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6.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미할 옛 교회당

6. 스따레 미에스또(Staré Město 주: 번역하면 구 도시)의 성 미할(sv. Michal) 옛 교회당

마당의 왼쪽(북쪽)에 있는 오늘날 식당으로 바뀐 신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정면을 보면서 얀 후스 선생 시대부터 이미 유명해진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후스(Hus)는 베들레헴 채플에서 일하기 전인 1311년부터 원래 고딕양식의 성 미할 교회당인 여기서 자주 초빙받아 설교를 하였다. 당시 주임신부는 즈데라즈의 베르나르드(Bernard ze Zderazu) 였다. 후스와 예로님(Jeronym) 두 사람은 이 교회에서 대학의 다른 선생들과 만나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1399년 여기서 후스는 위클리프의 몇몇 논문에 대해 폭 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1406년부터 성 미할 교회에서 후스와 같은 고향이자 신실한 친구 프라하띠쩨 크지슈땬선생(M. Křišt´an z Prachatic +1439)이 활동하였다. 그는 1411년 3월 15일 자신의 교회에서 열린 후스 파문에 대한 논의를 용감하게 거부하여 프라하 시민들의 커다란 신망을 받았다. 후스파 혁명이후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프라하 꼰지스또즈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1412년에 후스에 이어 교수회의에서 총장에 선출된 까렐 대학에서 가르쳤다. 총장으로 재직 중에 성 미할 교회와 대학에서 특별히 면죄부 판매 반대를 목표로 하는 학구적인 토론을 계속하였다. 벽 속의 마르틴 교회(kostel u Martina ve zdi)에서 양종 성찬의 성만찬 시행 직후 1414년 가을에 이 교회에서 같은 성만찬이 시행되었다. 양종 성찬의 주요 창시자 야꼬우벡 선생(M. Jakoubek)이 그 당시 여기서 자주 설교를 하였다.
1415년 봄에 성 미할 교회의 크지슈땬은 콘스탄츠(Constance 번역자 주: 후스의 종교재판이 열린 도시이며 독일남부의 스위스 국경을 접하는 도시)로 체포된 친구 후스를 만나러 떠났으나 일정기간 수감되었다가 후스가 사형되기 직전 풀려나 프라하로 돌아왔다. 크지슈땬이 죽은 뒤에 성 미할 교회에서 12년간 사제로 믈라도뇨비쩨(또는 믈라데노비쩨)의 뻬뜨르 선생(M. Petr z Mladoňovic 또는 Mladenovic +1451)이 활동을 하였다. 대학에서 후스의 유능한 제자인 그는 1414년 가을에 콘스탄츠 공의회의 후스 동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그는 까렐 대학의 동행 대표단 대표 흘룸의 얀(Jan z Chlumu) 귀족의 비서 였다. 대표단은 기록자로 외교관으로 그리고 많은 편지를 대필하는 자로 일하였다. 콘스탄츠에서 후스가 체코직후 처형되지않도록 도왔으나 어떠한 공개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자신의 선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호소하여 결국 콘스탄츠 화형장까지 그를 동행하였다.

콘스탄츠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 믈라도뇨비쩨의 뻬뜨르는 목격자로서 후스에게서 일어난 사소한 모든 사건들을 „콘스탄츠에서의 얀 후스 선생 소식(Zpráva o M. Janu Husovi v Kostnici)“ 체코어 제목 아래 라틴어 연대기를 발간하였다. 그것의 마지막 부분은 선별된 후스의 편지들과 함께 프라하 후스 교회들이 얀 후스 화형 기념일마다 읽는 „후스의 고난“이 사본으로 첨가되어 있다.

후스파의 혁명의 시대에 뻬뜨르는 대학 선생으로 임명된 이후 온건파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입장에 섰다. 1420년 말 급진주의적인 따보르파 대표들과의 신학적 논쟁에 참석하였으며 1426-1427년에 철학부 학장이 되었고 1440-1441년까지 크지슈땬 선생의 후임으로 총장이 되었다. 후에 얀 로키차나(M. Jan Rokzcana) 선생의 후스파 노선에 접근하였으며 로키차나의 프라하 대주교 승인에 대한 로마 교황청과의 협상을 위한 외교관으로 등장하였다.(II/5).

