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다윗의 사명

  • 연합 예배 (2001년 11월 04일)
  • 삼상 22:1-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스믈세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일: 삼위일체후 21번째 주일
본문: 사무엘상 22장 1-5절
설교: 이지 슈토렉

<설교본문>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설교>
 도
망자 다윗은 집 없는 사람이 되어 테러리스트들과 게릴라들처럼 동굴에서 지내고 있습니다.사울의 나라에서 군사독재 – 힘센 손과
공포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가족도 베들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둔이 아니었습니다. 도망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위에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
힘없는자, 원통한자, 모든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고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요, 주인이요, 왕이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압 땅 적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위한 그저 그런대로 안전한 망명장소를 찾았습니다.
애굽 땅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말 못하는 아기 예수가 한번 비슷한 망명을 한적이 있습니다. 다윗 왕국은 이미 자신에 대해서
알고있습니다.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윗의 도망은 사명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매우 비슷한 공동체
안에 십자가의 사명이 있습니다. 거기 십자가에서 다윗의 새로운 공동체 – 교회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깊은 곳에서 부활이
승리하고 있습니다.

이 이상스러운 공동체 안에 지금 다윗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 의한 억압과 추격 그리고 한이 맺혀있는 사람들이 다윗의 사람들 – 그의 군대입니다.

기에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빠짐없이 모든사람들이 있습니다. 위협을 받고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다윗
왕국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 특별히 우리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비난을 받게 될것입니다.

만약에 존경할만한 공동체로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있지않으면 동굴에 있는 다윗
소식이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게 빠르게 전달 되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왕국에 모이지 않는 한, 그 진실한 왕은
그러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끄는 것을 멈추지않고 그리고 멈추지않을 것입니다.

이로인하여 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삶을
이해하기 어렵게하고 있고 또 어렵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들이 실천하고 있고 희망하고있는 것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입니다. 억압받는 사람,  부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한이 맺힌 사람을 만난 사람은 그들과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우리들의 본래의 인간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우 즐겁지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교활하고, 교양이 없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매우 피곤하게할 것입니다. 감옥이나 정신병동만이 희망 없는 경우가
아닙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불의와 증오를 우리 스스로 자기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고통이 우리들의 삶의 관점을
깨닫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증오가 우리의 두 민족의 역사와 우리의 영혼의 바닥에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왕을 준비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러나 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표가 되지않고있습니다. 그리고 구호도
걸지않았습니다. „전 세계 프로레타리아들이여 연대하라!“ 그리고 그 구호에 사람들을 끌어들일 어떤 정치적인 정당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따랐고 다윗은 그들의 대장이요, 주인이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죄와 증오와 구원이 불가능성
모두를 담당한 그분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여호와는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십니다.“ (시편 146편)

만약에 여기서
끝나야만 한다면 이것은 단지 종교사회주의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약한자들의 범주에 자신의 시각을 맞춘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만 합니다. – 베들렘과  모든 민족의 기다리는 왕중의 왕과 함께 다시 유대 땅을 찾을때까지, 그리고 그나라가 이루어질 때
까지, 지금 교회안에서 여행길을 잠시 멈추어 휴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여기 교회에 우리들에게  피곤하지 않도록 마련된 식탁이
있습니다.
<아멘>

이때부터… 비로소…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8일)
  • 마 4:12-17
  • 설교자: 이종실

01/10/28(삼위일체후 스무번째 주일)
설교본문: 마태복음 4장 12-17절
설교제목: “이때부터 … 비로소 …”

