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2)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69. 20040703
땅끝까지이르러/ (20) 배수의 진을 치고 <체코 편(2)>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나뉘어진 1993년에 필자는 체코 프라하에 입국했다.

 당시 체코는 1989년 혁명이후 10년 만에 전체인구의 절반쯤 되던 기독교 인구가 30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그 중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합해서 8~10퍼센트가 실제로 종교활동을 하는 인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인구 70퍼센트 이상이 ‘나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곳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동기가 나 자신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확인하려는 하나님과의 배수의 진을 친 씨름을 시작했다.
 
우선 생계의 문제로 하나님과 대면했다. 이 문제는 선교사 파송을 나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기다리기로 한 나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파송의 때를 기도와 함께 선교현장 연구를 하면서 기다렸다. 선교를 하겠다고 하면서 총회 파송을 받지않고 더구나 프라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하니 주위의 도움은 물론이거니와 이해를 받기도 어려웠다.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기는 부족했다. 생계의 위기가 지속되면 해외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씨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파송에 대해 점점 확신이 생기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적응의 문제로 하나님과 대면했다. 가족이 적응하지 못하면 해외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현지 적응은 선교의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하여 달리 타협의 길을 스스로 두지않았다. 16년간 중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아내가 체코선교를 위해 사직을 하였고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친 아들은 체코국민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현재 아들은 프라하 체코국립대학의 정치학도가 되었고, 하나님은 아내에게 프라하 체코국립대학 철학부 한국학과에서 계속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구했던 응답은 구체적으로 해야 될 나의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었다. 성급하게 나의 계획을 추진하려고 하지않았다. 아예 머리 속에서 나의 계획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체코인이든 체코에 사는 한국인이든 그리고 그 누구이든 절대로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로 생각하고 사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선교현장을 끊임없이 공부했다.

 뒤 돌아 보면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씨름은 그 순간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손을 붙잡고 체코로 인도하는 과정들이었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1)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66. 20040612
땅끝까지이르러/ (19)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체코 편(1)>

선교단체에서 또는 다른 기회로 선교의 소명을 발견하고 헌신하는 복음 전파자들과는 사뭇 다른 선교의 여정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셨다.

 1988년 1월 총회 전도부 국제선교위원회부터 세계선교부가 신설된 지 2년 만에 총무를 모시게 된 그 때까지 만 4년이 넘게 우리교단 해외 선교사들을 돕는 행정간사로 일하면서 이해하게 된 선교의 경험들이 현재 나를 선교사로 일하게 하였고 그리고 나의 선교여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 선교사들의 현장감 넘치는 선교 보고서를 읽으면서 비록 임기 내내 한번도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선교 현장들이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고, 다양한 선교 프로젝트들의 형성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 어떻게 선교프로젝트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선교 보고서들을 면밀히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으면서 선교사님들의 선교 프로젝트는 어느 하나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단순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실패의 과정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이것은 또한 선교사의 현지 적응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행정을 통하여 후원하는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가장 근본적인 선교의 동기가 무엇이며 선교의 과정이 그 동기에 어떻게 충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선교의 과정이 선교의 동기와 달라지고 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진단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총회의 경험들은 내게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제를 새롭게 깨우쳐 주었고 그리고 이 명제의 바른 실천으로 하나님은 나를 부르고 계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선교가 기관으로서의 교회들과 인간들의 욕망의 수단이 되지않고 하나님의 일로서 그 순수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서구의 선교도 ‘제국주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왕국’의 신앙의 가치관과의 혼돈의 역사였다.

 선교를 하는 나 자신도 언제나 선교의 대상임을 잊지않고 선교를 임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총회의 만 4년간의 봉사를 되돌아보면서 선교에 대해 무지했을 뿐 아니라 잘못된 선교에 대해 전혀 자책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나는 새 창조와 새 피조물의 희망을 기다려야 하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기도와 더불어 파송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확인하지 않고는 내게 선교사로서의 미래가 없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살며 생각하며] 체코 한국어 사전을 손에 들던 날

체코 한국어 사전을 손에 들던 날


체코 한국어 사전을 손에 들던 그 날 나는 흥분하였다.

