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2일

오늘은 스믈 네번째 맞이하는 에큐메니칼 예배였다.

처음에 신비스러운 마음에 많이 모이던 예배에 예배참석인원이 좀처럼 늘지않는다. 어린자녀를 가진 몇몇 한인교우 가정은 거의 이 예배에 참석을 하지 못한다. 활기없는 예배에 통역 리시버를 사용하다보니 자연히 어린자녀들이 예배를 어려워한다. 예배가 진행되면 될 수록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진행의 문제가 아니라 체코교회의 예배 전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인 토론을 필요로 한다. 체코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은 예배의 성서적 신학적인 바탕위에 세대간의 만남의 장으로 중시되고 있다. 그래서 한인 교우들의 어린자녀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예배는 체코 교우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않는다. 떡과 잔은 받지않을지라도 성만찬에 부모와 함께 참가하는 어린이들, 자녀와 부모가 나란히 앉아 드리는 예배가 강조되는 체코개혁교회는 체코 교회의 역사와 사회상황에 뿌리를 두고있어 자녀들을 피교육의 개체의 경향이 강한 우리 한인교우들의 교회교육에 대한 관점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많은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체코개혁교회의 예배 분위기로 시작을 하던 에큐메니칼 예배가 회를 거듭할 수록 한국교회의 예배 분위기와 점점 더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번 주일에 찬양대가 봉헌시간에 특송을하였다. 체코교우들이 처음 경험하는 예배 분위기이다. 이것에 대한 아직 체코교우들의 반응을 알지못한다. 그러나 아랫동네 리벤 교회 교인이면서 보흐니쩨 호스피체 수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체코교우가 찬양대 찬양에 감동을 받고 보흐니쩨 병원에서 콘서트를 해줄것을 요청하였다. 예배후 찬양대는 12월 12일 수요일 오후 4시 수요예배와 함께 콘서트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오늘 시편 22편 찬송가 대신 \"오소서 오소서 평화의 임금\" 한국찬송가를 불렀다. 가사를 체코어로 완전히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국 찬송가 130장 역시 가사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함께 찬양을 하였다.

두명의 유아세례와 두명의 성인세례가 있었다. 얀 꼬츠까, 마데이 꼬츠까, 프란띠쉑 바츨라프 슈또우라츠, 바르보라 야나 마레쇼바 이다. 그중에 여자 어린이 바르보라 야나 마레쇼바의 어머니는 낙심자 였다. 개신교 교인이면서 그녀는 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관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여 오랫동안 교회를 떠났던 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당의 종소리를 아침 저녁에 들으면서 불현듯 교회의 첫사랑을 기억하게 되어 자신의 딸의 유아세례를 준비하면서 교회를 다시 나오기 시작한 분이다.

이종실 목사의 설교 그리고 한인교우들의 찬양대 특송과 예배중에 자주 불려진 한국찬송가 등으로 예배의 균형을 위해 이종실 목사와 슈토렉 목사가 늘 공동으로 집례하던 세례식은 오늘 슈토렉 목사가 모두 집례하였다.

UBF 선교사 가족들이 참여하여 성경읽기 순서를 맡았다. 이 예배는 특정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체코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을 하여 처음부터 \"체코 한국 에큐메니칼 예배\"라고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분들이 주체적으로 예배를 만들어 가도록 공간을 열어가는 것이 새롭게 주어진 또하나의 과제가 되고있다.

오늘 귀한 손님 한분이 왔다. 찰스대학 언어학부 한국학과 미리암 뤼벤스타이노바 교수님의 딸인 끌라라 뤼벤스타이노바 양이 예배에 참가했다. 끌라라는 후스신학부 3학년에 재학중인 신학도이다.

오늘 라띠보르스끼 수석장로님이 손녀딸의 유아세례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 교회에 출석을 하지 못했다. 교회소식은 1) 오늘 봉헌은 알바니아에서 실종된 우리 체코청년교우를 수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돕는데 사용된다. 2) 12월 23일 예배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실황중계된다. 방송시간에 맞추어 오전 9시에 예배가 시작된다. 3)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는 체코-한인 교우들의 연합예배로 드리고 설교는 슈토렉 목사와 이종실 목사가 공동으로 한다. 4) 어제 바자회 수입금이 12,000꼬룬이 넘었다. 이 수입금은 보흐니쩨 정신병원의 장기 입원환자들에게 성탄절 선물 구입에 사용된다. 선물은 우리들이 일방적으로 구입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이 필요로하는 물품을 주문받아 구입해서 우리들의 사랑의 마음과 함께 전달될것이다.

