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법, 교회의 사회선교기관 위기

교회의 봉사기관의 미래에 대한 염려

10여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 아니면 휠체어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돕고있는 디아코니아(주: 개혁교회 사회선교기관)와 카톨릭 charita(주: 카톨릭 사회선교기관)들이 존재에 대해 염려하고있다. 다음주에 다시 의원들이 동의할 교회에 대한 새로운 법이 이러한 염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회의 사회 선교 단체들 대표들은 새로운 법이 그들의 다른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체코 카톨릭 charita와 개혁교회의 디아코이나들은 체코 공화국에서 사회봉사의 가장 큰 단체들이다. 만 여명의 환자들 수용이 가능한 약 300개 이상의 전문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브르노 끄로보우까흐의 베뜰렘의 책임자 뻬뜨르 헤일이 말했다.

그들에 따르면 고민거리는 법을 작성한 문화부가 사회선교기관이 시민조합(주: 일반 시민 단체들의 비영리법인체) 또는 일반적인 이익기관으로 변경할 것을 강요하는데 있다. “그것은 우리 베뜰렘을 포함해서 많은 시설들의 실질적인 폐쇄를 의미할 수 있다.”고 헤일은 주장했다.

만약에 의원들이 법을 바꾸지않는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charita와 디아코이니아들은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될것이고 법적인 연관성은 취소될것이다. 그것은 재산의 변경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새롭게 조직된 기관은 모금 문제를 예상할 수 있다.

체코 카톨릭 charita 총무 야로슬라브 꼬프지바는 헤일의 견해에 동의하고있다. 원래 새로운 법은 교회의 등록에 적용되었지 이렇게 변경되지않았다. “현재 상태가 우리들에게 도움이 된다.” 꼬프지바가 덧붙였다.

교회를 위한 법에 대해 몇 년간 논의하였으며 9월에 의회는 최종적으로 그것을 동의하였다 – 특별히 사민당과 시민당의 동의 덕분이었다. 단지 상원이 그것을 몇 달뒤에 거부하였고 그래서 의원들은 다시 결정할 예정이다. “이전에 그것에 대해 의논을 했는데 교회들이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9월에 찬성한 시민당 마렉 벤다 의원이 말했다.

교회들이 그 법에 반대하고 있다. – 누구도 우리들과 함께 법안 동의 이전에 의논하지않았다. 체코 비숍회의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은 교회의 문제를 교회가 결정하도록 하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 교회 담당부서 책임자 야나 제뽀바는 그에 대해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교회의 대표들이 금년에 최소한 7번 법 제안을 받았었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법은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하고있다.” 주장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설명하길 원치 않았다. 교회의 사회선교 기관들이 위협 받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 거부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교회 봉사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18일)
  • 빌 2:5-11
  • 설교자: 이종실

01/11/18 (삼위일체 후 스물 세번째 주일)

설교본문: 빌립보서 2장 5-11절
설교제목: 봉사와 그리스도의 마음

<공동기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봉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겸손을 간직하여
세상 속에서 주의 영광을 들어내는 교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너
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헤 뛰어난 이름으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교>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 그의 두 손에 빌립보 교우들이 보내온 헌금이 들려있습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헌금을 해서 에바브로디도 인편에 보냈습니다. 편지 속에는 빌립보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와
사랑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더구나 헌금을 보내온 그들의 처지가 편안하고 모든 일들이 잘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더욱 눈물겨웠습니다. 1장 28절과 29절은 빌립보 교우들의 상황을 가늠케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두절의 말씀 속에서 빌립보 교회는 대적자들의 박해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갓 태어난 어린 교회가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는 그 모습이 사도 바울을 감동시켰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2장 17절)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좀
더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 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이 진하게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얼마 전에 비디오로 “친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조직 폭력배들 사이에 일어나는 가슴 찡한 의리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술과 담배를 하는 일탈행위가 그들을 더욱 끈끈한 친구 관계로 형성시켜갑니다.
그들은 학교라는 집단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친구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폭력조직이라는 어두운 세계였습니다. 감옥을 드나들다가 결국 무서운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은 자신들만의 결속력이 있습니다. 마치 자폐증 환자들처럼 외부와 단절하고 자기집단의 만남과 즐거움만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 집단이라면 우리들은 이들을 이단종파라고 합니다.