후스파 시대 초기에 미할 교회에 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비뜨고바 산(Vítková hora 주: 프라하 까를린에 있는 말 동상이 있는 산) 에서 지그문드의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이른 첫번째 대승리 직전에 일어났다. 1420년 7월 15일 공포로 뒤덮여 있을 때 따보르파의 귀족 바츨라브 꼬란다(Václav Koranda St.)가 교회당 둥근 아치 천장 아래로 말을 타고 들어와 교회당의 긴 좌석의자를 떼어 적군의 공격에 대항하던 비뜨고바 산에 튼튼한 바리케이트를 쳤다.

믈라도뇨비쩨 이후 미할 교회의 책임자는 종교개혁 발전을 위해 커다란 의미가 없는 대체로 온건한 구 우트라퀴스트 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200년이 넘게 후스파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빌라 호라(Bílá hora 번역자 주: 번역하면 백산, 여기서 백산에서 벌어진 카톨릭파와 개혁파간의 전쟁을 의미함) 이후 아일랜드 수도회로 넘겨져 교회 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을 하여 수도원으로 운영하였다. 요세핀의 개혁 시대인 1789년에 수도원은 폐쇄되고 교회당은 창고로 변경되었다. 그 후 200년간 두 건물들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옛날 종이 창고로 사용되었다. 최근 1990년대에 많은 비용을 들여 프라하시가 문화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당을 식당으로 개조하였다. (그 공간에서 카프카의 개념에서 프라하 역사를 설명하는 „성 미할의 비밀“ 문화 시청각 프로그램이 상영된다.)

미할 교회당 마당에서 (북쪽 골목길이 다시 멜란트리호바 거리로 다시 나오는) 다시 미할 교회로 돌아간다. 여기서 왼쪽(남쪽 방향)으로 20 미터쯤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우 줼레즈 드베지(U železných dveří 번역자 주: 번역하면 초록색 대문들 곁에 있는) 19/436호 집 골목길로 나온다. 마당을 가로질러서 옛날 주인들의 이름들이 있는 커다란 문화재 기념판 곁에 잠시 멈춘다. 그 이름들 가운데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두개의 이름이 있다. „시와 종교 권리 변호사“였던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던 당시 프라하 신 우트라퀴스트 대변인이었다) 리보슬라브의 얀 흘라브사(Jan Hlavsa z Liboslavě +1534)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 반 합스부르크 혁명에 참가한 프라하 우트라퀴스트의 유명한 교인인 얀 슈짜스뜨니 골리아쉬(Jan Št´astný Goliáš)으로 그는 „명예와 재산의 손실에 대한 언도“를 받았으나 사형 전에 외국으로 도망하였다.
„우 젤레즈니흐 드베지“(주: 초록색 대문들 곁에 있는) 집 안마당에서 일스께 거리(Jilské ulice)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약 50미터쯤 가서 왼쪽으로 돌아 야로브초바(Jarovcová) 좁은 골목길을 만난다. 여기서 도미니카 수도원의 높은 벽을 따라(왼쪽편에 있는) 걸어서 왼쪽코너까지 가서 후소바 거리(Husová ulice)를 가로질러 (여기서 후스파 시대인 1448년에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국내 통치자로 불안한 프라하를 통치했을 때 첫번째 프라하 거주지로 구입한 거대한 집 „우 펠리카나(U Pelikána)“가 서있었다. 5년뒤 그러나 이 집은 파괴되고 멀지않은 제띠에조바 거리(Řetězová ulice)에 있는 상속받은 군슈따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IV/1a)) 반대편 모퉁이집(후소바 거리 10호)에 체코 캠페인(이라섹(Jirásek) 소설 비엑(F.L. Věk)의 소재로 등장한, 번역자주: 체코 문화 전통 정신 등을 보호하고 알리는 일)을 위해 그 집을 두 번째 거주지로 삼았던 바츨라브 마뗴이 크라메리우스(Václav Matěj Kramerius) 문화재 기념판이 있다.

바츨라브 마뗴이 크라메리우스(Václav Matěj Kramerius +1808)은 프라하 기자이며 민속잡지와 책 발간자이며 체코 종교개혁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체코 애국과 개몽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요셉 2세(Josef II)의 관용의 칙령에 관한 서적 발간(요셉의 책, 관용의 달력)을 좋아하였으며 개혁교도에 대한 관용에 공개적인 공감을 표현하였다. 개혁교도들의 책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으며 특별히 끄랄리츠까 성경(Kralická Bible)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체코 관용의 교회로 파송한 헝가리 출신의 개혁교도의 설교자들의 설교 통역을 돕고 그들을 위해 기도문, 예배순서 그리고 심지어 칼빈의 신앙고백 번역서를 출판하였다.

