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루치에 빌라(Lucie Bila)의 이혼

나눔터 제 7 호 (2000년 6월 4일 발행)
[살며 생각하며] 루치에 빌라(Lucie Bila)의 이혼과 창세기(創世記)의 남자와 여자

사민당(ODS) 당수이자 이전 수상이었던 클라우스의 친구로 그리고 체코의 유명한 가수로 이름이 난 루찌에 빌라의 이혼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세간(世間)의 관심은 이혼 후 그녀의 삶이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예바니(Jevany)에 있는 호화빌라의 소유문제이다.

그녀의 호화빌라 소유 문제에 쏠린 세간의 관심은 단지 “선데이 서울” 수준이 아니다. 1989년 체코민주혁명 이후 10년 사이에 나타난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가 “이혼 후 부부재산 분배 문제”이다. 다시 말해 루찌에 빌라의 호화빌라에 쏠린 관심은 1989년 이후 대체로 사회의 부유한 사업가 계층들이 이혼으로 인한 부부 재산 분배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이혼 부부의 재산 분배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8년 가족법을 손질하여 결혼할 때 ‘재산분배협정’에 대해 법으로 규정하였다. 법문의 자의(字意)에 따르면 부부 각각은 생활 가구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절반씩 나누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법 적용의 실제는 불가능하고 대체로 부부가 이혼할 때 주로 자녀양육의 문제와 결부하여 재산분배를 협의해서 결정을 한다. 그러나 이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몇 년씩 논쟁이 지속되기도 한다. 부동산뿐 아니라 자동차, 가전제품, 가구의 분배문제는 실제로 더욱 어렵다. 실례로 심지어 침대 하나를 놓고 심각하게 논쟁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오랫동안 이혼 논쟁이 지속되면 동산(動産) 배분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가족법의 실제 적용에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불행한 부부관계가 발생할 경우 다른 가족들을 보호하고, 특히 이혼 전에 의도적으로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경우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가족상담 전문가들은 결혼할 때 재산분배협정을 권면하고 있다.

법 제정으로 부부문제를 대응하는 방식은 마치 환부를 도려내어 고통을 없애려는 서양의술의 사공방식에 준 한다. 결혼할 때 재산분배협정을 하는 법은 체코의 전통도 아니고 인류 문명의 전통도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현상을 “돈이 삶의 가치에 첫 번째 자리에 차지한 결과”라고 설명해 버리기는 삭막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창세기가 묘사하는 남자와 여자는 둘이면서도 하나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둘은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남자와 여자의 근원에는 구분이 없다. 이것을 창세기는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남자 없는 여자, 여자 없는 남자를 언급할 수 없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존재할 수 없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존재할 수 없게 빛과 어둠은 구별이 되지만, 빛 없이 어둠이 어둠 없이 빛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은 둥근 지구의 절반씩 번갈아 교대로 차지하며 공존하고 있듯이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그렇다. 충돌과 대립과 정복이 아닌 공존과 조화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동족상잔의 잔인한 전쟁의 기억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6월에 아이러니하게 남북정상들의 만남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다. 공존과 조화로 ‘한 몸’을 이루는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처럼, 대립과 경쟁과 정복이 아니라 상호 보충과 조화의 길을 열어 가는 통일운동이 우리들의 가슴에 우리들의 삶에 뿌리 내리길 간절히 기도한다. 

[살며 생각하며] 체코 히틀러, 서울 신촌 히틀러

나눔터 제 6 호 (2000년 5월 7일 발행)

    최근 체코 국민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히틀러와 관련된 몇 가지 소식이다. 그 중 하나가 전쟁보상금 문제이다. 냉전종식 후 체코를 포함한 동유럽국가들이 독일과 전쟁보상문제 중 하나에 합의하였다.

