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

  • 연합 예배 (2004년 02월 01일)
  • 눅 5:1-11
  • 설교자: 이종실

<본문>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본문>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계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언뜻보기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존경하는 많은 무리들을 위해 거기서 서계신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이 열심히 바라본 사람들은 후에 제자로 사명을 받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군중들을 무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고 해변에서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고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게네사렛 해변에서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바라보던 게네사렛 해변의 광경을 오늘 본문은 소상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5:5)여기서 우리는 무익한 노동의 시간을 보낸 그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부로서 지식과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고기잡는 일에 관한한 전문가들이 온 밤을 함께 일했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는 비었고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실패후의 느껴지는 그들의 세상은 공허하였고 그들의 육신과 마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육신을 끌고 그들은 내일 출항을 위해 그물을 씻고 준비해야 했습니다.

해변가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그 동료들의 광경을 어촌의 한 풍경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 사이에서 일어날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다른 한편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어떤 호기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들에 열중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인 이들 어부들의 관심이 그렇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활동에 동참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목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두 배와 그들 일행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빈 배의 의미와 죽도록 고생했지만 결과 없는 일로 낙담한 모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지금 그가 처한 현실 모두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그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5:3)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습니다.

해변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질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들의 일을 잠시 멈추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정말 운수 나쁜 날 때문에 그는 다음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어 일할 준비를해야 했습니다.

그는 빨리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기잡이에 성공을 하였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의 요청에 더 쉽게 응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가 그 청을 들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는 베드로의 협조를 부탁하였고 베드로는 승락하였습니다.

그 순간 이미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사람들의 루머를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베드로의 장모가 고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갔고 그리고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었다”라고 말합니다. (4:39)

베드로는 이미 열병을 꾸짖고 치료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개인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예언자, 권위있는 선생,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장모의 경우로 분명히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를 움직이게한 이유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않지만 베드로는 준비하는 일을 바로 멈추고 예수님의 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청하는 대로 베드로는 해변에서 약간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에 배가 떠내려가거나 움직이지 않고 예수님이 군중들을 향해 잘 말씀하시도록 배의 위치를 유지하는데 온 신경을 써야 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능력의 말씀을 듣는 중에 그는 동의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우연히 예수님 매우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이 끝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때 베드로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베드로는 해변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내일 일을 준비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는 그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날 고기잡이를 위해 그는 그물을 청소하고 아직 수리할 일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리들을 위해 배를 띄울 것을 요청하며 베드로의 일을 방해하였던 예수님이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5:5a)

한국속담으로 비유하자면 “선생이여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마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다시말씀드려 그 일은 내가 전문가니 그 일을 당신이 어떻게 잘 알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도 예수님이 잘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역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매우 유순하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소용없다고 느끼는 것을 따라 할 수 없고 특별히 완전히 소용없다고 판명된 그런 확신아래에서는 더욱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경험과 지식과 믿음과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내면에 강하면 강할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더 끓어 올랐습니다.

이들 요소들은 그것은 헛된 노력임을 확신시킵니다.

다시 더 우리가 더 고통스럽기 위해 아무 결과 없는 일이 기다리는 깊은 바다로 우리가 나아가야만 합니까? 베드로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그에게 중요한 것, 그가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옆으로 미루어둡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선생이여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한국어 성경의 번역에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베드로의 말속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믿져 보아야 본전이라는 아주 불성실한 믿음의 형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고집, 확신, 경험과 전통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방해가 될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과 경험이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드리는 이 예배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서로 깨닫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아주 불성실하고 소극적인 복종이었지만 그 복종의 결과는 베드로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를 끌어올리니 배에 가득차서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자신하는 일,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함으로서 이세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자신의 세상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기 때문에 지금 그의 눈앞에 일어난 이 광경에 대해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주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것 이었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할렐루야” 인사로 예수님과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부여서 그가 그 사건을 그렇게 쉽게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는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베드로의 삶에 강력하게 개입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여가 아니라 주여라고 부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군중들에게 설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베드로의 삶 안에 개입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용서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것이라 합니다.

주님에 의해 용서받은 사람, 그의 생명 안에 참여한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정한 복음을 발견합니다.

용서받은 사람,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의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생명에 인도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신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라는 고백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도록 그리고 결국 예수님의 초청을 따르도록 그리고 제자가 되도록 하는 첫 단계가 됩니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일상의 세상의 삶, 이기적인 우리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삶,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는 삶의 길을 잠시 포기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 연합 예배 (2004년 01월 04일)
  • 요 1:10-18
  • 설교자: 드로빅

<본문>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개역한글판 요 1장)

<설교>

여러분들에게 역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우리의 기쁨이나 염려에도 두려움에도 희망과 어떤 계획에도 전혀 말씀을 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까?

새해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를 신뢰해야 하며 무엇과 싸워야 할 것 인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권면처럼 들리도록 하나님은 말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말의 홍수 사이에서 그리고 많은 말들과 생각들 사이에서 맑은 종소리처럼 요한복음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우리들 곁에 두지 않았고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상상하고 실제로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침묵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통치하고 어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모든 감추어진 말들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우월감이나 도덕적인 것으로 극복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한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들과 우위를 다투는 그런 경쟁을 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압도하기를 원치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거주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날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성탄절의 증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축하를 하는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평범하게 겸손하게 오셔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누구 그리고 그 무엇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되셨고 겸손하게 가난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불분명한 것이 보입니다.