[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5. 성 미꿀라쉬 교회당과 구 시가지

5. 성 미꿀라쉬 교회당(Kostel sv. Mikuláše)과 그 교회주변의 구 시가지

구시가 광장의 북동쪽에 마찬가지로 유명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웅장한 바로크 건물 성 미꿀라쉬 교회당(구시가지의 이 교회당은 말로스트란스카의 같은 이름의 교회당과는 다르다 –IV/8)이 눈길을 끈다.
이 이름의 초기 고딕양식의 교회당은 상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던 뽀지츠(Poříč)에서 스따레 미에스또(Staré Město)로 1230년에 이주한 독일 상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4세기에 교회당은 정면의 탑과 함께 세 줄로된 좌석으로 재건축되었으며 그리고 띤 앞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스따레 미에스또의 사제관 교회당으로 사용되었다(II/5). 까렐 4세 시대인 1364년 이후 성 일리(Jiljí) 교회의 얀 밀리츠(Jan Milič)가 여기서 자주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대학 교구를 위해 그리고 체코와 독일 두 민족의 프라하 지식인을 위해 선포되었던 라틴어 설교(베들레헴 채플이 세워지기전)였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에 1381년부터 계속해서 체코 종교 개혁적인 설교가와 신학자이면서 끄로미에지쉐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의 충실한 학생이자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뗴이(Matěj z Janova +1389)가 활동하였다.

야노보의 마뎨이는 따보르 지역의 신자였으며 9년간 학업 후 대학의 마기스터 학위를 수여하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파리 선생“). 프라하에서 그는 교회의 직책을 맡지 못하였으나 겸손하고 매우 학식있는 신학자로서 까렐 시대때 유명한 개혁주의적인 설교가이면서 소설가인 예쇼보의 보이떼흐 란느꼬바(M. Vojtěcha Raňkova z Ježova +1388)의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받았다. 성 미꿀라쉬 교회의 설교가로서 마뗴이는 – 많은 신부와 수사들의 반대자들을 비판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저항을 받으면서도 성경에 의한 하나님 말씀의 순복과 성만찬의 거룩한 공동체를 위해 완강한 십자군이 되었다. „신 구약 성경의 법칙에 대하여 (O pravidelech Starého a Nobého zakona)“라는 라틴어 작품들에 그의 열성어린 성경공부의 결과들이 들어있다. 신학적으로 그는 미스뜨르 후스(mistr Hus)와 야꼬우백(Jakoubek)의 후대 종교개혁의 노력을 위한 토대 마련을 도울 수 있었다. (그의 구호는 : „선한 삶을 위해 기독교인이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상화된 성화와 성골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 지도층은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미꿀라쉬 교회당을 1415년부터 후스파 양종성찬지지자들이 사용하였다. 1537-1552년까지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 – 번역자 주: 교회를 지원하던 제도)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폴(Jan Mystopol)이후에 신부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교회의 마지막 목회자인 빅토린 브르벤스끼(Vikorin Vrbenský)가 스따로미에스께(번역자 주: 번역하면 구시가) 광장에서 사형집행(번역자 주: 1621년 빌라호라 전투이후 개혁교도처형을 말함) 전에 시 감옥에서 사형수에게 성만찬 집례를 허락한 신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잠시 후 그는 다른 개혁파들의 설교가로서 프라하로부터 추방되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 때 교회당은 엠마오 베네딕트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그 교회당을 자신들의 새로운 수도원으로 개축하였다. 1650 – 1660년에 교회당은 바로크 양식화되었고 1732년에 파괴되었다가 1735년까지 재건되어 오늘날까지 바로크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 미꿀라쉬 교회당의 다양한 재난은 이외에도 많았다. 요셉 2세(Josef II)의 개혁시대 동안 다른 교회당들과 수도원들처럼 폐쇄되었고 1865년부터 콘서트 홀로 사용되고있다. 1914-1916년까지 식당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방정교회에게 사용권이 넘겨졌었다. 1920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Církev československé husitské)가 프라하와 전국교회의 본부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미꿀라쉬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중앙문은 다른 쪽(서쪽)에 있다.(왼쪽으로 돌아가자.) 그 뒤편에 교회당이 후에 시민들의 거주 주택으로 변경된 베니딕트 수도원 건물들과 연결되어있다. 소위 „탑 옆에“로 불리우는 그 건물의 끝에 독일출신의 유명한 유대인 소설가 프란쯔 카프카(Franz Kafka +1924)가 태어났다. 그 집은 1902년에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유명한 소설가의 흉상이 있는 문화재 표시판이 그 집을 장식하고있다.

