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9)

2013년 5월 9일 오늘의 말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예레미야 32장 3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장 7절)
묵상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출입하면서 자신들을 성찰하지 못하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눈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 댓가로 예레미야는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출입하면서 자기신앙에 도취되어 자기성찰을 하지못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교회지도자들과 그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프라하의 거대한 아름다운 교회당들은
중세시대때 찬란한 교회의 성장과 그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안에 모였던 수 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교인들에 의해 세상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유대 백성들이 절대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실로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성전만 파괴된것이 아니라 민족자체가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들이 되고 
찬란한 유대 역사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만 망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길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사상들과 자본주의 가치관들을 
주인으로 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하나님 믿으며 자기성찰이 없는 자기도취의 신앙생활을 경계해야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법지키지않고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뱃속을 채우면서
국가 고위공직 크리스천들이 국가조찬기도회를 가지면 무얼합니까?
자신의 조직을 확대하면서 천문학적인 헌금을 사용하는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상과 나누는 일은 인색한 교회들의 성장을 위한 노력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나의 재능과 시간과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하는 성도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에 복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후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의 뜻을 기억나게하며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 각자의 심령안에 
임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영으로 임재하십니다.
당신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늘도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자신을 주님께 드려라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라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십자가 은혜로
매일 모든 순간마다 
죄의 올무에서 저를 해방시킵니다.
나를 파멸로 이끄는 죄는 
대기의 공기처럼 나와 호흡하지만
당신의 십자가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습니다.
이 은혜안에서
오직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당신의 음성을 따라
당신의 다스림을 받겠습니다.
이 길이
당신을 경외하는 길이며
저와 저의 후손에게 복된 길임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녀로부터 사랑을 받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8)

2013년 5월 8일 오늘의 말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사야 1장 3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에베소서 5장 17절)
묵상
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은 자기 주인을 알아보는데
우리 인간은 왜 자기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고, 하나님으로 부터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말해
오늘날 기독교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주인으로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한번 묵상해 보시기바랍니다.
기도와 찬양가운데 고백하겠지요.
그리고 삶으로는 어떻게 고백을 하고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깨닫고있지 못한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기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늘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즉 모든 것에 감사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고, 형제가 있고, 부모가 계시니 감사
인생의 고통이 있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부르게되니 감사
거짓과 억압의 희망없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희망을 발견하게 하신것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7)

2013년 5월 7일 오늘의 말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장 8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묵상
어린아기의 성장을 지켜보면 참으로 신비합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성장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도 신비합니다.
그러나 어린아기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엄마의 젖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엄마의 젖을 떼면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먹는 음식의 때에 따라 어린아기의 성장도 확연히 달라집니다.
조금씩 거친 음식을 먹을때가 되면 두발로 서서 걷기시작합니다.
어린아기는 음식만이 아니라 사랑을 받기때문에  
어린아기의 성장은 신체발달만이 아니라 인식능력도 함께 성장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점점 이타적인 삶으로 성장해 갑니다.
성도의 거듭남과 성장과정은 어린아이의 발달과정과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났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은 믿음의 출발뿐 아니라 믿음의 발달과정도 포함합니다.
모든 생명은 성장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평생을 예수를 믿어도 성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자기를 비우고 예수의 마음을 채우는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은 입술로 “주여 주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누워 감이 절로 떨어지길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나의 본성을 스스로 쳐 하나님의 뜻에 순종시키는
엄청난 자기싸움의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자기싸움의 과정을 스스로 혼자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음으로서 영적 에너지를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를 쳐 복종시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되 머리로만 아는 것은 믿음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자기싸움의 에너지로 바꾸지 못한다면 
결국 천국문을 가로막고 나도 들어가지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범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형통한 자가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함으로써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자가 되느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인생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할 수 없음을 아시면서
당신의 말씀인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합니다.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율법을 우리의 멍에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의 무능과 죄악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우리가 자신의 본성의 죄악됨을 깨닫게되면
당신의 말씀이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하는 길이 됨을
우리는 경험하게됩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맡은 사명 감당할 수 있는 힘주셔서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6)

2013년 5월 6일 오늘의 말씀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출애굽기 23장 8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장 11-12절)
묵상
14세기 15세기에 종교(기독교)의 타락이 극에 달했을때
종교 권력은 기독교의 거룩성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성전매매 행위 등입니다.
뇌물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행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 뜰에서 장사행위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장거리 순례객들이 지키기 어렵도록 까다로운 유월절 규례들을 만들어놓고
환전장사, 제물판매와 같은 종교권력이 개입된 장사행위가 성전뜰에서 일상화되었습니다.
종교 권력을 팔아 돈을 버는 행위가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돈과 힘없는 성도들이 안수를 받는 직분에 임명되기가 쉽지않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 가운데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권위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성직자들이 다반사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세상지위나 헌금으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질려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행위입니다.
뇌물은 눈을 어둡게 만들어 모든 것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햇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면 눈이 밝아 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두워지듯이
뇌물은 그렇게 우리의 영적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기독교인들의 뇌물은 종교의 타락이자 다른 어떤것 보다도 사회를 망하게하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마치 잘 읽은 과일같아서 맛도 좋지만 그만큼 상하기도 쉽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전하였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토대 위에서 권면을 하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회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성찰하고 고민해야될지를 깨우쳐 주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을 닮기 원합니다.
인간의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않으신
당신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가난하시어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좋아하신 당신의 긍휼을 닮기 원합니다.
부정한 권력에 굽신하지 않고
힘없는 자들에게 한없이 낮아지신
당신의 겸손을 닮기 원합니다.
목숨까지 버리시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신
당신의 그 용기를 닮기 원합니다.
당신의 이 모든 삶의 모습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에게 순종한 삶의 
결과이기에, 당신의 그 순종을 닮기 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제 연합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니 감사
수고한 모든 마음들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92013.05.04)

2013년 5월 4일 오늘의 말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138편 8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
(누가복음 9장 46-48절)
묵상
제자들의 논쟁에 예수님이 끼어들어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말은 “마음의 생각 (마음의 변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대화에 끼어드신 것은 단순한 말때문이 아니라
말이 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생각”을 감추고 명분을 찾아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말을 하더라도 
컨텍스트 안에서 보면 그 명분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포장하는 거짓임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생각을 바르게 하기위해 늘 자기성찰을
해야합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크신 하나님이 작은 것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정신이기도 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성심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작은 것은 대부분 귀찮고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누구도 주목하지 못하는
미천한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당신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않았던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어른들의 세상에 도움이 되지않는
어린아이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걸인과 불치의 병자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벗이 되신것이 아니라
당신은 그들 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공과 성취, 명예와 부귀를 꿈꾸는 내 마음은
당신과 당신의 사람과 당신의 작은 일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 새벽
저는 당신의 눈과 귀를 갖고싶습니다.
당신과 같이 되고싶습니다.
아멘
알림니다.
내일은 꼬빌리시의 다민족들이 함께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오월 첫째주 예배는 예배후 바베큐 파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패트병으로 재미있는 공동작업을 함께하고
파티이후에 다민족 성도들이 함께 어울리는 댄스 파티가 있습니다.
바베큐 준비를 해주신 성도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 9시 30분에 봄맞이 교회 대청소가 있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내일 예배는 9시 30분입니다. 늦지않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