<공동기도>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빛으로 우리 어두운 모든 것을 비추어주시사
우리들을 진심으로 회개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받은 복음의 빛을 체코교회와 함께
이방의 갈릴리와 같은 체코사회에 비추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리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집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앚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있습니다. 13절 14절 15절 16절을 여행 경로를 빼고 본문을 다시 읽으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마치 때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게 됨을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멀리서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메시야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찾아오고, 들녘의 목동들이 천사의 구세주 탄생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메시야 탄생을 경계한 헤롯이 베들레헴 지역의 갓 태어난 아기들을 무참히 죽이자 주의 천사의 보호로 그 죽음의 터널을 지나 구사일생을 합니다. 장성하여 성인이 되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이미 충분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이룰려고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요즈음 체코 의회에서 국가 예산심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체코의 재단법인에 대한 국가재정 지원심의가 있었습니다. 하벨 대통령 이전 부인이 세운 “올가 재단” 그리고 침례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아드라” 그 외 해외 단체들이 세운 유수한 재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도 짧고 단체 사무실이라야 별도로 없이 우리 꼬빌리시 교회로 공식적인 주소로 되어있고 유급직원도 없이 몇 몇 자원 봉사자들을 조직하여 슈토렉 목사님이 직접 단체를 운영하는 “디보께 후시”가 의회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고 의회가 이 단체의 활동 지원으로 천이백오십만 꼬룬 (미화 약 35만불)을 예산 편성키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 결정이 바로 언론에 알려 지고 여기 저기서 슈토렉 목사님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있다는 이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 아내가 “당신은 언제 슈토렉 목사님 처럼 그렇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제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 이룰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평가 받고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20대 30대는 사랑으로 살고 40대는 돈으로 살고 50대는 명예로 산다”고 하는 세간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를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익혔습니다. 키가 자라고 성장하면서 더욱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지내기를 즐겨하셨고 그리고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단지 자신을 단련하고 준비할 뿐 무엇을 하려고 그리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 비로소 …”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데뷰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모든 사람들이 혹할 만한 메시지를 준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빈자리나 매꾸려는 듯이 요한이 선포하던 똑 같은 설교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1500년대의 종교개혁을 위해 투쟁을 하던 체코 개혁파들은 “사탄이 악으로 신실한 종들을 거두어갔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자신의 약속에 따라 곧 바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준비하셨다.” 라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성장시켜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우리들이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장시켜가십니다. 하나님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고백하는 삶으로 준비된 교회와 신자들을 우리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채우듯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 처럼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어떤 존재인지 질문도 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에 기대어 일하는 일꾼들이 들판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우리들은 체험합니다.

예 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요지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가 너 힘과 능력으로 한번 너의 사명을 감당해보라고 요청을합니다. 너가 메시야라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이고, 저 예루살렘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듯 뛰어내려 천사가 보호해주는 이벤트를 너의 데뷔전에 선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아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 비로소 …” 오늘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이 두 단어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들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증언입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한 국에서는 교회의 삶 과 세상의 삶을 따로 살아도 감출 수 있지만 이 해외에서는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호구지책을 위한 세상의 삶이 곧 신자의 삶이며 교회의 삶이됩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사업과 학업과 인생의 가치관을 성공적으로 성취하기위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존재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회개가 나옵니다.
자 신을 바라보는 눈이 한번 열리면 닫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더욱 더 성장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조그마한 어두움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끝없이 밀려오고 생성되는 자기 자신의 어두움의 근원을 결국 찾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들은 하나님앞에 그리고 사람들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의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단지 대신할 뿐이었습니다.자신의 주장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선포하라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은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듯이 똑같이 한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예수님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 입니다.   

이 제 우리는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는 제일 남쪽에 유대 그리고 북쪽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유대에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 계시다가 세례 요한이 탄압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반대 방향인 북쪽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약 100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북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통은 게네사렛 호수, 또 나중에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와 지중해안 평야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갈릴리에서도 고향동네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호수를 끼고있는 평야지대여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갈릴리 지역에 204개의 부유한 마을과 15개의 요새도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토지가 비옥하고 북방에 위치하다 보니 이웃 강대국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 열왕기하 15장에 언급되어있습니다. 주전 743년 앗수르 임금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를 점령하여 앗수르 제국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가서, 갈릴리 주민들 가운데 유대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시대에 이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헤롯 왕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교적인 헬라 주민층이 다시 늘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역사적 상황으로 갈릴리는 종교적으로 혼합신앙이 매우 성행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였고 경제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착취로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유대 광야를 떠나 북쪽 갈리리로 오신곳 이곳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온갖 신앙이 혼합되어있고, 이교적인 헬라주민과 유대주민들간의 갈등도 많고 과도한 세금착취로 백성의 원성이 높은 온갖 문제들이 놓여있는 인간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세례 요한 처럼 광야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면서 신앙적으로 이미 이방의 땅이 된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방향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이방의 땅 지중해 도시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문화 종교 사상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였고 회개를 요청하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인간의 무질서와 죄악이 득실거리는 땅을 피하지 않고 사기꾼들이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곳에 사창가가 있는 그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저희와 같이 해외에 있는 우리 한인교회 공동체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여행의 방향을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 남아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합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은둔하여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였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당시에 로마 통치자의 앞잡이자 같은 동족을 착취하는 착취자였습니다. 죄인을 대표하는 예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죄인 마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빛은 죄인과 억압과 착취자의 가슴에 까지 비쳐지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만난 자신의 체험을 오늘 본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놓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복음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춰집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간에 물길러 나온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동네 안으로 뛰어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가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만족을 위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여 거듭난 자들을 통해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속에서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설교 후 기도>
오 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을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살펴보면서 오늘 저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해외에서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우리들만의 믿음의 동굴 속에 머무르는 유혹을 이기게 하셔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방의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교회의 기쁨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1일)
  • 눅14:34-15:10
  • 설교자: 이종실