스따로미에스께(구시가) 광장으로부터 성 미꿀라쉬 교회당을 따라 프라하 성 방향으로 말레(작은) 광장(Malé náměstí)을 거쳐 까렐 다리쪽으로 끄랄로브스까 체스따(Královská cesta 번역자 주: 번역하면 왕의 길) 거리가 있다.우리들의 첫번째 도보 코스는 그러나 여기서부터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않은 베들렘스까 까펠(Betlémská kapel 번역자 주: 베들레헴 교회 또는 채플)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쪽으로 가면서 몇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는 매우 흥미 있는 오래된 샛길과 골목길들을 거쳐가게 된다.

우 라드니쩨(U Radnice) 거리쪽 남쪽방향으로 돌아들어가면 프라하의 가장 오래된 장터 말레 광장(번역자 주: 번역하면 작은 광장)을 통과하게 된다. 광장 중앙에 16세기 중엽의 녹색 르네상스 철망이 있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그 주변의 집들은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 „조그마한 광장“에서 우리의 도보 코스 방향으로 오른편에 특별한 문화재 주택 우 빌레호 르바(U Bílého lva 번역자 주: 번역하면 흰 사자 곁에) 2/145호를 볼 수 있다. 모로코양식의 외관에 후기 고딕양식 문 입구 위에서 사자가 보호하고 있다. 이 집에서 후스파 시대에 1487년 프라하에서 첫 번째 체코 책 – „다윗의 시편(Žaltář Davidův)“이 인쇄되었고 1488년에 소위 프라하 성경(Bible pražská)이 출판된 캄파(J. Kampa) 인쇄소가 있었다. 그 출판자들은 두 명의 열심있는 양종성찬 지지자들이었다.: 그 두 명은 이 집의 주인인 마뗴이 상인(kupec Matěj)과 옆 집 주인인 얀 삐뜰릭(Jan Pytlík)이다. 다른 두 명의 후스파 지지자들이 출판을 지원하였다. (프라하의 첫번째 체코어 성경 출판에 반세기 뒤에 얀 멜란트리흐(Jan Melantrich)과 그의 동업자들이 참가하였다. –I/2 참고). 16세기에 „우 빌레호 르바“ 집은 유명한 후스파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책출판업자 호디슈뜨꼬보의 미꿀라쉬 꼬나체(Mikuláš Konáče z Hodištkova +1546)의 소유가되었다.
말레 광장 에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11/459호 건물의 샛길로 걸어가면 입구에 두개의 기둥을 따라 „리흐뜨로비 부부의 나다츠니 둠“(번역자 주: 번역하면 복지사회단체의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집이 복지사회를 위해 기부 된 집인지 아니면 복지사회단체의 사무실이었는지 확인을 못하였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공간의 낮은 마당을 가로질러 미할스까 거리(Michalská ulice)를 만나는 출구로 나온다. 여기서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면 종교개혁의 역사가 있는 유명한 유적지 앞마당으로 통하는 짧은 샛길을 통과하게 된다.

[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4. 구시청사

4- 구시청사

후스 동상에서 구시청사로 돌아오도록 하자. 젤레즈나(Železná) 거리쪽으로 10미터 정도 내려와서 광장 바닥에 철로 된 „프라하 정오선“ 표식이 있는 곳에서 멈추도록 하자. 몇 미터 더 아래에 있는 둥근 돌은 이전에 „마리아 여제 기념비“ 가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미리 앞의 서론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프라하가 도시들과 체코 개혁의 어머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카렐 4세 때 지어진 탑이 있는 전형적인 구시청사와 베이식의 윈도우가 있는 고딕식의 교회는 특히 체코 개혁 시대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또한 주요한 사건들도 일어나게 된다. 고딕식 베이 아래 있는 두 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왼편의 작은 현판은 후스파를 이끈 사람의 한 명인 얀 젤립스키(Jan Želivský)의 두상과 연관된다.

