조그마한
봉사라도 맡아 주실 것을 당부 드리며 아울러 여러분들의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이 우리 공동체뿐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그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는 오늘 본문의 6절 말씀을 1400년대 체코
종교 개혁파들이 어떻게 이해 하였는지 소개를 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씀을 당시 체코 종교 개혁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부패한 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와 섬김은 우리 자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봉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체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 위에 우리 교회는 든든히 서갈 줄 믿습니다.

<설교 후 기도>

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위에 교회의 터를 세우지 않으면 교회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 처럼 되어 버림을 받게될 것을
압니다. 교회를 교회되게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신 우리
주님의 겸손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겸손이 우리들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으로 간직되길 원합니다. 그 주님의 겸손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의 겸손으로 부패한 교인과 부패한 교회가 되지않도록 저희들을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11일)
  • 왕하 5:9-15a
  • 설교자: 이종실

01/11/11 (삼위일체 후 스물 두 번째 주일)

본문: 열왕기하 5장 9-15절 상반절
제목: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공동기도>

우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번지
작은 일이 주의 은혜를 여는 열쇠이오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본문>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멕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햐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니이다…”

<설교>

오늘 아침 저희들은 엘리사와 나아만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제2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이었고 왕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었고 그의 생각은 곧
왕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눈이요 귀요 입이었습니다. 절대 권력를 가진 사람 나아만이 불치의 병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구약 시대에 문둥병은 질병가운데 가장 두려운것이었습니다. 다른 전염성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그 질병으로 나아만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잃게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나아만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계집 종의 조언에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은 전쟁포로, 그
중에서도 계집아이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과 전쟁 포로인 노예 계집아이 이 둘의 만남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시 중근동 지역을 주름잡던 강대국의 왕의 군대장관에게 전쟁포로 노예 계집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불행한 나아만일 지라도 하찮은 계집아이의 말 하나쯤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불행한 삶에서 행복한 삶에로의 전환점에 이 하찮은 계집아이가 있음을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 다. 

하찮아 보이는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인생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즈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교우님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에 영주하시는 어떤 분이 1989년 체코개방 직후 자신은 체코가 마치 전쟁 후 복구사회처럼 많은 특수가 있어 빨리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체코 사회에서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 대신에 작은
일, 궂은 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둥병에 걸린 나아만은 자신의 노예 계집아이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습니다. 계집 종의 말을 믿고 왕의 허락까지 받은 나아만은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해 떠납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도달하였습니다. 자신의
심복 나아만의 질병을 치유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아람 왕의 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두려워 떱니다. 이스라엘 왕도 두려워 떠는
아람 왕의 친서와 군대장관이 도착했는데도 엘리사는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나아만과 그리고 함께 온 병사들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먼길을 찾아온 환자이자 세계의 권력자를 자기 집 문앞에 세워둔 채 엘리사는 얼굴도 보이지않고 사람을 보내
처방전을 보냅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엘리사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만약에 나아만 대신 그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이 있었다면 우리도 나아만
처럼 매우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좋은 의사란 좋은 처방보다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의
태도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 때문에 나아만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마음으로 모든 자존심을 꺽고 엘리사에게 희망을 걸고 왔습니다. 엘리사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나아만의 속마음을 들여 다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11절 12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이스라엘 왕도 벌벌 떠는 세계의 권력자가 엘리사를 아람으로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직접 찾아나선것은 의사 엘리사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삼아 이스라엘과 아람의 국제관계를
강화하여 양 국가간의 불가침 조약과 포로들의 귀환협상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은 최소한 성전이나 아니면 자신이 거처하는
왕실로 엘리사를 불러 거기에 나아만을 위한 진료실을 만들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말은 없었지만 나아만은 속으로 그 정도
기대했겠지만 그것 마저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엘리사의 오만함 때문에 참았던 화가 폭발했습니다.
나아만은 속마음을 토해냈습니다.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극진히 치료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그만한 예를
보였으니 엘리사가 응당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의 처방에도 불만이 있었습니다. 환자가
의사의 진료와 처방까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욕창이 덧난 곳에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나아만의 속마음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기독
교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가 이땅에 널리 퍼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 마음은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훌륭한 신앙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집사 직이나 장로 직에 발탁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봉투에
적힌 이름이 강단에서 불려지거나 주보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교회 봉사에 공짜가 없습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무언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위치와 영향력을 교회 안에서 세우려고 합니다.