제네바 회의 참석기

제네바 회의 참석기

2001년 6월 5일부터 8일까지 스위스 제네바 존 녹스센터에서 “재 유럽한인교회 선교협력 증진을 위한 협의회”가 열렸다. 이번 협의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선교와 일치국, 존녹스 센터 그리고 유럽교회협의회의 공동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 대표, 미국장로교 한인대표, 재일대한 기독교회 한인대표, 한국의 각 교단 대표들 그리고 유럽의 한인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는 유럽교회의 대표 등 총 55명이 참가하였다. 슈토렉 목사와 나는 체코개혁교회협의회의 추천으로 이 회의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게 되었다.

이번 협의회는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유럽교회들과 일치하여 21세기에 유럽에서 복음을 함께 증언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유럽의 한인교회 역사는 50년이 넘었지만 이번 회의는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처음으로 유럽교회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새벽기도회, 예배, 오전 패널토의, 오후 그룹토의, 전체토의의 회의순서가 매일 반복되었다. 패널토의는 유럽의 한인교회대표들이 각각 자신의 교단의 유럽이주 역사와 현재 상황을 설명과 미국 한인교회와 일본의 한인교회들이 각각 미국교회와 일본교회들과의 일치와 협력에 대한 경험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두개의 한인교회들의 경험은 이번 협의회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 매우 중요한 사례보고였다. 사례보고는 배당된 시간 안에 한 체코 교회일치의 과정에서 느낀 체코교회의 경험을 더 자세히 듣는 기회가 되도록 슈토렉 목사가 발제를 주로하였다. 회의는 한국어 영어와 독일어를 사용하였다.

이번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였던 두 교회 가운데 하나는 우리 디아코니아 자동차 구입에 함께한 스톡홀름의 임마누엘 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 꼬빌리시 교회였다.

이번 회의를 통해 교회론적 선교론적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교회되게하는 비젼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도전은 이민과 다인종 공동체의 현장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민 공동체가 이민교회들을 향한 유럽교회의 정책은 무엇인가? 유럽교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민족 형제 자매들에게 어떤 종류의 환영을 하고 있는가? 한인교회와 유럽교회가 선교적 과제를 공유할 수 있을까? 유럽 기독교인들과 한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유럽사회 안에서의 도전들은 무엇인가? 유럽 내에 현존하는 한인 기독교인들의 현존이 다른 이민 공동체들의 현존과 선교적으로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제기되는 질문에 체코교회와 한국교회가 함께 걸어가는 꼬빌리시 교회는 이미 많은 응답을 하고 있다. 특히 꼬빌리시 교회는 “파트너십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이다.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적인 관계의 교회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이번 회의가 던진 많은 질문들은 동시에 앞으로 우리 꼬빌리시 교회가 걸어가야할 길을 보여주고있다. 이 질문들은 우리를 더욱 본질적인 교회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몸이 불편한 슈토렉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로 편히 다녀왔다. 회의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것인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돌아왔다.

회의는 한인교회와 유럽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음 회의 계획과 준비권한을 위임하고 마쳤다. 9월에 모인 추진위원회에서 일년에 두 차례 소식지 발간과 스톡홀름의 임마누엘 교회와 프라하의 꼬빌리시 교회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 그리고 회의의 공식적인 이름을 “Korean Churches Together in Europe” 그리고 2003년에 “신앙 축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세례 요한의 질문

  • 연합 예배 (2001년 12월 02일)
  • 마 11:2-6
  • 설교자: 이종실

스믈네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일: 대강절 첫번째 주일
본문: 마태복음 11장 2-6절
설교: 이 종 실 목사

<본문> 

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설교>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어 질문하게 합니다. 대강절 첫번째 주일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의 질문은 당신은 나보다 더 위대한
분이십니까?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 질문을 했을까요? 의심때문입니까?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이 보냈을 사람에 의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기를 희망했을는지 모릅니다. 요한은 둘은 같은 주인을 위해 일한다는 사인을 예수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습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룸발이가 걷고 문둥병이 깨끗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들 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는 옛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증거를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감옥으로부터 풀어줄 것을 언질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로 요한은 희망을 갖게될 것입니다.