현판 위에 써 있는 글은 (사회주의 시절에 제작된) 젤립스키를 „눈 속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설교자로도 활동하며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프라하 후스 주의자들의 급진파 대변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프라하에서 부르주아지들의 반동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그로 인하여 1422년 3월 9일 구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젤립스키에 대해서는 신시가를 여행하며 더 이야기 해보자.)

오른편의 시청 벽에 있는 큰 현판에는 반합스부르크 봉기를 주도하다가 1621년 6월 21일 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한 27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맨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은 독일 개혁주의 파의 선두에 있었던 야힘 슐릭(Jachym Šlík) (이에 관하여서는 살바토르 개혁 교회 순례 때 자세히 알아보자.), 체코 형제애단을 이끌었던 바츨라프 부도베츠(Václav Budovec), 체코 양종성찬 주의자 폴쥐체의 크리슈토프 하란트 (Kryštof Harant z Polžic) 등이다. (이에 관하여서는 말라 스트라나 편에 더 설명된다.)

기념현판에 적혀져 있는 이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흔히 사용되는 „27인의 체코 귀족 처형“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에 언급한 세 귀족의 이름들 이외에 7인의 기사들, 그리고 프라하를 대표하였던 17인의 시민들의 이름들이 있다. 민족을 이야기 하자면 (이러한 구분은 그 당시 딱히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 5명의 독일인들이 있었다! – 종교적인 구분으로는 16인의 양종 성찬주의의 후스파 사람들, 7인의 형제애단, 4명의 루터교도 순이다. (이들과 함께 가톨릭인이었던 후데니체의 디비쉬 체르닌(Diviš Černín z Chudenic)도 처형당하였다. 1618년 프라하성에 침입한 폭동자로 궁정 부집정관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죄목이었다.)

구시가에 있던 처형장은 오늘날 보도에 모자이크로 새겨넣은 27개의 십자가로 나타나 있다. 왕관 모양이 있는 칼의 십자 교차 형상은 우리에게 처형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카트 미들라즈 (Kat Mydlář)는 다른 기구들 이외에도 4개의 칼이 사용되었음에도 새벽 5시에서 9시까지 4시간이 걸렸다 한다.)
시청 감옥은 꽤 자주 사용되었었다. 얀 젤립스키의 추종자들 뿐 아니라 양종 성찬주의자들의 대표들, 이를테면 프라하티체의 크쥐슈땬(Křišťan z Prachatic), 성 미할 교회의 믈라도뇨비체의 페트르(Petr z Mladoňovic), 성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Jan z Příbramě), 플젠의 프로코프(Prokop z Plzně) 목사도 이 감옥을 거쳐갔다. 1452년에는 과격한 타보르파의 일원이었던 플젠의 바츨라프 코란다 시니어(Václav Koranda starší) 목사도 감금된다. 이 곳에서 또한 프로테스탄트 대표자들은 1621년 처형당하기 전 날 밤을 보낸다. 모든 성직자들은 종교적인 정신적 지지로서 신 양종 성찬 주의자들과 독일의 루터파 교도들에게 보답할 수 있었다. 형제애단 지도자들은 그들의 성직자들을 부를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하였다. (바츨라프 부도베츠는 예수이트들의 신부들을 불러 주겠다는 제안도 완강히 거부 하였다.)

후스 시대에 시청사의 큰 회의실에서는 양종성찬 교단 감독 평의회뿐 아니라, 감독 선거도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 열렸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지역 영주였던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를 체코 왕으로 선출하였던 1458년의 선거였다. (시청사 회의실에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바츨라프 브로직(Václav Brožík)의 그림이 있고, 그 옆에 콘스탄트 종교회의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얀 후스의 그림이 있다. ) 오늘날 큰 회의실이 있는 (폭넓게 장식이 된 창문으로 외부에서 볼 수 있는) 시청 부분은 전에 베들레헴 교회의 공동 설교자이자 상인이었던 바츨라프 크쥐즈(Václav Kříž)의 집이기도 하였다. 이 집에서 얀 후스도 자주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 집은 1461년 시청으로 편입된다.

