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4)

2013년 3월 14일 오늘의 말씀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2편 1절)

그리고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 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골로새서 3장 17절, 표준새번역)
묵상
어제 선출된 새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카톨릭교회 역사상 유럽대륙 밖 출신  첫 교황이며
무엇보다 첫 예수회(제수이트) 출신 교황이라는 점은
앞으로 카톨릭교회가 1968년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시 교회 개혁의 기대를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로 부터 출교를 당한 사제이자 학자인 한스 큉 교수는
카톨릭 교회는 교황을, 개신교회는 성경을 우상화 시킨다고
비판을 한적이 있습니다.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는 복음을 
교회의 전통안에 가두는 잘못을 저지르게되고
자기성찰과 실천이 없는 “오직 말씀”의 강조는 
말씀을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게된다는 지적일 것입니다.
중세시대때 부패한 제도 교회에 대항한 
체코 종교개혁교도들은 
골로새서 이 말씀을 매우 신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거부하고
말을 하던지 일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예수 즉 복음의 이름으로 하고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신실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척도입니다.
비주얼한 카톨릭교회의 제도와 예배예식도
감정과 감성의 눈을 열게하는 개신교회의 설교와 예배도
자기성찰과 실천의 “영적 신실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골로새서의 “영적 신실함”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접속시키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기도
주님,
저의 삶의 뿌리가 
이 세상에 너무 깊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당신 안에서 힘을 얻는 경험을 
기억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 안에서
당신께 감사로
당신앞에서 “영적 신실함”을 유지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3)

2013년 3월 13일 오늘의 말씀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편 13-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장 15절)
묵상
오늘날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않고
위대한 여호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소비적으로 교회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다른 어느나라 교회들 보다도 
개교회주의의 특성이 강합니다.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지역별로 배치된
교구중심의 교회입니다.
목회자들의 봉급도 교단의 호봉대로 지급됩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는 개교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교회간의 경쟁이 필연적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는
왜곡되기 싶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의 경험이 잘 공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아무리 파괴되어도 가정은 가정이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오늘날 교회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집”을 “좋은 땅”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처음 경험한 복음의 구원의 은혜의 때를 
회상할 수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좋은 땅”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체코 종교개혁자이며 형제단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얀 아모스 꼬멘스끼라는 분이 계십니다.
일반 학문에서는 중세시대 교육학자 꼬메니우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학제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인생의 첫 5년에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첫 5년을 “좋은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맹모 삼천지교”를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인생의 축복된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은 잘 익은 포도와 같이 성숙해집니다.
노년이 될때까지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맛보며 살게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여호와의 집”보다 더 안전하고, 더 좋은 땅이 
어디에 있습니까?
특히 해외 이민자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정말 솔직히 대답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들과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정말 바른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교회 만이 인생의 좋은 열매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를 포함하여 
사무엘, 시므온과 안나, 그리고 예수님
그 외에도 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여호와의 집”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모든 가치관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좋은 땅”을 찾아 그 안에서 머무르며
뿌리내리며 열매맺는 영적안목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모든 선과 은혜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좋은 땅입니다.
당신을 떠나 
나는 성숙할 수 없고
나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당신을 배우고 가르치고
당신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우리가 교회 입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경험한
그런 교회를 
우리도 경험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감사
오직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복음의 음성만을 듣는 교회되게하실줄 믿으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2)

2013년 3월 12일 오늘의 말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편 1절)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 났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 공동번역)
묵상
“죄를 감추고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 법은 죄를 범한후 죄를 감추고 없애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자수하여 죄를 지은만큼 형벌을 받아야
죄가 없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신학적인 설명으로 원죄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잘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로마서 7장 18-20, 공동번역)
아마도 자기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 고민이 바로 자신의 경험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깊게 성찰하신 분입니다.
자기 안에서 죄 때문에 자기분열이 너무심하여
아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4절에서 탄식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죄를 말할때 바로 이 죄와 죄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는 이 죄를 가리우고 없애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죄가 없는 사람 또는 죄를 짓지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내면의 자기분열이 없는 척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미 이 죄의 실체를 들추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성찰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이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유창한 기도와 열심있는 섬김과 순종없는 화려한 성경지식의 커튼으로
자기분열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추면 감출수록 우리 내면의 자기분열은 더욱 더 심화될 뿐입니다.
결국 이상한 모습의 신자가 되고맙니다.
오늘 본문 32편 3절에서 시편기자는 
자신도 그런 사람가운데 하나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32편 5절에서 시편기자는 또 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자기분열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죄”인 것을 깊이 깨달으면
신기하게도 죄 사함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을 깨닫고 인정하게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 
새롭운 깨달음으로 다가오게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신비가 시작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신비에 내 삶이 황홀해집니다.
그동안 계속 살아왔던 세상이 그때부터 전혀 다른 세계로 다가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던 내 의식의 세계와 눈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믿음의 눈과 믿음의 세계안에서 살게됩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하며 그 약속의 실현을 보고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오늘 시편기자는 이야기 합니다.
기도
주님,
행복은 제가 정결해지는 것에 비례합니다.
난관은 많고 내 안의 죄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오니
저로 하여금 깊은 자기성찰이 있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MRI 촬영하듯 비추어주시옵소서
내 죄를 깨닫게하시고
내 자아를 부인하게 하옵소서.
내 안의 내 죄가
가장 큰 나의 원수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1)

2013년 3월 11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편 69편 14절)

기도를 계속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골로새서 4장 2절)
묵상
오늘 시편 기자의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를 반기시는 때”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나를 반기지 않을실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시편기자는 그렇게 느낄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7절에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시편 13편 1절에서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절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짙은 먹구름위로 언제나 찬란한 태양은 빛나고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얼굴을 언제나 우리에게로 향하고 계시지만
우리들의 교만 이기심 시기심 질투 욕망 과 같은
연약함과 허물이 먹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예언을 하였습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누가복음 4장 1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 주님의 말씀과 삶과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고 있는
나의 어둠을 거두어내는 과정입니다.
참된 신앙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어제 류광현 전도사님의 설교처럼
기도를 한다는 것은 참된 신앙으로 도약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지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과정입니다.
“당장의 유익을 좇아 나를 더럽히지 않는” 과정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 (독방에서 드린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
빈방에 홀로 앉으니
고독이 밀려오네.
성삼위 함께 거하시니
모두 함께 네 식구가 되었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은 손님들이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
하나님을 알기원하 마음들을 교회로 보내시니 감사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9)

2013년 3월 9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편 7절)

(여호와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6절)
묵상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은
정의가 없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사회는 인간의 역사이래로 지속되어왔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를 보며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받은 환대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온 아들에게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분노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눈에
인생을 방탕하게 살아가는 죄인과 세리와 친구하고 먹고 마시며
당시 죄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죄인인 병자들을
환영하고 그 질병들을 고쳐주는 예수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열번을 참고 한 번 매를 듭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매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고 인생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도
그 마음의 동기를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동기를 따라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로 마지막 심판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오는 모든 한계와 허물의 장벽을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친히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모든 악에서 이기게 합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십니다.
이것을 성경 민수기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민 6:25) 설명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사 53:11)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롭게되는 길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내용의 발전이 없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여 잘못을 고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오직 예수의 사랑의 삶을 내 존재의 DNA로 만드는 씨름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악인들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불의의 뻔뻔스러움을 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당신을 생각합니다.
억울함
분노
끓어오르는 복수심
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시고 은혜베푸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죄악을 이기신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내 마음이 
붙잡을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룩한 주의 날을 주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니 감사
하나님의 전을 사모할 성도들을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