체코 한국어 사전편찬은 2004년을 체코한인이주의 역사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문자의 사용이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분기점이 되듯이 체코어 한국어 사전의 편찬은 체코한인이주의 새 역사, 새 시대를 가져올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 페이지의 글을 읽기 위해 수없이 체코 영어 사전을 찾고 다시 영어 한국어 사전을 찾으며 앞뒤 단어를 이리 저리 꿰어 맞추어 암호 해독하듯 읽던 시대를 마감하였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것도 힘든데 그것을 또 다른 나라 말로 배워야 하는 것은 이중 삼중의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고역을 견디며 좌절감, 모멸감을 한 번이라도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존경할 일이다. 체코의 한국인들이 두고 두고 기념할 일이다. 사전 머리말에 저자는 이 사전을 “12년 동안 끊임없이 준비하였다”고 밝혔다. 12년의 세월동안 그녀는 아기를 낳아 기르며 또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이 사전을 만들었다. 이 사전은 단지 사전의 의미를 넘어 우리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체코의 이민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12년간의 노고는 무엇인가 빨리 이루어보려는 우리의 조급성을 타이른다. 아는 것 만큼 보게 되고 일하게 된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결과가 사전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문화와 언어와 사회적 관습이 전혀 다른 체코에서 이주하는 우리 한국인 모두가 깊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조급히 무엇인가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 바늘 허리에 실을 매는 어리석은 시도는 자신을 힘들게 할 뿐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한인사회를 더욱 어지럽히고 고통스럽게 한다.

 사전 편찬을 준비하는 12년의 세월동안 수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을 많은 고초와 난관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때 건강도 잃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속한 체코의 한인사회에서 사전편찬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다. 체코어를 배우려는 한국인들을 위하여 한국어를 배우려는 체코인들을 위하여 더 나아가 “상호 정확한 의사소통이 양 국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방면에 걸친 공식 비공식의 교류와 왕래를 더 긴밀하게 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어떠한 고초와 난관도 극복하고 결국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다. 우리 체코의 한인사회가 이처럼 자신의 본분과 사명감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 이토록 자신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 대한 사회의식과 사명감 더 나아가 철저한 애국 애족의 정신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야 우리는 서로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를 그치고 서로 행복을 가꾸며 살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 말미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아직도 미진한 점과 오류가 많다”고 고백하면서 “선후배 여러분들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지도와 편달”을 부탁하였다. 시작은 하였지만 선배와 후배 그리고 독자들에게 사전의 완성은 함께 이루어가자는 겸양의 미덕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감추고 연약한 것 같지만 강함이 그녀와 많지않은 만남에서 늘 느껴졌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나 그 길을 차지하지 않고 밝은 빛을 발하나 스스로 빛남이 없는 흠모할만한 인생을 추구해가는 그녀에게 우리 모두가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사전편찬을 계기로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에게 크게 유익을 주는 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고싶다. 그래서 그녀와 프라하 하늘을 같이 공유하고 있어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프라하 꼬빌릿 한인교회)
(Česko-korejský slovník 체코-한국어 사전, 저자 박미영,  출판 Olomoc 2004년, 780쪽)
나눔터 9호(36호) 2004년 10월호 살며생각하며

성령이 세우는 교회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25일)
  • 행19:8-34
  • 설교자: 이종실

040725

본문: 사도행전 19:8-34 

제목: 성령이 세우는 교회

<본문>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3)시험적으로 2)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설교>

체코를 포함하고 있는 슬라브 문화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주후 800년대 부터 그리스 정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고 그들에 의해 문자가 만들어 지면서 같은 계통의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슬라브 문화권은 현재 정교회, 로마 카톨릭, 이슬람이 각각 특정한 나라에서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체코는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강한 사회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슬라브 문화권에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외국 선교사님들과 한국선교사님들이 많이 들어가 활동을 하고 있고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들도 생겨나지만 그렇지 못한 부정적인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님들이 비자문제로 가끔 프라하를 찾습니다.

그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선교상황을 접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구 소련 연방 국가들의 선교의 당면과제는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체코는 슬라브 문화권 선교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1994년에 쭈리히의 국제침례신학부가 프라하로 이전한 것이 바로 새롭게 생겨난 동유럽 교회들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였습니다.