[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3.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

3-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

구시가 광장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광장 북동쪽에1915년 후스 화형 5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후스 동상이다. 마치 큰 횃불 속에서 살아 남은 듯한 얀 후스 상은 두 상징을 지닌 그룹 사이에 우뚝 서있다. 그의 왼편에는 성배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방패를 들고 있는 후스 전사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반 개혁시대에 조국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움츠리고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얀 아모스 코멘스키가 그의 작품 „유언“을 통해 나타낸 희망을 상징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상이 있고, 동상 뒤 쪽에는 이런 문구가 씌여 있다. : 민족이여 일어나라, 주권이 당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 동상 앞면에는 후스가 콘스탄트 감옥에서 신의의 모든 체코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갈망하십시오“.
후스의 대학내에서의 활동은 이미 카롤리눔(1) 편에서 알아보았고, 그의 설교 활동은 베들레헴 교회(8) 편에서 듣게 될 것이다. 이 곳 동상 앞에서 이 작품을 만든 작가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Šaloun)이 작품에 대하여 이미 코멘트 하였던 그의 생각을 상기시켜보자.:

„콘스탄트에서 타올랐던 불꽃 속에 강인했던 후스는 전보다 더 강해졌었다. 그의 육체는 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 남아 체코 역사 속의 정신뿐 아니라 생명이 되었다. 후스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진리로 향하는 인식과 길이 열리게 되었다…. 후스 봉기는 최초의 대혁명이었고, 그 안에서 인류는 중세의 종교적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이상과 정신적 유산을 위한 작은 민족의 거대한 승리의 싸움이었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힘있는 첫걸음으로 서방에서는 이 모든 근대적 진보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 안에서 작은 체코 민족은 진보를 일구어 내기도 하였지만 나중의 패배의 원인과 뿌리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세했던 중세 유럽 가톨릭 세력과의 싸움에서 힘을 다 소진하고 200년 후 결국 적들의 지배에 무릎을 꿇어 1620년 마지막 투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일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5년 후스 동상건립에는 전 체코인들의 후원이 뒷받침 되었다.

[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2 – 성 하벨 교회와 멜랑트리히의 집

2 – 성 하벨 교회(Kostel sv. Havla)와 멜랑트리히의 집(Dům Melantrichů )

카롤리눔 앞마당을 지나 다시 오브츠니 트르흐(Ovocný trh) 거리 옆에 젤레즈나 거리의 끝으로 가보자. 오른쪽으로 본래의 로틀레프의 대학 건물의 정면을 따라 돈다. (여기는 중세에 다양한 간이 점포들이 있던 고딕식의 회랑이 있던 곳이다. 후스주의시대 말엽, 이 곳에서는 서점이 있었는데 특히 프라하의 유명한 얀 멜랑트리히(Jan Melantrich)와 그의 이웃인 벨레슬라빈의 인쇄업자들과 출판업자들의 성서 판매소로 유명하였다. 새롭게 단장한 유리문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서면 앞마당에 대학 가운을 입은 후스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카렐 리디츠키의 작품)
맞은 편 하벨 거리로 건너가서 왼편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보통 프라하의 다른 본래의 고딕식 교회들이 그렇듯 바로크 식으로 신축된 성 하벨 교회(Kostel sv. Havla) 앞에서 멈추어보자. (17세기 후반 이 교회의 주인은 반개혁 시대의 카르멜회 수도사들이었다. 입구 왼편 청동 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카렐 4세 재위 시절 체코 종교 개혁의 두 선구자가 이 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크로므녜지즈의 얀 밀리치(Jan Milič z Kroměříže)이다.