소경이 보고 절룸발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치유되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을 선포하는 이사야 35장을 인용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복된 소식을 말하는 이사야 61장을 예수님은 인용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가 나를 보내심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의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사야 42장을 인용한 것도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는 갇힌 자를 옥에서 풀어주는것에 대해 말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유함과 해방이 온다는 말을 하지않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있습니다. 그의 소명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설교와 세례로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길을 죽음으로 준비해됩니다.


한은 세상의 권력자의 손에 죽음으로써 예수의 길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의 계획 요한의 갈망 요한의 꿈들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갈망 하나님의 꿈이
실현될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여기 모든 사람들의 큰 적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옥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꿈과 계획의 끝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기다리며 사라진 우리의 희망과 꿈과
함께 우리 자신의 감옥에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있습니다. 불행할때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좋지않는 일들은 행복할 때에 우리들이 저질렀던
잘못에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 가졌던 자신들의 경험들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경향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복할때가 좋지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건강 소유 행복 그리고 평화 이것들은 좋은것이며 필요한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단지
감사하는 믿음을 우리는 배워야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현존과 동등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에게 문제는 우리가 이들을 가지고 있지않을 때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소유하고 싶어
만족하지 못하고 슬퍼함으로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가 좋았던 그 시절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별로 편안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존재하심을 믿는 것을 배웁시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음을 듣는 한에서 우리는 행과 불행의 어떤 상황에소도 하나님의 현존을 확신하게 될것입니다.

요한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이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여러분과 제가 원치않고 기대하지 않아도 오고 계십니다.
아멘

사이비 종교에 대한 체코의 법적용의 예

법원이 샤만(shaman)을 정신병 치료명령

지난 6월 38명이 음독을 시도한 명상집회의 지도자 뻬뜨르 호보뜨가 12월에 보흐니쩨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11월 28일 프라하 지방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정신병 의사들이 호보뜨의 건강상태 검사 결과에 의해 결정을 하였다. 지난 3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상태가 좋아졌다고 정신병 의사들이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의사들은 뻬뜨르 호보뜨가 석방되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를 권면하였다.

호보뜨는 6월에 프라하 찰스대학 체육학부 강당에서 “원시림의 마법사들의 자유하는 자기 체면술”의 명상을 참석자들에게 “자기 자각과 명석몽-꿈을 꿀 때 어느정도 자각을 하는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그 명상을 돕기위해 참석자들에게 페루산 마약 종류의 차 Ayahuyasca를 준비하였다. 차를 마신후 물론 약속된 의식의 “높은”단계 대신에 몇 몇 사람들이 혼수상태가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음독으로 이상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당시 구호대원 가운데 한사람이 말했다.

참석자에게 명상 참가비로 1600꼬룬-2000꼬룬을 받은 호보뜨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샤만의 인쇄화된 교리가 없는 것을 비난 받게된 것이다. 왜냐하면 샤만은 자신이 시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전문가 뻬뜨르 리들이 말했다. 후에 분석가들이 차의 성분에 높은 환각상태를 유발해서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아트로핀, 스코폴라민과 독이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에서 누구도 죽지않았다. 뻬뜨르 호보뜨는 10-20년 형이 가능한 독극물 사용법 위반과 공공사회의 위협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8월말 조사를 끝낸 것은 검사들에 의하면 당시 호보뜨는 처벌을 받을 수 없었다. 조사 이전에 정신적인 조사에서 뻬뜨르 호보뜨는 심각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였다.

11월 28일 프라하 지방법원의 배심원 재판관 하나 후바츠꼬바가 전문가들의 의견서를 검토하였다. “수감 치료 결정은 호보뜨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법에 저촉되지않는다. 건강상태가 바뀌고 긍정적으로 호전되는 경우 치료 의사가 법원에 알려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재판관이 말했다.

호보뜨와 그의 변호사는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처벌을 받은 사람은 죄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것은 단지 불행한 사고였다. 몇차례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한 어린 시절부터 우주적인 비젼을 경험한것과 관련해서 어쩌면 나는 미쳤다. 부처나 예수의 미친 것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보뜨가 말했다.