체코가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이슬람의 나라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이면서 매우 강한 개신교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있어 슬라브 문화권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교회들의 지도자를 교육하고 지원하는 일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순절 운동으로 생겨난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전통도 생겨나고 심지어 잘못된 길로 갈 때 그
교회를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새롭게 개혁하는 개신교회로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 체코 개신교 전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체코 프라하 개혁교회 신학부는 구약과 신약을 연구하는 분야가 발전이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공부를 학생들이 흥미 있어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한 적이 있는 뻬뜨르 뽀꼬르니 교수님은 신약신학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로마 카톨릭 바티칸 교황청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 분의 책은 신약신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반듯이 읽어야 하는 교과서입니다.

체코에서 성서신학이 발달된 것은 자신들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개신교 전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코의 상황은 앞으로 슬라브 문화권에서 새롭게 생겨난 교회들을 건강하게 돕는 좋은 역할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체코교회는 슬라브 문화권을 향해 자신들이 나누어야 할 신앙의 경험과 유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체코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선교 비전으로 바라 보고 있지 못합니다.

재정은 스웨덴 교회에서 감당하고 인적자원은 체코교회에서 발굴하여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에 교수로 파송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지만 결국 비전을 나눌 사람을 체코교회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 일을 추진하면서 체코교회로 불러 함께 모이게 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기대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의 관점에서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체코교회가 바뀌면 슬라브 문화권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체코교회 안에서 체코교회에 영향을 주며 체코교회를 바꾸어가려는 우리들의 존재의미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존재의미(사명)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음을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분명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고 없애겠다고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세워지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교회로 모이는 사람의 뜻과 경험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성령이 일하실 자리가 없어지고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모임으로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만들어놓은 청사진을 따라 세워져 갑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세우려고 하면 그 계획을 성령께서 가로 막습니다.

처음에 사도 바울이 선교를 계획했을 때 그의 아시아 선교계획은 막히고 그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차선교여행때는 에베소에 들리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체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3차선교여행에서 처음부터 에베소를 목적으로 갔습니다.

이차선교여행때처럼 지나가는 길에 잠시 경유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 9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고전 16:7-9)

바울이 에베소에 어느정도 머물 계획을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2년이 넘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의 여행 길은 나그네 김삿갓처럼 자기 마음대로 다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쫓으라”(눅9:59)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을 제자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제자들 뜻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정해집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도”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도는 道, the way 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여행의 길, 성도들이 모인 모임인 이 교회의 길 역시 사도의 여행길 처럼 임의대로 자의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던지 하지 못하던지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생애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한 일들이 19장 전체에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순서대로 보면, 신앙이 부족한 신자들을 다시 가르쳐 주의 일꾼으로 양육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은 지난 주일에 함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회당과 두란노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였습니다.

이 강론을 통해 믿는 이들이 교회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교회가 지역사회에 영향을 줍니다.

마술사들과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이 많았던 에베소 사회가 그들로 인하여 술렁거립니다.

마술사들과 심지어 제사장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어 귀신을 쫒아내려고 하는 일도 생겨납니다.

마술사들이 자신의 마술 책을 불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은 바울과 그 추종자들로 인해 그만 경제적인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것을 뭉뚱그려 우리들은 바울의 선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성령을 따라 가는 교회는 남을 먼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부족한 교회의 모습부터 고쳐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웁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성령을 따라 가려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가르친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르치고 배워야할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가르치신것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문제만 가지고 회당에서 3개월 그리고 두란노에서 다시 2년을 강론하였습니다.

성경을 테마로 가르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가는 교회가 함께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왜 오느냐?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 가슴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알고자하는 욕망이 가득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주님앞에 개인의 문제들을 내어놓고 해결받는 문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해결이 목적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평안과 축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축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꿈에 나의 삶이 집중되어 있을 때 나의 문제가 중요한것이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더 큰 비전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이 없는 청지기에는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시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아마 경험하실 것입니다.

회사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가지고 일하는 직원과 맡은 자기 일은 충실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직원을 대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도 명예도 생명도 포기하고 다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면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지금 아시아의 중심도시, 무역이 발달되어 온갖 진귀한 명물들이 쏟아지는 도시, 큰 도서관이 있을 만큼 학문이 발전되어 있는
도시, 경제적 부를 누릴 일할 기회가 많은 도시, 이곳을 찾아온 유대인들, 헬라인들, 아시아인들은 이민자들로 저마다 무엇이든지
최고가 되어보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믿으니 그들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썩어빠진 이 세상, 잠깐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 아무리 수고하고 땀흘려도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이세상, 대단한 꿈을 주는 것같이 처음에는 요란하고 찬란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이 보이는 이세상,

이것을 위해 사는 것 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자는 뜨거운 꿈이 생겨났습니다.