    전쟁포로들의 강제노역에 대한 배상금의 합의이다. 1인당 보상금 1,500마르크로 계산해서 체코에 지불될 배상금은 4억 2천 3백만 마르크라고 한다. 이 보상금을 둘러싸고 일부에서는 물의까지 빚어지고 있고 인간의 고통을 보상금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다른 하나는 체코어판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 출판에 대한 문제이다. 초판 6천권이 서점가에 배포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다시 이판 인쇄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계기로 이 책에 대한 판매 금지와 찬성에 대한 진지하고 뜨거운 논쟁이 신문지상과 방송을 통해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하나의 주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는 히틀러와 관련된 체코 국내 소식을 비집고 대한민국 서울 신촌의 한 레스토랑이 나찌의 상징물들로 내부를 장식했다는 보도가 경박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이 보도가 전해지자마자 항의성(?)을 담은 한국 뉴스 전달자들(체코 친구들)이 어김없이 찾아오거나 안부를 묻는 핑계로 전화를 해서 정중히 뉴스를 내게 전해 주었다.

    가십 기사와도 같은 하나의 소식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산 자여 따르라!”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 더욱 생생해지는 이 5월에 우리들의 자신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자세가 결국 남의 역사까지도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 본 것이다.

    5.18 광주항쟁을 비롯해서 가까운 우리의 현대사를 둘러볼 때 일제의 식민지 통치, 미군정 3년, 신탁논쟁, 남북분단, 한국전쟁, 4.19 혁명에 이르기까지 어느 역사를 우리는 국민의 공감대 속에서 히틀러의 역사를 끝까지 규명하고 진실을 세우는 유대인들처럼 노력을 하였는가?

    히틀러가 죽은 지 55년이 되었지만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즘과 대량학살이 세속사회뿐 아니라 유럽 기독교회에 던진 정신적인 충격은 아직도 지대하다. 세속사회는 파시즘에 의한 전쟁과 대량학살의 비극을 히틀러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 내포한 허구성에까지 그 원인을 추적하므로써 히틀러의 재앙을 영원히 인류역사에서 추방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회 역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고 심지어 체코 신학자 요셉 흐로마드까(J. L. Hromadka 1889 -1969)는 파시즘과 대량학살을 탄생시킨 서구 기독교 문명의 토대인 서구기독교의 반기독교성과 그 원인을 분석하고 올바른 기독교 문명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믿고 그리고 실천하였다.

    히틀러로 인한 재앙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려는 유대인들의 집념과 유럽  지성인들의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의 탐구와 대안을 위한 끈질긴 노력에 대해 우리들도 평가와 비판으로 동참을 해야지, 어떠한 이유로도 그것을 희화화(戱畵化) 하거나 폄하(貶下)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문제는 곧 인류 역사와 문명을 바로 세우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사 이종실

[살며 생각하며] 마사릭(T.G Masaryk) 신드롬

나눔터 제 5 호 (2000년 4월 2일 발행)
[살며 생각하며] 마사릭(Thomas Garrigu Masaryk) 신드롬

마사릭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지난 3월 8일 전후로 체코 전국이 마사릭 이야기로 가득찼다. 마사릭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1차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매우 실천적이고 폭넓은 학문을 겸비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다. 마사릭과 그의 가족 묘지가 있는 란스끼 자멕(Lansky zamek)에서 그의 150주년 행사가 열렸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이 자멕을 보기 위해 행사가 시작되는 9시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이미 군중들이 운집하였다. 이날 행사를 기해 란스끼 자멕에 마사릭의 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그 첫 손님이 하벨 대통령이었다. 10월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이 박물관과 자멕은 아마 앞으로 프라하의 명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 같다.

3월 8일 프라하뿐 아니라 부르노(Brno), 프제로프(Prerov), 미에르닉(Melnik) 그리고 쁘로스띠에요프(Prostejov)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곳곳에 마사릭의 동상과 흉상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마사릭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에 대한 연구 발표,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사릭 탄생 150주년 기념일을 기해 정치가들은 저마다 마사릭의 유산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민당(KDU-CSL)과 시민당(ODS)은 마사릭을 비판하고 있으나 기민당은 마사릭의 반카톨릭주의로 마사릭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있고, 마사릭의 인간과 고립된 활동에 대해 시민당의 비판은 하벨을 비판하기 위한 마사릭 비판으로 들린다. 과거에 마사릭에 대한 역사를 교과서에서 지워버린 적이 있는 공산당(KSCM)이 사민당(CSSD)과 마사릭 후예 경합이 붙는가 하면 자유연합(US)은 “나의 신앙고백은 마사릭의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할 만큼 마사릭을 존경하는 사람을 자신의 당수로 선출하였다. 또 하벨은 자주 비정당 인물이었던 마사릭과 비교되고 있다. 정치가들은 의회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사릭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그의 이야기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인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체코 정치인들의 마사릭 신드롬은 자신들의 정치철학의 부재를 감추어 보려는 안간힘으로 이 이방인에게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제 몇 해를 이땅에서 살면서 아직도 이 사회의 속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가 결코 남의 집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들을 등에 업으려는 우리 정치가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아전인수일지라도 전직 대통령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인용하는 체코 정치가들이 좀더 순진하고 애교가 있어 보인다. 그 또한 마사릭 덕분이라면 체코 정치인들은 참으로 복있는 이들이다. 