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이 서로 나누는 심금을 울리는 오늘의 이야기는 그들의 대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마치 이단 사이비 종파
아니면 사회의 암적 존재인 마피아 같은 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조직폭력배의 의리를 다룬 “친구” 영화장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정통 유대주의 종교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세상 권력이 세례요한과 예수를 처형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이미 불법단체 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지금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확신의 근거를  우리들은 오늘 본문 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의 단체와 세상의 모임과 다릅니다.

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구성원들이 다릅니다. 그리고 정말 다른 것은 세상의 단체와 모임이 알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의
활동이 교회에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교회를 세웠기에 그는 고난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의 터를 상실할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세상을 부패 시키는 존재로 변해버립니다. 그런데 사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막기위해 교회를 인간들의 마음의 터 위로 옮겨 놓으려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과 생각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분쟁과 논쟁이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 교회가 다름 아닌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던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자 빌립보 교회가 겁 없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일부가  “바울, 당신이 없어도 우리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이렇게 과시하기 위해서 열심을 냈습니다. 그들
생각에 자신들이 일을 잘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한 기득권 상실을 염려해서 옥중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빌립보서 1장 15-17절의 말씀입니다.       

주를 위해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남을 말씀으로 친절하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돕는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하는 마음,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마음, 결국 자기 실속을 차리기 위한 마음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러한 이기적이고 인간된 마음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권면을 한 것
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 지역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더 효과적인 교회 성장을
위한 방법, 복음전도의 방법과 같은 설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10월 마지막 주 루터의 종교개혁일을 기념하는 개혁주일 예배 같은
프로그램을 제시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거창한 구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관심을 우리들 중심에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과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우리들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말합니다. 

“너
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예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마음처럼
그렇게 하라”고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생각을 그대로 우리들의 마음으로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6절
이하 1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비천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위해 대신 고생하시고 죽으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그분의
사랑 그분의 낮아짐 그분의 겸손을 제대로 우리들이 안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 앞에서도 거만과 교만을 떨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요즈음 제가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다시 붙잡은 말씀입니다.


코 교회들을 분주히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경험을 소개하고 체코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어 선교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직접
간접적으로 돕는 일과  한인교우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과 체코교회를 연구하는 일 세가지를 모두 함께 감당하기 어려워 금년 4월에
연구하는 일을 잠시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으로 교회를 방문하고 목회자를 만나며 협의하던 일들을 가급적 자제하고 대신 총회의
전도부 교육부 선교부(이곳에서는 해외교회협력부) 세 부서의 회의에 참석을 하며 전국 교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년한해 한인교우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들과 저의 체코교회 프로그램을 가급적 일치 시켜 볼 수 있을 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수년동안 정성을 드리며 조금씩 조금씩 교회를 바꾸어가던 쁠젠 오픈 하우스 선교 프로그램을 한인 공동체와 접목시켜
보려던 시도가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체코교회에 의해 좌절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꼬빌리시 교회에서의 목회도 단지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일 뿐 아니라 우리들의 기독교인의 삶을 체코교회를 위한 선교자원화 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언제나 체코교회와
한국교회의 큰 차이를 늘 실감하며 그 간격을 메꾸고 접촉 점을 찾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어야 했습니다.