첫번째로 아기가 태어난것입니다.

마치 아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무기력함이 숨겨져있습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 단어 „아니오“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늘이 침묵한다고 불평합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약속하셨고 명령하셨고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많은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하지않으십니다.

지금 육신이 되신 말씀만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과 연결되고 완전히 새롭게 준비되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준비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기쁨과 염려와 문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인생의 문제들에 코멘트도 지시도 명령도 하지않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약한자들과 함께 하시기에 오직 인간의 한 단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자녀입니다.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부모입니다. 나의 말에 응답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때가되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를 향하며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셨고 스스로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연설이 되지 않도록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밝견하도록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에 응답하도록

삶의 이유를 갖도록

깨달음과 은혜의 샘에 도달하도록

인간의 말과 약속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보장을 하지않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힘이 없어 우리들의 삶에 그의 가까이 오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와 함께 무언가 시작할 흥미를 갖지않고있으며

다른 인간의 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삶의 문제로부터 끌어내어 다른 삶의 길을 보여주고 그것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강한 능력자를 희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존중합니다.

인간의 말이 많음을 압니다.

인간의 말로 우리들은 기쁨과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들은 야곱과 구약의 시대처럼 인종적으로 청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육신이 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형제 자매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모든 마음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이지 슈토렉 고별예배 설교

  • 연합 예배 (2003년 07월 04일)
  • 창 47-48:
  • 설교자: 얀 슈테판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지 슈토렉 목사님의 생애 역시 쉽지않았습니다.

그는 어린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 축복에 대해 장자 에서와 논쟁에 휘말리게됩니다. 14년 노동으로 부인들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난산끝에 죽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그리고

를 다시 만날 그때까지 수십년간 그는 죽은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7년 가뭄이 닥쳐 그와 그의 11명의 아들들이 호구지책을
강구해야했습니다. 그의 생애 이야기의 중심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불평함이 없이 슬픈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곱은 이지 슈토렉에게 생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야쿱이라 하였을 때 그는 야곱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교회당에 걸맞는
이름을 찾았을 때 벧엘에서 땅과 하늘의 소통의 도구인 사다리에 대한 야곱의 꿈 이야기가 그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는 족장처럼 자신의 대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이 겨루시다는 뜻) – 격투하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과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과 어떤 문제의식을 씨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씨름은 그와의
교제의 시작이었고 그의 친구가되는 것은 그 씨름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문성의 차원에서 그의 삶은 내적 외적인 교회의
문제들과의 투쟁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친구로 그리고 아래 사람으로 또는 윗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대결을 피하지않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바른교회 기독교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세우려는 논쟁을 평생동안 교단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는 그런
삯꾼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지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맙시다. 그의 생애 중심에 야곱의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축복할때까지 우리들이 떠날 수
없는 그리고 우리들이 도망칠 수 없는 어느날 갑자기 불쑥 밤에 나타난 불한당처럼 인간의 특별히 목회자의 인생의 여정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세월로 그리고 오늘날평균수명으로 보아도 그의 생애는 험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10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많은 것을 그는 61년의 세월동안 겪었습니다. 동시에 지난간 세월이 악하였습니까? 소상인
가정에서 소년으로서 보아온 박해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학업의 길은 쉽지않았고 전도사인 젊은 가장으로서 생활이
불안하였습니다. 젊은 공산주의 당원들과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지쳤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과 많은 문제들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좋은 성격이 없지 않은 남성, 아니 크고 작은 좋은 성격을 많이 소유한 남성이었습니다. 옳지않는 문제와의 씨름에 시간을
소비하지않았고 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소비하였습니다. 야곱의 부정적인 모습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가장 유명한 구약 이야기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지의 다른 모습 즉 그의 근면성, 희생, 강직성, 인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몇 개의 그가 세운 교회당인 – 체스끼 브로드의 교회당과 목사관, 꼬빌리시의 교회당과 목사관, 헤를리꼬비치의
교회당, 체스끼 브로드의 양로원 – 열매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동시에 누구도 그의 목회의 시간들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두차례의 7년간의 야곱의 침묵의 봉사기간과 이지의 시간을 비교할 순 없겠습니까? 거기에 더해서 목공소, 상인, 심지어
공산당원들, 관공서 직원들인 이웃들 부터 모든 예술 분야 즉 건축가 화가 음악가 배우들을 포함하여 목사로서 함께 일한 다른
전문분야의 전문가들 예를 들어 의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인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헌신한 교회 밖의 활동 시간들이 있습니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신자들을 위한 특별한 목회활동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큰 기대를 그가 실망시킬 때도 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가부장적인 기품이 있는 남성에 대한 기대로 사랑을 표현한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를 아버지로 기대하는 젊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지는 도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자신의 바른 길을 찾아 걸
어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 역시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어가는 야곱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스라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기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바라봅니다.그들에게 유산과 약속을 주고
축복을 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 창 48장) 야곱의 축복은 험악한 인생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비밀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는 구약성경의 놀라운 이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목자, 천사,
구원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들과 씨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들은 갈등의 삶을 우리들에게 준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인생의 씨름을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그처럼
경험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형에서의 분노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였습니까? 누가 라반으로부터 떠나올 때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까? 누가 가정의 갈등을 감내할 수 있게하였습니까? 누가 요셉을 구덩이와 애굽의 감옥에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까?
누가 기근을 극복하게하였습니까? 목자 하나님, 천사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조부
야곱이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위탁합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이시간 이지의 “교회의 자녀들” 꼬빌리시의 교인들을 그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

