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1)

2013년 3월 21일 오늘의 말씀

너희는 거두어들인 곡식이 너무 많아서
포도를 딸 무렵에 가서야 타작을 겨우 끝낼 것이며
포도가 너무 많이 달려서
씨앗을 뿌릴 때가 되어야 포도 따는 일을 겨우 끝낼 것이다.
너희는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서 안전하게 살 것이다.
(레위기 26장 5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누가복음 9장 6-7절)
묵상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서 가나안 정복 출정을 앞둔
광야 세대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수동적 믿음이라면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은 능동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약속”을 믿고 결정하면 우리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오병이어”는 약속을 믿은 사람의 결정(실천)입니다.
그 결정을 우리 주님은 축복하셨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능동적인 신앙이 광야같은 이 해외생활에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기도
주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당신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약속 많은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넘실거리는 물이 넘치는 
홍해와 요단강에 발을 딛겠습니다.
메마른 광야길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병이어의 도시락처럼
내 가진것 비록 보잘것 없지만
내어놓겠습니다.
내 믿음이 당신을 증거할 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실하게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0)

2013년 3월 20일 오늘의 말씀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희에게 
속살거리며 중얼거리는 신접한 무당에게
물어 보라고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에게 묻는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산 자의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고 
죽은 자에게 물어 보아야 하느냐고 말하여라.
(이사야 8장 19절, 표준새번역)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고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리라
(골로새서 2장 15절)
묵상
이제 체코의 한국 이민역사가 20년이 넘었고 
이전보다 체코에 체류하는 한국분들이 많아서 
20년전에 볼만한 체코어 사전 한권 구하는 정보 조차없던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를 얻기가 수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코에 처음 정착할때 
정보 부족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언어때문에 리소스에서 직접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자들로 부터 얻는 2차 3차 정보여서 정보의 진위파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2차 3차의 많은 정보를 얻어 서로 비교검토하여 
자신의 정보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코 정착과정의 삶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반평생 인생을 뒤돌아 보면 
인생은 갈팡질팡 좌충우돌하며 자기 길을 걷습니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지식발전 토대로 
인생의 모든 삶의 방향이 제시됩니다만
지난 반평생 사이에 바뀐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정치 사회 경제 상황에 따라 인생의 가치관은 물론
삶의 환경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의 길에서 우리가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현혹되게 걸어가지않기 위해
우리는 인생의 2차 3차 정보가 아닌
정보의 리소스를 직접 접하고 판단함으로써
남은 우리의 인생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원천 정보입니다.     
기도
주님,
오늘도 저는 본능의 미로에서 헤메며
저의 인생의 길을 찾고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짐승같은
가련한 존재로 변해가는 줄 모르고있습니다.
자기 본능의 동굴에 갇혀
자기세계안에서 자기확신을 가지고
자기 열심으로 
성공과 명예의 길인 줄 알고 
“다메섹”으로 뛰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만나면
우습고 허무한 길을 쫒아가는
광대같은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됩니다.
당신이
나의 인생의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됩니다.
오늘도 매순간
당신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늘 고백하며 내 인생의 길을 찾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슈토렉 목사님 10주년 추모글을 정리하게 하시니 감사
내 인생에서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게 하신것 감사
슈토렉은 떠났지만 그의 선교적 비전이 남아있음을 감사
모든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 
한국출장, 신혼여행 다녀오신 교우들의 소식을 듣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9)

2013년 3월 19일 오늘의 말씀

또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너희가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다.
(신명기 1장 31절,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
묵상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의 의미로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 에서 
요단강만 건너면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보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모세의 설교를 듣습니다.
약속의 땅 그곳은 아무도 살지않는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고도의 문명이 발달된 민족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세워논 난공불락의 성들이 곳곳에 놓여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정탐꾼들이 그들에 비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했겠습니까?
미래는 장미빛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닥쳐오는 시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더욱더 “두려움”입니다.
우리들의 미래의 시간은 명약관화하게 약육강식의 비참한 결론입니다.
모든 국가와 조직과 그 구성원들 각자는 저마다 생존하고 
나아가 서로 이기기 위해서 각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약자에게는 절망적인 약육강식의 세상 질서 안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그 질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인간 사회의 양육강식의 경쟁의 모든 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인간의 죄 (3월 17일 주일 설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요 3:16)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습니다 (요일 4:18) 
즉,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약육강식의 세상의 질서를 사랑의 질서로 변화시킵니다.
인류 역사이래로 절망에 빠진 세상이 소망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에
오늘날 아직 세상과 교회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믿음의 나이테로 만들어갈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사랑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당신의 사랑을 세상의 질서로 삼아야될
“정의”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사랑안에서
인간들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도 의미가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모든 대립되는 주장과 주의들의 대립과 분열은
참된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사랑이신 당신의 사랑 안에 
나의 삶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있음을 감사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깨닫게 하심을 감사
사랑의 사람으로 온전히 거듭나는 믿음의 목표를 주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8)