[살며 생각하며] 후스(Hus) 화형과 바티칸

나눔터 제 4 호 (2000년 3월 5일 발행)
[살며 생각하며] 후스(Hus) 화형에 대한 바티칸의 사과와 명예회복

    1990년 교황 바울 2세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면서 계획되어 그 후 오랫동안 준비된 후스에 대한 바티칸 심포지움에서, 1415년 로마카톨릭에 의해 화형을 당한 얀 후스에게 99년 12월 17일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체코 언론들은 교황의 발표가 교회의 사과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지 “죽음 앞에서 도덕적인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인간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사과와 함께 카톨릭교회의 차원에서 뒤따라야 할 실질적인 후스 개인의 명예회복에 대해 교황이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스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는 체코개혁교회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결과라 생각이 된다.

    체코 로마카톨릭교회와 개혁교회들은 후스의 개인 명예회복보다 그의 유산을  카톨릭과 개혁교회들이 교회적인 과제로 공유함으로써 후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 같다.

    체코의 양대교단인 로마카톨릭교회와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두 지도자는 2000년의 문턱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높은 도덕적인 차원을 요구하는 후스의 가르침과 후스의 화형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으로서 신앙에 의한 대립을 거부하고 교회들이 일치해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함께 완수해 갈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한 교육으로  양대교단이 공동으로 체코교회 역사 교과서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체코 로마카톨릭교회, 체코형제개혁교회(교단)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교세를 이루고 있는 소위 후스파 교회(교단)에서 최근 중요한 결의들을 하였다.  후스파 교회는 “체코슬로바키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1920년에 세워졌고 1971년에 “체코슬로바키아 후스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교단이 세워진 것은 1920년대의 체코 민족주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1 8년 오스트리아로부터 체코민족이 해방이 되고 체코슬로바키아 1공화국이 건설될 무렵 “반(反) 로마카톨릭”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밀접한 관계인 것에 대한 민족주의의 경향이었다.  이때 많은 체코인들이 로마카톨릭을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든 것이 이 후스파 교단이다.  우리들이 잘 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마사릭도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나온 이 교단 교인이다.  교단 설립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이 교단이 80주년을 맞이하는 2000년을 기해 금번 8차 회의에서 중요한  선언을 하였다.

    체코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무신론주의자들은 체코인들의 조상인 후스파 개혁자들에게 오늘의 교회가 빚을 진 것이라고 고백을 했다.  이 빚을 갚기 위해 체코 로마카톨릭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교회들에게 열린 교회로서 함께 연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체코 로마카톨릭교회와 개혁교회들의 일련의 다짐과 계획들을 보면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후스의 유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와 그 의미를 찾는 것으로 후스의 명예가 진정으로 회복되는 것일까?  교황의 사과와 함께 카톨릭교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명예회복에 대한 주장과 역사적인 평가로 후스의 명예가 회복된다는 것을 후스는 어떻게 생각할까?