<이지 슈토렉 목사 고별예배, 얀 슈테판 목사 설교,
본문 창세기 47장 48장>

대강절의 기도

  • 연합 예배 (2003년 12월 07일)
  • 살전 3:9-13
  • 설교자: 이종실

031207EK
데살로니가전서 3:9-13
대강절의 기도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Advent는 라틴어 Adventus 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뜻은 “도착, 도래, 강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그의 강림은 첫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의 첫번째 오심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실 그 때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설교 후에 있을 사도신경을 따라 하는 고백을 할것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대강절 계절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신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분명한 진리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은 우리들의 인생의 마지막이 희망 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질서와 희망을 향해 가기 보다 무질서와 혼돈을 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더 희망을 주고 삶의 용기를 줍니다.
오직 한 분에게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것은 그들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 희망에 대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이 꼬빌리시에서 역시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있습니다..
이 희망의 역사를 재확인 하는 때가 바로 대강절 절기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들은 말씀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사도의 편지입니다.
오늘 12절 13절 말씀을 요절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전서 3:12-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생각하며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생각하며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기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편지가운데도 나타납니다.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표준새번역 빌
1:10-11)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 바울의 기도를 들을 때 그들은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 대한 말씀 때문에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바울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의 말씀입니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종이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돌아옵니다.
성경말씀은 이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 24:36)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종들의 태도는 결정됩니다.

이 비유에서 나쁜 종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전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온다고 하여”
그가 주인은 틀림없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주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의 동료를 때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길 때 그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나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쁜 종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처음에 바울이 주의 날을 기다리는 매일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하
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3-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나쁜 종 비유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색욕에 빠지거나
다른 형제들을 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중심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주신 그 분을 만날 시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놓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돌아오는 것을 염려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들이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우리가 나쁜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착한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가 갖고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한가지는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는 교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과 갖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나다.
그러므로 12절에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으로서 중요한 것은 단지 흠이 없는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 광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종말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매일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장소를 소중하게 여김으로서 그리고 신실한 섬김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매우 다양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려야할 올바른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이 기도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합니다.
이바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들고 우리는 매일 매일 이 기도를 드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는 대강절을 보내십시다.

열린 무덤

  • 연합 예배 (2003년 11월 02일)
  • 요 11:32-44
  • 설교자: 드로빅

오늘 설교본문은 요한복음 11장 32-44절 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

람을 위하고 인간을 위한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실 정보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팔레스틴의 지리로부터 무엇인가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적인 정보입니다. 데가볼리는
해석하면 열번째 도시라는 뜻으로 독립된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에 속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왕래가 많은 무역도로로 발전된 헬라 도시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 도시들은 각 나라의 매우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가 달랐고 관습과 전통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도시들은 이방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 다양성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이 번주에 체코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신 가족들이 묻힌 곳을 돌아봅니다. 그것은 종교와 관련되기도 하고 관련이 없기도 합니다. 일년에 한번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모와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기회도 가질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메멘또 모리”가 들려옵니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십니다. 나사로의 무덤입니다. 매우 사랑하던 이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예수님의 통분하는 마음에 대한 표현을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신의 운명 죽음과 파멸과 무덤의 권세를 만난 것 처럼. 마치 인간의 불신앙과 절망에 대해
분노인 것 같은 그런 분노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는 죽은 지 나흘이되었는데 다시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생물학적인 질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흙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장례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읽은대로
굴속에 넣어두고 돌로 막았습니다. 어두운 장소는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죽음과 파멸의 권세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죄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우리를 무덤의
동굴로 고립시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인간의 생각에 그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냥
둡시다.” “살아 있는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아마 그렇게 그녀는 말하길 원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열린 무덤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결과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서 관계가 회복됩니다.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돌을 밀어내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수의를 입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시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들을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우리들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공동체는 단순한 삶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공동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인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교회입니다. 호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시간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돌, 우리를 구속하는 수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은 예수의 승리로 벗겨졌습니다. 공동체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동체는 우리들에게 열려있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부활하여 다시 삽니다. 열려진 거룩한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가까운 이들의 무덤 곁에 서있습니다.


리스도와의 공동체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들은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떡과 잔을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과 여기 이미 함께 하지 못하고 이미 하늘 예루살렘 영원한 집에 가신 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순례의 마지막 여정을 바라봅니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여 보이는 저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확인합니다. 성만찬의
참예로 새롭게 새롭게 산자와 죽은자의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