본래 독일의 아우구스틴 수도사였던 콘라드 발트하우저는 1358년 카렐 4세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다수의 프라하 독일인들을 위한 \”참회의 설교\”를 하기 위하여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온다. 그는 설교 중에 프라하 전 계층의 사람들의 표면적인 종교적 믿음, 계속되어 가는 사치, 증가하는 도덕성의 상실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자주 교회 앞 광장에서 설교 해야 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에게 그를 고발한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의 강한 항의에 설교 활동이 좌초된다. 7년 후인 1365년 성 하벨에 의하여 이제 막 완공을 한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Chrám P. Marie před Tynem)’로 옮겨간다. 그 곳에서 1369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활동을 한다.
크로므녜지즈의 얀 밀리치는 체코 설교자로서 발트하우저를 대신하였다. 왕궁 집무실의 유능한 관리였고, 참사 회원이자 집사 였던 밀리치는 발트하우저의 영향으로 그를 매혹시킨많은 캐리어들을 뒤로 하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또한 그는 설교에서 부유층에서, 또한 성직자들 특히 수도사 계급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폐단들을 비판하였다. 발트하우저의 죽음 이후 밀리치도 틴 교회에 있었으며, 그 이후 지인들에게 말을 배운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설교를 해야 했었다. 1364년부터는 우리가 이제 가 볼 성 일리 교회가 그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4반세기 이후 성 하벨 교회에서는 후스도 경험삼아 설교를 하고, 1421년부터 콘스탄츠 종교의회에서 후스를 비난한 사람들 중 한 명이자, 악명 높은 후스파 반대자 슈테판 팔레츠(Štěpán Páleč)도 설교를 하였다. (그는 체코 민족의 분노로 폴란드로 도망갔다.)
1421년부터 이미 하벨 교회는 양종 성찬 교회에 속하게 된다. 후스파의 다음 세대 대표들 중 바츨라프 코란다 주니어 (Václav Koranda mladší)도 이 곳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양종 성찬 교회의 행정을 책임졌으며 (얀 로키찬(Jan Rokycan), 이후), 1519년 이 곳에 묻힌다. (그러나 교회 지하실에 있던 그의 유해는 재 카톨릭화 시대에 제거된다. 친 카톨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야겔론스키(Vladislav Ⅱ Jagelonský),는 유명한 후스주의 성직자인 바츨라프를 주님 몸의 날 행사 때 성배주의자들의 데모에 참석했다는 죄목으로 하벨 교회에서 잡아들여 1480년 카를슈테인 황실 감옥에 감금시켰다. 하벨 교회는 백산 전투때까지 양종 성찬 교회로 남아있었다. 마지막 복음주의 전도사 비트 야케쉬(Vít Jakeš)는 이 1621년 가을에 추방됨이 이 곳에서 알려진다.

이제 구시가 광장의 유적지들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하벨스카(Havelská) 거리 끝에서 멜랑트리호바(Melantrichova) 거리로 꺾어진다. 거리 이름 때문에라도 오른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10번지 집 앞에 멈추도록 하자. 그 안에 중요한 후스주의의 과거가 숨겨져 있다. 원래의 고딕건물 뒷 쪽 익면에 아벤틴의 이지 멜랑트리히(Jiří Melantrich z Aventina)와 그의 후계인 벨레슬라빈(Veleslavín)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지 멜랑트리히(+1580)는 카렐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유학을 갔었다. 우선 비텐베르그에서는 필립 멜랑트리히(Filip Melantrich),에게, 바실리에서는 도서인쇄업자인 프로베니오(Frobenio),에게 인쇄기술 사사받는다. 프라하로 돌아와서는 소직에 있는 양종 성찬 주의자였던 인쇄업자 바르타 네톨리츠키(Bárta Netolický, +1552)와 손을 잡고 체코어 성서를 출판한다. – 나중에는 ‘멜랑트리셱(Melantrišek)’이라 불리웠다. 멜랑트리히의 출판 활동은 그의 사위이자, 후스주의 역사가인 벨레슬라빈의 다니엘 아담(Daniel Adam z Veleslavína, +1599)과 그의 아들 아담 사무엘(Adam Samuel, +1627)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백산 전투 이후 신교주의 인쇄소는 예수이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클레멘티눔 기숙사로 이전되었다.

멜랑트리히라고 이름지어진 거리를 지나 좁은 중세 풍의 길을 따라 구시가 광장으로 향한다. 프라하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 시청사 남면에 있는 구시가 천문 시계(Staroměstský orloj)일 것이다.

정교한 메카니즘의 총체인 천문시계는 1410년에 만들어졌다. 15세기 말 하누쉬(Hanuš)에 의하여 재시공되었고, 나중에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치게 된다. 천문 시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윗 쪽의 숫자는 태양과 달의 궤도 및 일조시간을 나타내며, 몸체부분은 일년의 월과 날을 나타낸다. 1866년 요세프 마네스는 구력판은 신판으로 교체하고, 열 두달을 나타내는 12개의 원형 그림을 그려 넣었다.(농촌에서의 농사 절기를 표현. 원판은 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지금은 카피본으로 교체되어있다.) 1945년 5월 8일 프라하 봉기 당시 천문 시계는 나치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 되어 전면 재시공을 하게 된다. – 매 시간 천문 시계 윗 부분의 창이 열리면서 12사도들이 움직이고 죽음의 해골이 종을 울린다. 허영에 가득찬 사람이 거울을 보며 서 있고, 탐욕의 유태인은 돈 자루를 들고 있으며, 투르크인은 이마를 찡그리며 머리를 흔든다. 마지막에는 닭이 홰를 치며 우리 인생의 매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