편 선교하는 일로 목회가 태만해서 안 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심방을 하거나 교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앞에서 더 겸손하고, 여러분들을 더 섬기고 더 사랑하려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목회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맡겨주신 양들을 사랑하는 진실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증인이되신다.” 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다다르기 까지 저는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완성되고 완전한
저의 모습 보다도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늘 노력하는 저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한해동안 제게 허물과 잘못과 부족한
점이 드러난 것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생각하지 말고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그 모습들을 감사히 생각하며 격려와 사랑을 나눕시다.
 


별히 오늘은 두 해 동안 우리 공동체를 위해 궂은 일들을 기꺼이 맡아 수고하신 총무님과 서기님이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분들이
선출되는 날입니다. 비단 두 분만이 아니라 한해동안 수고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반주로, 성경교사로, 회계 보는 일로, 주보
만드는 일, 매주일 교회당 청소와 설거지 그리고 게으름이 피워지는 주말 – 토요일 아니면 주일날 새벽같이 장을 보거나 손수 장만을
하는 한 달에 한번 돌아오는 간식 준비하는 일, 교회관리와 예배 안내를 맡아 수고하는 집사님들의 봉사로 모든 교우들이 금년한해
수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를 우리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을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는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단지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것임을 저와 여러분이 잊지
맙시다. 금년과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기도와 말씀공부와 봉사 이 세가지가 우리 교우들의 습관으로 정착 되었으면 하는 목회자의 바람이
있습니다. 특히 봉사는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며 몸으로 읽는 성경입니다. 봉사는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더 깊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우리는 말씀과 자신을 대면 시키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년에도 조그마한
봉사라도 맡아 주실 것을 당부 드리며 아울러 여러분들의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이 우리 공동체뿐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그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는 오늘 본문의 6절 말씀을 1400년대 체코
종교 개혁파들이 어떻게 이해 하였는지 소개를 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씀을 당시 체코 종교 개혁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부패한 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와 섬김은 우리 자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봉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체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 위에 우리 교회는 든든히 서갈 줄 믿습니다.

<설교 후 기도>

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위에 교회의 터를 세우지 않으면 교회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 처럼 되어 버림을 받게될 것을
압니다. 교회를 교회되게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신 우리
주님의 겸손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겸손이 우리들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으로 간직되길 원합니다. 그 주님의 겸손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의 겸손으로 부패한 교인과 부패한 교회가 되지않도록 저희들을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보흐니체 병원선교를 위한 바자회

바자회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12월 1일 오후2-4시까지입니다. 디아코니아 봉사자 훈련일정과 겹쳐 시간조정을 했습니다. 시작은 오후 2시이지만 지하 식당에서 음식바자는 늦어도 1시 30분 부터는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바자회를 계획하게된것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교우여러분들의 성원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 일은 장기적인 입원으로 가족도 돌보지 않는 보흐니체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성탄절의 사랑으로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것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우리 꼬빌리시교회의 수고가 있었기에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병원에 조금씩 교회의 공간을 열어가게 된것입니다.

우리 한인교우들이 기도와 할 수 있는 일들로 섬긴다면 더 아름다운 복음의 결실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번 바자회는 지난번과 달리 음식바자회로 준비됩니다. 체코교우들도 전통 후식을 집에서 직접만들어 올것입니다. 우리한인교우들은 만두 김밥 잡채 식혜 전통차 등을 준비할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시회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체코교우들은 체코 기독교인들의 삶을 우리 한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족사진들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한인들도 한국 기독교인의 삶이나 한국을 소개할 수 있는 가족사진을 모아 전시하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각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국을 알릴만한 모든 물건들을 전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또는 전통물건등… 그리고 교회사진, 주보, 설교테이프, 비디오, 신문 한국성경, 찬송가, 성경공부 교재, 구역공과등 모든것 환영합니다. 전시후 돌려드리겠습니다.