    후스가 원하는 것은 체코교회들이 오늘의 후스로 다시 태어나 이 땅에 진리를,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목사 이 종 실)
 

[살며 생각하며] “윗 교회”, “아랫 교회”

나눔터 제 3 호 (2000년 1월 2일 발간)
목사  이 종 실
 
[살며 생각하며] 나의 새천년 새해의 꿈 “윗 교회”, “아랫 교회”

    작년 한해 체코형제개혁교단 소속의 30여개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와 교인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중에 지난 10월에 방문한 “프세띤”교회는 저에게 인상이 깊었습니다. “프세띤”은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슬로바키아 국경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오랜 옛날에 루마니아로부터 매우 호전적인 부족이 정착을 하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체코에 몇 안되는 중앙광장이 없는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전국을 제패한 이 도시의 아이스하키 클럽은 시민들의 긍지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설교를 하러 가기 전에 항상 그 도시와 교회의 역사 그리고 목회자들에 대해 사전 지식을 습득하였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프세띤에 형제개혁교단 소속 교회가 두 개가 있는데 주소가 같은 거리 이름에 번지 수만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방의 소도시의 거리는 길어야 100m도 채 되지 않기에 같은 거리에 두 개의 교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교회가 대문을 같이하는 울타리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교회당이 세워진 곳이 산비탈이기에 조금 산 위쪽으로 있는 교회가 “윗 교회”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교회가 “아랫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교회 모두 다 1700년대 말에 세워진 이곳 교회 역사에 의하면 소위 “관용의 교회”(카톨릭의 관용으로 개혁파들이 자신의 교회당을 갖게 되었다는 뜻)들이었습니다. 카톨릭이 개혁파들의 교회당을 허락할 때에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고 교회당에 십자가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윗 교회”와 “아랫 교회”는 십자가가 없는 예배당이었습니다. 후에 “아랫 교회”는 수리를 해서 교회탑을 세우고 교회종도 달았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한울타리 안에서 ‘윗 교회’ ‘아랫 교회’로 나뉘어 각각 자기 예배당을 갖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윗 교회”는 칼빈의 장로교 전통교회이며, “아랫 교회”는 루터의 전통 교회입니다. “윗 교회”는 주로 가난한 계층들로 구성되었고 “아랫 교회”는 부유한 교인들이었습니다. “윗 교회”는 주일날 예배참석 인원이 200명이 넘었고 “아랫 교회”는 60명 정도 모입니다. “윗 교회” 교회당은 고풍스러웠지만 낡았고 “아랫 교회”의 교회당은 오래된 건물이지만 손질을 해서 새것처럼 보였습니다. 예배 시간이 같아서 윗 교회 교인들도 아랫 교회 교인들도 아랫 교회 교회당 종소리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두 교회는 구성원도, 신앙 전통도 달랐습니다. 그 동안 많은 갈등들이 있었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로교, 루터교의 각각 다른 교단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에서 자신들의 갈등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는 윗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은혜가 넘치고 감격스러운 예배였습니다. 모라바 사람들의 정서가 우리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배 후 악수를 나누기 위해 교회당 출입문에 서 있는데 눈물을 닦으며 나오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농사일에 거칠어지고 두툼하게 느껴지는 손들이 힘있게 저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오늘 정말 내가 설교를 했는가?” 의심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윗 교회, 아랫 교회 교인들 100여 명이 교육관에 앉아 한국 교회에 대한 저의 강연을 듣고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집에서 직접 구운 과자와 빵들을 나누면서 이야기가 끝없었으나 열차 시간 때문에 아쉬운 시간을 마감해야 했었습니다. “윗 교회” “아랫 교회” 목회자들이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프세띤에 와서 자신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지역과 활동들을 보면서 교회 성장을 위해, 지역 선교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조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역전까지 나와서 전송하는 “윗 교회” 부부 목사들(부인도 안수받은 목사임)의 흔드는 손처럼  프라하로 돌아오는 6시간 열차 여행 내내 “윗 교회, 아랫 교회” 이 두 단어는 갈등과 분열로 상처투성이인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윗 교회, 아랫 교회! 당신들은 교회 성장을 위해서 지역 선교를 위해서 이미 화해와 조화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세상의 빛과 소금들입니다. 당신들의 믿음과 삶이 이미 지역 주민에게, 아니 이 한국인의 가슴 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새천년 새해에 저도 “윗 교회 아랫 교회”를 꿈꾸겠습니다. 한울타리 안에 남과 북이 “윗 교회 아랫 교회”처럼, 전라도와 경상도가 “윗 교회 아랫 교회”처럼, “한국기독교단”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교파들이 “윗 교회 아랫 교회”처럼 함께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그날을 꿈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