01.10.21(삼위일체후 열아홉번쨰)

설교본문: 누가복음 14장 34 – 15장 10절
설교제목: 교회의 기쁨

<성경>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하시니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잃은 양 비유, 되찾은 드라크마 비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리라.”

<설교>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말
씀을 듣는 자”와 “계명을 지키는 자” 두 사람의 모습이 15장 1절과 2절 단지 두절 속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 대신에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와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또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다 할 지라도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향해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 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를 원망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권면한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악한 동무로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자녀
주위에 나쁜 친구들이 있는 것을 안다면 부모는 늘 마음이 염려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더러워 질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천하고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똑 같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과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들에게 이 율법의 문제는 진리와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나 다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지켜야 되는 것을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기에 그들은 타인에 대해 우월심과 무시함과 원망을 갖게 된 것 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랑과
무시함과 원망이 팽배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몸에 익숙한 신앙의 기준, 교양의 기준, 인간 됨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윽박지릅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심지어 마음의 분노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 교회 안에서 질서가 있지만 해외 한인교회는 한국의 교회들 보다는 조금 더 무질서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누구나 서로 인정하지도 귀담아 들어 주지도 않는 자기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 의로움들이 저마다 교회 공동체를
부수고 망가트리고 퇴색시켜갑니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
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이 질문 합니다. 청중들은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거예요. 그러나
게으른 목자들은 아마 다르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청중들에게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들 중에 하나를 잃으면 손을 털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아직 아홉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여인은 자신의 하루 품삯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어두운 장소에 떨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온 집안 구석 구석 청소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모든 여자들은 머리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거예요.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들이 한번씩은 다 있을 줄 압니다.
무엇을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을 때 이미 우리들은 걸었던 길을 따라 몇 차례씩 돌며 주의 깊게 오른쪽 왼쪽을 살펴봅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걱정이 되어 밤에 잠이 오지않습니다.
 

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아이러니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따르던 아흔 아홉의 양들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던 길 잃은 말썽쟁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목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손안에 들어있던 아홉 드라크마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의
것 하나 때문에 여자는 기뻤습니다. 

이 비유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는 비유는 없습니다. 상실한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그런 거만을 떠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는 인간의 죄를 참으시고 죄로 소외된 자를 찿고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돌아올 집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회는 교회라는 기관의 기준과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들어가고 나가는 집이 아닙니다. 죄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돌아와 거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쁨의 집입니다. 교회는 잃은 것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동시에
죄인들 소외된 자들의 용서와 축제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만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가 기뻐 찬양합니다.


사가 기뻐하는 모습이 누가복음에 또 나옵니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알릴 때였습니다. 기뻐 찬양하며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잃어 버린 생명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은 전우주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단지 기쁨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죄인들에게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잔치에 친구와 이웃이 초대됩니다. 교회의 기쁨은 세상의
흥미거리로 이루어진 이벤트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벤트는 교회의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그 축제를 더 흥겹게 하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와 관련이 없는 교회의
이벤트는 서로 꺼려하고 서로 회피하고 서로 떠넘기는 일거리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잃은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벗과 이웃이 우리들이라면 추운 교회당에서 의미도 모르고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기쁨 보흐니체 정신병원 수요 예배자들을 우리들은 기억했어야 될 것입니다.


제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교회의 체험이자 감사의 노래입니다. 온 천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거룩한 만찬은
감사의 잔치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회개한 죄인들 그리고 찾은 잃어버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들이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 상실한 자들 희망이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존경을 받고 기쁨을 얻어야 됩니다.