전시회와 함께 한국의 전통 놀이도 선을 뵈려고 합니다. 이번 바자회 준비를 위해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분들은 강동주 총무에게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교우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바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기에 먼저 준비하는 우리 자신들이 은혜가 넘쳐야 겠습니다. 그리고 보흐니체 장기 입원환자들을 위해서 체코교회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1년 11월 설문조사

* 아래의 설문은 교회의 소식지 Terasa 특집으로 준비된 것입니다. 질문은 베셀리 장로님이 만든것으로 앞으로 전교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의견을 모으려고 합니다.

야곱의 사다리교회(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별명)에서 한달에 한번씩 한국형제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지 일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이번호 Terasa는 이런 만남을 두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즐기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작은 설문을 준비했습니다.

다음의 질문들을 선택하였습니다.
1. 에큐메니칼 예배가 특별하고 신비로운것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한국 형제 자매들이 꼬빌리시 교회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조 하웁또바 박사님
1. 일년이 훨씬 지난 지금 신비로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때가 아닌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예배는 우리들에게 또 그들에게도 용기와 기여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겉 모습의 차이를 느끼지 않는 것 같고 우리들을 연결하는 특징을 찾는것 같습니다.
2. 언어의 장벽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꼬빌리시에서 열렸던 바자회나 쥐시꼬브에서 개장한 한인식당 그 외 모든 이벤트가 맘에 들었습니다.

바라 드로빅꼬바
1. 가끔은 예배의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예배의 내용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확하지 않은 설교의 번역, 통역기의 사용입니다. 그리고 공동 찬송가도 그 수를 더 늘였으면 좋겠습니다.
2. 공동으로 생활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겉 모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동체 생활을 볼때 참 용기가 납니다.

남유정
1. 제가 생각하기에 조금 더 예배가 기운차고 즐겁고 교인들이 활기차게 예배에 참석해서 우리안에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 좋겠지만 이 예배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게신다고 믿습니다.
2. 우리가 이렇게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제 자신에게는 큰 경험입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한 사람입니다.

온드지흐 뚜렉
1. 지금은 그렇게 특별하고 신비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2. 이 질문은 목사님과 당회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이현우
1. 공동예배가 신비롭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하고 재미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런 좋은 관계가 오래 지속되길 바랍니다.

토마쉬 드로빅
1. 신비스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배 평가와 어떻게 더 잘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빠졌습니다.
2. 당연히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교제가 없었고 실천적인 측면만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교회적으로 신학적인 깊이가 없었습니다.

라디에 윤꼬바
1. 아주 정상적입니다. 오늘 저는 한국어 찬양도 불렀습니다. 그들의 참석은 예배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찬양을 잘 합니다.
2. 그들은 따뜻하고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찬 때 눈으로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11일)
  • 왕하 5:9-15a
  • 설교자: 이종실

01/11/11 (삼위일체 후 스물 두 번째 주일)

본문: 열왕기하 5장 9-15절 상반절
제목: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공동기도>

우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번지
작은 일이 주의 은혜를 여는 열쇠이오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본문>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멕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햐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니이다…”

<설교>

오늘 아침 저희들은 엘리사와 나아만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제2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이었고 왕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었고 그의 생각은 곧
왕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눈이요 귀요 입이었습니다. 절대 권력를 가진 사람 나아만이 불치의 병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구약 시대에 문둥병은 질병가운데 가장 두려운것이었습니다. 다른 전염성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그 질병으로 나아만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잃게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나아만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계집 종의 조언에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은 전쟁포로, 그
중에서도 계집아이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과 전쟁 포로인 노예 계집아이 이 둘의 만남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시 중근동 지역을 주름잡던 강대국의 왕의 군대장관에게 전쟁포로 노예 계집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불행한 나아만일 지라도 하찮은 계집아이의 말 하나쯤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불행한 삶에서 행복한 삶에로의 전환점에 이 하찮은 계집아이가 있음을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 다. 