나아만의 겸손 뒤에 감추어진 문둥병을 치유 받는 것 이상의 기대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 뒤에 감추어진 우리들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진심으로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인생의 전환을 기대한다면 바로 신앙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욕심에 찬 우리들의 속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경험이 더 돋보이는 교만과 싸우는 시간입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강물이 더러운
요단강이 될수 있다면, 수질도 더 좋고 풍경도 더 아름다운 자신의 경험 다멕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들이 치유에 더 효험이 있어
보였습니다. 고백은 이러한 자기의 주장을 진심으로 꺽고 예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게 만드는 사탄의 시험에 맞서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분이 난 나아만은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합니다.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납니다.”  혈기는 그 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이 찰나의 시간에 뜻하지 않은 나아만의 종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다시말해
“예언자가 당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했으면 당신은 떠나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았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크
고 중요한일도 한 내가 이 작은 일이야 못할리 없지” 생각한 나아만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냥
돌아가느니 엘리사 선지자가 처방한 대로 해보고 안되면 빌미를 잡아 분풀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으로
내려가서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아만은 영웅입니다. 조그마한일 사소한일 쉬운일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일은 그의 주위에 있는 종들이하는 일입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만 나서서 영웅적으로 해결하던 나아만이었습니다.


회 공동체 안에는 이처럼 영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고 큰 헌신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영웅적인 일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신자들입니다. 이것이 생의 변화의 장애물이 되는것입니다. 나아만의 인생의
문제해결의 전환점은 영웅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소한 조그마한 일이었습니다.

금년 한해동안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목회자가 안내한 일이 영웅적인 헌신과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습니다. 먼저 개인의 신앙성장을 위해
“하루 한 장 성경 읽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두번째로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훈련으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말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하지 않고, 자발적인 봉사생활을 하시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로 집사로
봉사하는 분들은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하나씩 맡았습니다.

영웅적인 헌신과 용기는 마치 우주선을 궤도에 올려놓는
추진연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궤도에 올라가면 이 추진연료는 필요가 없습니다. 늘 똑 같은 궤도를 일상적으로
똑같이 반복해서 돌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충성심이 우주선에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 우주선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똑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유 받기 위해 일곱번을 강물 속에 드나드는 나아만의
목욕과 같습니다. 일곱번은 단지 숫자의 개념만으로 이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7은 완성된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이란
숫자는 인내를 필요로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속으로 들어갑니다.
한번…!! 물 밖으로 나와 물에 젖어 더 선명해진 곪은 상처들이 보입니다. 어떤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이 그대로 있습니다.
나아만이 두번째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립니다. 그래 두고보자 7번 들어갔다 나와도 몸에 병이 낫지않기만 한다면 그대로
두지않을것이다. 혼자 중얼거렸을것입니다.

두번…!! 두번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세번…!! 네번…!! 요단강에 들어갔지만 아직 병의 차도가 없습니다. 그는 더욱 분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멈추어버릴까?”  “미친 예언자의 말을 듣고 나만 우스운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 전에 당장 지금 나가 그 예언자를
끌어내 처단해 버릴까?”  “바보 같은 짓 지금 당장 그만둘까?”  화가 치밀고 이미 물속에 들어간 자신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지위도 체면도 사라져 버리고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자신이 느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칩니다. “그만두자! 이거 다
미친짓이다! 나는 여기서 더 우스운 꼴 당하고 싶지않다. 집에서 치료받겠다.”  그러나 종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예언자가
당신께 일곱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격분한 마음에 물속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이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다섯번…!!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불평을 하며 여섯번째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요단강의 더러운 물 때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일곱번 다 채워주지 만약에 낫지않기만 해봐라 엘리사 내 너를 가차없이 처형할거다.” 아마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곱번…!! 마지막으로 물속에 들어갔던 나아만이 서서히 걸어서 강언덕으로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얼굴은 혈기 돋은
표정으로 붉게 물든채 일그러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하찮은 일, 조그마한 일, 권태가 날만한
일상적인 일, 나를 바보처럼 만드는 일, 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일 그러면서도 반복적으로 해야되는 일들이 오늘 나아만의 인생의
전환점의 표시들입니다. 질병에서 치유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화하는 삶의 키워드가 되고있습니다.

일곱번째 물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그의 팔을 보았습니다. 물집이 사라졌습니다. 물밖으로나와 자신의 다리를 봅니다. 종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봅니다. 그의 종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이 다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깨끗게하심과 거룩하심의 방법을 처음 발견하게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여종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자신의 종을 통해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치유받았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몸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자만심을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혈기를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심을 꺽으셨습니다.
나아만의 인생에 혁명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이방인이 유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15절 이하 에서 나아만의 언어와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오만과 교만이 진심으로 겸손한 품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도 똑같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찮고 사소하고 작은 일에 대한 충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는 영웅적이고 심각한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작은 일 보잘 것 없는 일들을 일상생활처럼 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요단강에 우리자신을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가끔 우리는 생의 문제들을 복잡하게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냥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라는 예언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우리들의 생의 문제는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설교 후 기도>

나님 아버지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금년한해 저희들이 작은 일에 충성된 일꾼들이었는지요?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영웅적인 헌신이 아니라 노예 계집아이처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않고 귀를 기울이고 그 작은 일을
변함없이 꾸준히 하는 그 충성심이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속에서 해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의 교만을 꺽으시고 우리의 혈기를 꺽으시고 우리의 의심을 꺽어주셔서 우리들의 삶의
혁명적인 변화가 있게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