에베소 신자들 처럼 오늘 우리 교회가 살아 움직이려면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 가슴속에 그들 처럼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면 내 직업에 대한 권태증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내 직업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가정의 조그마한 문제가 그리 크게 대두되지 않습니다.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더 큰 것을 소유한 사람이기에 작은 것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음과 욕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이 아니라 믿음이면 그리고 믿음의 열정이면 희한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바울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엊자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나갑니다.

서양 사람들 손수건은 코를 풀어서 제 생각에 땀만 딱는 우리들 것 보다 더 불결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 불결한 손수건이 무슨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의 손에서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을 보시면 “이적과 기적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드러나지 않고 주의 말씀이 드러납니다.

이적과 기사가 드러났다면 그것은 성령을 따르는 길에서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이적과 기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에베소 도시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타락한 제사장의 거짓이 드러나고, 우상 만드는 사람이 사업이 안될 정도로 에베소 사회에 에베소 교회는 영향을 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의 여정은 우리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청사진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하십시다.

우리를 체코로 보내주시고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체코교회 곁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질문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꿈과 그 나라를 이루려는 열정으로 가득 채웁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가진 믿음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개인이 변화하고 가정이 변화하고 일터가 변하고 학업이 달라지고 사회가 변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며, 문제의식을 던져주며,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어 더욱 흥왕해지는 선교의 결실이 나타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에베소에서 당시 세계관으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 선교를 결심한 바울처럼 체코 프라하에서 슬라브 문화권 전체에 대한 세계 선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기원합니다.

체코 체류자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18일)
  • 행19:1-20
  • 설교자: 이종실

040718

본문: 사도행전 19:1-20

제목: 체코 체류자로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본문>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설교>

한국에서 작은 교회 또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오신 분들은 좀 덜한데, 성령운동, 성경 공부, 또는 경배와
찬양과 같은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이제 10년 20년 만에 대교회로 부흥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신 분들은 도무지
해외한인교회에 적응하는데 매우 어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를 비교하면서 비슷한점과 차이점 그리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무엇인지 늘 탐구하고있습니다.

어디서 신앙생활을 했던지 새롭게 출석하는 분들을 위해 쉽게 이해하고 새로운 교회의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흡수력과 구심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인교회는 그것이 매우 약합니다.

더구나 한인교회는 늘 불안정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저는 대부분의 해외한인교회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교회 안에 신앙과 사회의 위계질서가 없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교회에 어른과 선생이 없습니다.

서로 알 것 다 아니 너와 내가 다를 것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존경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인교회는 해외에서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신앙생활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갓 온 신자들이 보면 한심하게 보입니다.

질서도 없고, 신앙의 중심도 없고 중구난방입니다.

교인들도 한심하고 목사의 설교도 목회도 교회운영도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해외한인교회를 몸에 비유를 하자면 조그마한 질병도 쉽게 감염될 수 있는 그런 허약한 체질과 같습니다.

그래서 온갖 유사 기독교 종파들이 해외한인교회 안에서 득실 거립니다.

지금 체코에 한국 유사 기독교 종파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침례교파에서 생겨난 박옥수의 구원파와 김기동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프라하 한인교회가 평안하지 못할 때 통일교 사람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을 한 것을 보고 그날 설교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통일교의 새가정 운동이 나쁜 것이 없어보인다는 교인을 만나고 마음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여성이며 당시에 남편은 찰스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생각하여 통일교 활동을 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는지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살기 어려워 일거리를 찾으러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체코 사람들처럼 돈을 받고 한국 학생들 과외공부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리 순순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 것을 완곡하게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교회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2-3년 전에 세 딸을 데리고 온 박옥수 구원파 한 가정이 들어와 열심히 체코어를 공부하더니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의 집회와 성경공부를 참석한 체코인들의 전화가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걸려왔습니다.

그를 저 인줄 알고 이상한 가르침에 질문겸 항의겸 전화를 했습니다.

이미 오래전 부터 베뢰아 김기동씨가 목사의 이름으로 체코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질 공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 제일 큰 체코 침례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하였습니다.