하찮아 보이는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인생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즈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교우님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에 영주하시는 어떤 분이 1989년 체코개방 직후 자신은 체코가 마치 전쟁 후 복구사회처럼 많은 특수가 있어 빨리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체코 사회에서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 대신에 작은
일, 궂은 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둥병에 걸린 나아만은 자신의 노예 계집아이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습니다. 계집 종의 말을 믿고 왕의 허락까지 받은 나아만은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해 떠납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도달하였습니다. 자신의
심복 나아만의 질병을 치유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아람 왕의 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두려워 떱니다. 이스라엘 왕도 두려워 떠는
아람 왕의 친서와 군대장관이 도착했는데도 엘리사는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나아만과 그리고 함께 온 병사들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먼길을 찾아온 환자이자 세계의 권력자를 자기 집 문앞에 세워둔 채 엘리사는 얼굴도 보이지않고 사람을 보내
처방전을 보냅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엘리사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만약에 나아만 대신 그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이 있었다면 우리도 나아만
처럼 매우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좋은 의사란 좋은 처방보다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의
태도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 때문에 나아만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마음으로 모든 자존심을 꺽고 엘리사에게 희망을 걸고 왔습니다. 엘리사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나아만의 속마음을 들여 다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11절 12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이스라엘 왕도 벌벌 떠는 세계의 권력자가 엘리사를 아람으로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직접 찾아나선것은 의사 엘리사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삼아 이스라엘과 아람의 국제관계를
강화하여 양 국가간의 불가침 조약과 포로들의 귀환협상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은 최소한 성전이나 아니면 자신이 거처하는
왕실로 엘리사를 불러 거기에 나아만을 위한 진료실을 만들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말은 없었지만 나아만은 속으로 그 정도
기대했겠지만 그것 마저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엘리사의 오만함 때문에 참았던 화가 폭발했습니다.
나아만은 속마음을 토해냈습니다.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극진히 치료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그만한 예를
보였으니 엘리사가 응당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의 처방에도 불만이 있었습니다. 환자가
의사의 진료와 처방까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욕창이 덧난 곳에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나아만의 속마음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기독
교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가 이땅에 널리 퍼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 마음은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훌륭한 신앙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집사 직이나 장로 직에 발탁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봉투에
적힌 이름이 강단에서 불려지거나 주보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교회 봉사에 공짜가 없습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무언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위치와 영향력을 교회 안에서 세우려고 합니다.

나아만의 겸손 뒤에 감추어진 문둥병을 치유 받는 것 이상의 기대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 뒤에 감추어진 우리들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진심으로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인생의 전환을 기대한다면 바로 신앙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욕심에 찬 우리들의 속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경험이 더 돋보이는 교만과 싸우는 시간입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강물이 더러운
요단강이 될수 있다면, 수질도 더 좋고 풍경도 더 아름다운 자신의 경험 다멕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들이 치유에 더 효험이 있어
보였습니다. 고백은 이러한 자기의 주장을 진심으로 꺽고 예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게 만드는 사탄의 시험에 맞서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분이 난 나아만은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합니다.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납니다.”  혈기는 그 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이 찰나의 시간에 뜻하지 않은 나아만의 종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다시말해
“예언자가 당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했으면 당신은 떠나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았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크
고 중요한일도 한 내가 이 작은 일이야 못할리 없지” 생각한 나아만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냥
돌아가느니 엘리사 선지자가 처방한 대로 해보고 안되면 빌미를 잡아 분풀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으로
내려가서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아만은 영웅입니다. 조그마한일 사소한일 쉬운일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일은 그의 주위에 있는 종들이하는 일입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만 나서서 영웅적으로 해결하던 나아만이었습니다.


회 공동체 안에는 이처럼 영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고 큰 헌신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영웅적인 일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신자들입니다. 이것이 생의 변화의 장애물이 되는것입니다. 나아만의 인생의
문제해결의 전환점은 영웅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소한 조그마한 일이었습니다.