체코에서의 자녀교육

자녀 교육을 함께 생각합시다

 

들어가는 말

해외에서 자녀들의 교육문제는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하다. 특히 체코에서는 자녀들을 영어교육이 가능한 학교에 보내거나 아니면 체코학교에 보내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부모들 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교육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한번쯤 토론의 여지가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토론은 이 글에서 피하기로 하고 오늘은 자녀를 체코학교에서 교육을 시킬 때 부딪치는 교육적인 문제를 생각나는 대로 일단 세가지를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교육철학 부재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해외에 나오면 제일먼저 다가오는 문제가 자녀교육이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서 해외 이민의 주요 이유가 자녀들의 교육이라고 한다. 자녀들에게 영어나 다른 세계적인 언어를 어려서부터 익힐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은 부모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마음만으로 해외 이주를 결정하기는 쉽지않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중요한 동기는 한국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 학교교육과 국가의 교육정책을 불신하는 부모들이 해외에서 자녀들에게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대체 교육기관이지만 우리 부모들 역시 해외의 자녀교육에 대한 교육철학은 물론 정보와 준비가 잘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에서 교육한 자녀들의 막연한 성공사례들을 가지고 내 자녀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의 입장에서 학업의 어려움들을 부모들이 지나쳐 버리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교육이란 단지 언어의 학습만이 아니다. 인성교육과 민족과 국가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일까지 포함된다. 부모가 자녀들의 올바른 가치관을 지도 하기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자문을 해보면 문제의 심각성은 그대로 드러날것이다. 자녀들이 겪는 문화충격이 무엇이며, 사춘기의 아이의 특징이 무엇이며, 사춘기의 특성들이 타문화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타문화 속에서 아이들의 가치관, 사회성, 국가관 그리고 민족관의 형성 등 어느 하나 부모들이 연구와 고민없이 대답 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둘째, 체코어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심리적인 충격

자녀의 입장에서 일단 언어의 문제이다. 언어습득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은 성인들 보다 외국말을 빨리 배우겠지만, 아이들의 언어습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인차, 연령의 차, 학습환경 등을 전혀 고려하지않고 어린아이들은 외국말을 빨리 배운다는 신화를 부모들은 경전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영어나 독어 불어와 같은 세계언어가 아닌 체코어를 습득하는데는 문제가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영어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 부모는 아이의 학습을 어느정도 도움을 주며 지도할 수 있다. 이것은 낯선 언어를 배우는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아이의 학습효과는 그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체코어로 학업을 하는 아이들의 경우 심리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부모들이 체코어를 함께 공부하지 않을경우 아이들은 체코어로 공부해야되는 이유를 찾기 힘들다. 더구나 또래 아이들이 영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다니는 경우 세계적인 언어를 배우는 것을 제쳐두고 소수민족의 언어를 배우는데서 오는 열등의식을 가질 수 있다. 체코어로 공부해야되는 당위성과 분명한 목표가 아이에게 제시되지 않으면 체코어로 공부하는것에 흥미를 잃게될것이다.


셋째, 체코학교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

체코의 한인 이주 역사가 일천하여 체코학교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제한 되어있다.
복잡한 체코학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한글자료가 아직 구비되어있지않다. 5년제 초등학교와 9년제 초등학교 그리고 4년제 김나지움(고등학교)과 8년제 김나지움, 사립학교와 국립학교의 차이,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립학교들의 종류, 사립학교의 단점과 장점, 아이의 장점을 조기에 발굴하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특별 활동 학교들, 그 학교를 이용하는 방법, 예술과 체육계통의 초등학교와 김나지움의 종류, 입학방법, 다양한 특성을 가진 국립 초등학교들, 이공계열과 사회과학계열 그리고 계열 구분이 없는 김나지움의 구분의 기준과 그 특성들, 김나지움 입학전형 방법, 아카데미로 불리우는 전문학교들, 특별한 분야들을 전공을 하는 중등학교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학교를 선정하는 방법은 물론 처음 체코에 왔을 때 학교에 입학시키는 방법, 체코학교들의 교육철학과 방법에 대한 이해,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측정하는 방법, 학생의 학교생활 태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체코학교의 규칙들, 초기에 체코어를 지도하는 하는 방법, 학업을 지도하는 방법, 외국학생들에 대한 학교법 등 기초적인 학교정보는 물론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마저 모두 개인화되고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나가는 말

체코학교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는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을 돕기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은 체코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부모들이 만나서 자녀들의 경험과 어려움들을 가감없이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 돕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 문화속에서의 자녀 교육에 대해 함께 지혜를 모으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자녀들이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한국의 유수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일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교육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또한 잊어서는 안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