이 일에 체코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교회일에 분열과 다툼이 있는 해외한인사회에는 이단이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대가 됩니다.

이 외에도 잘못된 영을 가진 이들이 신앙적 사회적 위계질서가 잡혀있지 않는 해외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교회는 풍지박살이 납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온 분들로 인해 역시 해외한인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입니다.

해외교회의 이 허약함은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해외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 왔습니다.

에베소의 전도는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볼로가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아볼로를 성경은 “그는 이미 주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열심히 예수에 관한 일을 말하며,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18:25)라고 소개하였다.

다시 말씀드려 예수를 선포하였지만 그는 세례요한의 설교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아볼로가 알고있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요단 계곡 온 지역을 찾아 다니면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눅3:3)

이것이 “요한의 세례”입니다.

회개의 세례는 임박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그리고 오실 메시야는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농부로서 암시되고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눅3:17)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 설교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요한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전해졌습니다.

아볼로는 이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요한의 세례 즉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의 도”를 받아들였기에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최후심판으로서 재림하실 예수를 설교하였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활동할 때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들 역시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고 회개의 좋은 열매을 맺기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무언가 부족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3차선교여행을 할 때를 학자들에 따라서 52-54년 또는 55-57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주후 50년대 중반쯤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들은 예수 승천이후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사건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4) 

믿음생활에서 회개와 용서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다가 한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신앙생활의 패턴에 저와 여러분들은 멈추어서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죄 고백과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며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들에게 손을 얹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였습니다.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시작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아래 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씀드려 그들은 회개와 죄 용서의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술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 설교는 영적 전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엡 6:12)

저는 이 에베소 교회의 이 신앙의 씨름이 바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의 신앙생활의 모델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이 프라하에 살면서 아직 얼굴한번 보지 못한 분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분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한분이며 가족관계는 어떻고 프라하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인지 기타 등등….

조금만 살다 보면 알 것 다 알아요.

어떤 감추어진 사생활도 심지어 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마치 피할 수 없이 만나야 되는 감옥 같은 해외생활에서 그것도 해외의 교회 안에서 우리들이 신앙의 패턴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살다 보면 서로가 오해할 수 도 있고,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고,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해외생활에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생활과 인생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해외이민생활을 위해서 우리들이 우선 배워야 할 것은 이해심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내게 형성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6장 12절의 이 신앙의 패턴이 우리들에게 이해의 마음을 길러주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어여움을 영적전쟁으로 이해하면 상대방이 미워지지않아요, 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한번 더 살펴보게 됩니다.

저는 이 해외생활이 정말 영적 전쟁인 것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자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잠이 듭니다.

때로는 선명한 꿈을 꿉니다.

체코어로 체코사람의 꿈을 꾸기도 하고 한국어로 한국사람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얼마가지 않아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깊은 묵상 속에서 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은 말씀을 전할 때는 꼭 교회 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우들의 삶에 그리고 교우들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이 저에게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걸어오는 싸움으로 저의 눈에는 보입니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영적싸움에서 지지않는 삶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늘 권세를 잡은 어두운 세력이나 악한 영들은 간교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않고 우리 인간의 가장 연약한 고리를 통해 공격합니다.

해외생활에서 가장 연약한 고리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감옥 같은 해외생활의 인간관계를 통해 악한 영들은 먹이를 찾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싸움을 싸우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저희들은 꼭 한가지는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혼돈해서 듣는 분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씀드려 성령을 받아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않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성령을 받지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따로 주제를 삼아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롬 8:9)

성령이 우리안에 내안에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징표가 무엇입니까?

성수주일하는 것입니까? 하루한장 성경읽고 하루세번 기도하는 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전도하는 것입니까? 숨은 봉사를 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이 내 안에 없으면 우리는 영적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주의 거룩한 영이 임재하고 계신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을 여러분들의 의지로 이성으로 고백하게되고 기도하게되고 받아들이게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 안에서 성령께서 하신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예수님만 생각해도 눈물이 흐르는 것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마 16:13-17)

혈육도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일도 모르고 아무리 오래 사귄 친구도 모르는데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임재하는 성령을 깨닫고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문제들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성령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체코 체류자들의 믿음생활 입니다.

우찌무라간조의 “예수를 생각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살면 우리도 그와 함께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가난함도 슬프지도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란도 괴롭지않고 그 행복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는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그 성공에 뛰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