금년 한해동안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목회자가 안내한 일이 영웅적인 헌신과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습니다. 먼저 개인의 신앙성장을 위해
“하루 한 장 성경 읽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두번째로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훈련으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말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하지 않고, 자발적인 봉사생활을 하시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로 집사로
봉사하는 분들은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하나씩 맡았습니다.

영웅적인 헌신과 용기는 마치 우주선을 궤도에 올려놓는
추진연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궤도에 올라가면 이 추진연료는 필요가 없습니다. 늘 똑 같은 궤도를 일상적으로
똑같이 반복해서 돌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충성심이 우주선에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 우주선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똑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유 받기 위해 일곱번을 강물 속에 드나드는 나아만의
목욕과 같습니다. 일곱번은 단지 숫자의 개념만으로 이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7은 완성된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이란
숫자는 인내를 필요로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속으로 들어갑니다.
한번…!! 물 밖으로 나와 물에 젖어 더 선명해진 곪은 상처들이 보입니다. 어떤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이 그대로 있습니다.
나아만이 두번째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립니다. 그래 두고보자 7번 들어갔다 나와도 몸에 병이 낫지않기만 한다면 그대로
두지않을것이다. 혼자 중얼거렸을것입니다.

두번…!! 두번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세번…!! 네번…!! 요단강에 들어갔지만 아직 병의 차도가 없습니다. 그는 더욱 분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멈추어버릴까?”  “미친 예언자의 말을 듣고 나만 우스운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 전에 당장 지금 나가 그 예언자를
끌어내 처단해 버릴까?”  “바보 같은 짓 지금 당장 그만둘까?”  화가 치밀고 이미 물속에 들어간 자신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지위도 체면도 사라져 버리고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자신이 느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칩니다. “그만두자! 이거 다
미친짓이다! 나는 여기서 더 우스운 꼴 당하고 싶지않다. 집에서 치료받겠다.”  그러나 종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예언자가
당신께 일곱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격분한 마음에 물속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이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다섯번…!!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불평을 하며 여섯번째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요단강의 더러운 물 때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일곱번 다 채워주지 만약에 낫지않기만 해봐라 엘리사 내 너를 가차없이 처형할거다.” 아마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곱번…!! 마지막으로 물속에 들어갔던 나아만이 서서히 걸어서 강언덕으로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얼굴은 혈기 돋은
표정으로 붉게 물든채 일그러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하찮은 일, 조그마한 일, 권태가 날만한
일상적인 일, 나를 바보처럼 만드는 일, 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일 그러면서도 반복적으로 해야되는 일들이 오늘 나아만의 인생의
전환점의 표시들입니다. 질병에서 치유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화하는 삶의 키워드가 되고있습니다.

일곱번째 물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그의 팔을 보았습니다. 물집이 사라졌습니다. 물밖으로나와 자신의 다리를 봅니다. 종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봅니다. 그의 종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이 다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깨끗게하심과 거룩하심의 방법을 처음 발견하게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여종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자신의 종을 통해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치유받았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몸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자만심을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혈기를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심을 꺽으셨습니다.
나아만의 인생에 혁명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이방인이 유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15절 이하 에서 나아만의 언어와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오만과 교만이 진심으로 겸손한 품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도 똑같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찮고 사소하고 작은 일에 대한 충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는 영웅적이고 심각한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작은 일 보잘 것 없는 일들을 일상생활처럼 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요단강에 우리자신을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가끔 우리는 생의 문제들을 복잡하게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냥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라는 예언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우리들의 생의 문제는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설교 후 기도>

나님 아버지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금년한해 저희들이 작은 일에 충성된 일꾼들이었는지요?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영웅적인 헌신이 아니라 노예 계집아이처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않고 귀를 기울이고 그 작은 일을
변함없이 꾸준히 하는 그 충성심이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속에서 해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의 교만을 꺽으시고 우리의 혈기를 꺽으시고 우리의 의심을 꺽어주셔서 우리들의 삶의
혁명적인 변화가 있게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