코 형제 자매들은 이 일을 지난 주 목요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기쁨을 교회의 공동체가 누리기 위해 알코올중독자, 약물 중독자들
가운데 치료가 끝나고 중독생활 그리고 치유의 오랜 기간에 이미 아내도 가족도 남이 되어 버린 상실한 세상에 돌아와 다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끌라슈떼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체코 교우들 잘 모릅니다. “이 목사, 나는 이 일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줄 믿는다. 함께 배우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해보자.” 슈토렉 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체코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이 돌아올 용서와 받아들임이 있는 하나님의 준비한 집이 우리 교회라고 우리들은 말할 수 있습니까?

“회
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누구도 교회의 기쁨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회개를 요청하는 의인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기쁨을 가져 다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중압적이고 불쾌한 분위기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영접하는 교회 공동체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독자의 위치가 되어 불신과 비난과 자기 자랑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깊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롭지 못할 지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 되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들의 공동체는 누구도 관심 있어
하지 않는 그리고 회피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갈 것입니다. 기쁨의 초청의 자리가 불신과 자기 자랑, 다툼과 분쟁, 업신여김과
해외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감정을 푸는 자리로 느껴질 때 교회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과 증언과 초청은 쓰레기 같이 소모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용서와 받아들임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려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요구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보기에 의로운 것이 없어서 남을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러분들에게 죄책감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죄인을 위해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 죄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옆과 앞
뒤에 불러두신 형제 자매들도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태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주기도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데 뛰어난 분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비유들은 완전히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리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될 것이다: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할 때 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길을
떠나는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양입니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떨어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동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듯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찾은 기쁨에 우리를 어깨에 메고 우리들의 집 이 교회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잔치가 있는 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영혼의 충족감,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용서 그리고 소망을 체험하며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설교 후 기도)

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세리와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 곁에 나아가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죄인이오니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우리들을 주의 전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존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어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이 날마다
더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다윗의 회상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14일)
  • 삼상17:3-40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1년 10월 14일 (삼위일체후 열여덟번째 주일)
<본문> 사무엘상 17, 3-10a.22-26.31.32.37-40
<제목> 다윗의 회상

<설교>

리 나라에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 개혁교도는 작고 카톨릭교도들은 거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전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할 때,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파시즘과 대항하여 우리 민족이 싸울 때 민족이 용기를 갖도록 다윗과 골리앗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공산주의 지배 타도의 희망이
비친1968년 역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자주 회자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직후 많은 목회자들은 우리들이 거대한 쏘비에트
거인을 극복했다는 자의식을 갖게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시  어떤 사람들은 지혜와 기독교 문명의 승리에 대한 비유로서 다윗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테러공격 이후 소위 기독교 문명에 닥친 상황 때문에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주일날 사무엘 상을 한 장 씩 차례대로 계속 읽어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할 차례가 된것입니다.

조그마한
소년이 거인을 거꾸러트린 단순한 내용을 모든이들이 좋아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3절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 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희망이 도박에 있습니다. 한 쪽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거대한 모습과 그의 놀라운 무기는 상상이 안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골리앗의 어록의 종교적인 톤은 신을
비웃음으로 자기를 극도로 자랑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10절 상반절) 선전포고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을 먹고 매우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항하는 사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다윗입니다. 시골
아이 처럼 행동하는 호기심 많은소년입니다. 동화 이야기 속에 시골 아이들이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진지하게 왕의 약속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절반의 왕국과 공주와의 결혼이 다윗에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겠습니까 군사들은 그를 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첩보 활동은 잘되고 있어 왕이 다윗에 대해 알게되고 곧 그를 부릅니다.  다윗은 항상 똑 같이 행동합니다. 꾸밈이 없이 솔직히
말합니다. 사울에게 바로 말합니다 :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것이라.” 32절 말씀입니다. 16살짜리 소년이 왕과 나눈
대화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다윗은 싸움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왕국은 강한 무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34-37절 말씀입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견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울의  무기도 그리고 골리앗의 무기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오늘 본문 5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7장 마지막에 나오는 사울의 질문을 들어보십시다.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55절) 이상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베들레헴을 보여줍니다. 오늘 힘든 시대에 모든 민족에게 왕이 되시는 이
베들레헴 왕을 기억하는 것을 멈추지 맙시다.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기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놀라고
혼란스러운 것을 영원히 멈추도록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의 역사를 되새겨봅시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처럼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조롱받고 두려움에 떠는 하나님의 백성,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골리앗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위기의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을 온천하에 알리는 삶의 자리로 변화시켜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는 이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 연합 예배 (2001년 10월 07일)
  • 벧전 3:15
  • 설교자: 이종실