2013년 3월 18일 오늘의 말씀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
알게해 주십시요.
(시편 39편 4절, 표준새번역)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 표준새번역)
묵상
오늘 시인의 기도는 
오지랍 넓은 사람처럼 알고싶은게 많아서,
권태로운 인생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닐것입니다.
짧은 인생,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실한 과실처럼 만족하게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일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 분수와 염치를 아는 인생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김연아 선수의 국제대회우승 소식을 듣고
갈라쇼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위해 밤늦게까지 TV앞에 앉았습니다.
22살의 그녀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나 자신이 이룬 업적을 무너트리는 삶을 살고싶지않다”는 말입니다.
22살의 어린나이에 비해 너무나 어른스러운 생각이어서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자기분수와 염치를 모르고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욕망만 가득차게
살아가다가 욕을 당하는 기성세대들, 사회 지도층들을 
시문지상에서 매일같이 보고있습니다.
공직자가 되려면 삶의 과정이 공직자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려면 삶의 과정이 성직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나 명예를 탐하는 삶을 살았거나,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직자와 성직자가 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분수와 염치를 모르는 욕망을 
꿈과 비전으로 포장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이 너무나도 필요한 우리 사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포장된 욕망을
반성할 수 있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분수와 염치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른 비전은 이 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하늘에 대한 것이어야합니다.
이와같은 자기성찰의 기준을 오늘 본문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한 과실처럼 충족감을 갖는 우리의 인생이 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부단한 자기성찰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과 내 마음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마음의 욕망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욕망인줄 알면서도
욕망의 힘에 이끌려 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않고
내가 원치않는 것을 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모습을 
늘 성찰하고 회개하며 
당신의 용서의 은총을 덧입으며
당신이 친히 보여주신 
이 땅의 삶의 모습을 묵상하며
푯대로 삼고 
그 길로 달려가도록 
매일 씨름하는 삶을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 감사   
기쁨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계시니 감사
건강하게 치료를 잘 받고계신다는 성도의 소식을 들으니 감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잃지않게하시니 감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생기니 감사
새로운 한주간을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시험 준비를 하는 성도들을 성령께서 도와주실줄 믿으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5)

2103년 3월 15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시편 130편 3절, 공동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 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표준새번역)
묵상
현대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이 복잡해진 만큼 
윤리와 도덕의 해석도 그만큼 발전되었습니다.
그것을 달리 설명하면 현대사회는 복잡해졌고 
현대인들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소위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중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죄와 희생을 요구하는 이야기보다 
위로와 평안과 행복과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바로 이 유혹에서 부터 교회의 영적기반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죄”에 대한 이해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로서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9)
욥기를 보시면 욥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조금도 자신의 의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두고 그는 친구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일반적인 생각은 인생의 불행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사고방식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아무리 성찰해보아도 
자신은 하나님앞에서 조금도 불의가 없었기에 
친구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며 불행을 주신것도 하나님이시니
그 불행조차 감사히 받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해서 조금도 흠이 없었던 욥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깊이와 질이 달라지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됩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재위에서 회개합니다”
욥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존재 깊이에서 하나님을 만날때 깨달아지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단순한 “행위”나 “의식”의 반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지는 나의 모습이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만큼 죄를 알게되고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됩니다.
기도
주님,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다달랐습니다.
한주가 더 지나가면 고난주간을 맞이하게됩니다.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찾아다니시고
죄인을 만나시고
죄인과 교제하신것은
죄인을 부르기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
진솔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면
죄인을 부르러오신 당신이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 생각, 내가 하고싶은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이 내 죄를 용서해 주는 
능력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