01년 10월 07일
설교본문: 베드로전서 3장 15절
설교제목: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설교본문>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설교>

늘 본문은 2천년 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지만 오늘날 우리 상황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소수 종파의
체코개혁교회를 만난 이후에야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1세기의 그리스도의 제자들 처럼 자신들이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자를 얻는 한국교회의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저처럼 한국
기독교가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땅에서 복음의 실천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200년 전 복음이 한국에 전해질 당시 한국사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여성, 어린이, 노동자,
농민, 기술자, 그리고 남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정책은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자 병든 자 죄인 창녀들과 어울리신 예수님과 쉽게 동화되었습니다. 서양의 현대식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도 복음의 실천인
사회를 섬기는 일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업홍보를 위해 기독교 병원보다 훨씬 좋은 시설과 의술을 갖춘 병원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양질의 인적자원을 얻기 위해 대학도 세웁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일반 세상 단체들의 사회 봉사를 위한 노력이 교회보다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체코교회 여러분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더구나 사회주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복음의 실천의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는 국가에 의한 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오히려 교회에게
더 많은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소망의 가장 구체적인 선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기독교의
실천은  이미 기독교인들만의 독특한 영역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만의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미 있는 이슈가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기독교의 실천이 타 종교와 인도주의적인 세속적인 행동가들과의 실천과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천으로 우리는 더 이상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할 수 없는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 상황에 대해 체코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은 잘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체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회의 실천과 전도 집회에 의해 교회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신자를 얻는 기독교의 시대가 서서히 끝나 가고 있음을 압니다.

현재 체코 개혁교회 교우들은 새로운 자기 확신과 자립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체코형제 자매들은 자신의 신앙의 생명력, 진실성, 생존은 종교적인 사회적 관습과
가족의 전통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믿음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을 사회주의 시대를 극복 하면서 알았습니다.

지역사
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슈토렉 목사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할 때 그는 언제나 카톨릭 교회와 지역
관청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사회 단체들의 활동 관계를 고려하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는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슈토렉 목사님은  소위 코이노이아로 불려진 친교를 통해 믿음을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그의 생각을 이해했습니다.

친교는 단지 우정이 아니라 예배와 성만찬의 교회론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불리우는 새로운 계약, 삶에 대한 모든 관점의 변경, 다른 태도와 존재양식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실존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증인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혼란스러운 존재들로 살아갑니다.

특히 오늘 이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박해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은 박해를 받은 것은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이러한 정보는 박해를 받던 사람들은 범법자로 수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의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실하고 착실한 삶 대신에 충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열광적인 종말론에 빠지기 쉽고 외부와
교통이 없는 폐쇄된 공동체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사회와 단절이 된 공동체는 섹트입니다. 이것이 1세기 때 흩어진 기독교인들인
소수 무리들에게 편지를 써서 베드로 전서의 저자가 훈계한 이유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민의 한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들 마저도 업신여기는 힘없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재정적으로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약한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특별한 전통을 가진 가족들의 모임 같은 특별한 소수로 여김을 받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병든자 노인
가난한자 죄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일지라도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를 들었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 궁극적인 것을 소망하기에 일시적인 고통과 고난 중에도 소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소망을 보고 찬양한 여인들 한나(삼상2,1-10)와 마리아(눅1,46-55)의 모습이  디아스포라 교회가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사회의 지원이 전혀 없는 디아스포라, 게다가 혼란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이들에게 믿음,
사랑, 친교, 예배와 기도를 언급하지 않고 소망을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소망 없이 존재하는 것은 상실하는 것이고
내적으로 죽는 것이며, 슬픔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자포자기, 파멸에 가장 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인류에게 소망을 줄 어떤 것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적인 관습과 전통에 기대온 우리 교회들이
우리가 희망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소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그 소망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
보여져야 합니다. 복음의 소망 안에 세워진 디아스포라의 교회가 바로 선교의 전선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초대교회로 탄생한 것
처럼 우리 체코와 한국의 형제 자매들이 복음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로 탄생하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 10장 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