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 연합 예배 (2003년 10월 05일)
  • 골 1:24-29
  • 설교자: 이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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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29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본문>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로새라는 도시는 오늘날 터어키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우리교회 처럼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읽은 설교 본문입니다.

골로새 1장 1절에 이글을 쓴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고난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박해와 다양한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난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다 더 극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24)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충분하지않았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에 나도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죄의 속죄를 위한 고난입니까?
아닙니다. 죄의 속죄를 위한 고난은 완전히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고 바울이 동참해야될 여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이 서신서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고난을 당하셨고 그리고 홀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죄를 위한 대속의 사역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일이며 인간이 그 사역에 동참할 조그마한 여지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먼저 바울의 고난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25절에 사도 바울의 사명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대해 28, 2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것은 설교의 사명과 교회를 세우는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말씀을 위한 그리고 세워져야할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첫번째는 이세상에 교회가 세워질 때 고난이 뒤따르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당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성도의 교제를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 어려움 그리고 고통을 예상해야만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면, 교회가 세워질 때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말합니다.

두번째로 교회를 세우기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시작하셨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에 우리를 초대하였고 그리고 함께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완성을 위해 고난을 당한 그리스도의 그의 몸된 교회에 대해 우리,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냉담하지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교회가 어떤 기쁨을 주는가?
나에게 교회가 유익하고 유익하지 못한 점이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의 나의 봉사와 섬김이 자신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인가?
혹시 이것이 교회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질문은 아닙니까?

본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그토록 수고한 설교와 교회의 설립은 구체적으로 이세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언급한대로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사전에 비밀(祕密) 이란 단어를 ①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②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③언어나 문자 따위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전할 수 없는 깊은 뜻 등등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이 질문은 정확하게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비가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고 규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에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개인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사명으로서 그가 이루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가 전파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될 때 그리스도는 더 이상 삶의 과거의 존재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개인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만납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에 만남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들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여기서 너희들은 누구입니까?
2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되어 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아래 놓였습니다.
그것은 죄인들 너희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죄인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전파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우리들과 만나고 우리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는 구속을 받았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곳 어디에나 죄용서가 있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들과 화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는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그리스도가 세울 때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화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죄 용서 없이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가 있는 곳에 참된 희망을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광의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희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반복을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결코 분명해지지 않는 미래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한편 동시에 우리들은 자신을 기만하는 어떤 것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하나님과 화해하지않은 죄의 짐을 짐지면서 우리는 참된 소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으로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올 소망입니다.
우리들이 그와 함께 있을 때 소망을 얻을 것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신자는 구원의 완성을 향합니다.
설교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지로만 남지않고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추구하게합니다.

28절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완전한 자라는 단어는 흠과 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만 오히려 이 단어는 성숙한 어른을 의미합니다.

거듭나 크리스쳔이 되는 경우 그것은 우리가 처음 태어날 때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아이에 머물러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은 내가 아무리 불타는 열심이 있어도 그 열심은 교회 안에서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은 완성을 향한 끝없는 행진입니다.
성장은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기대되고 성숙은 신자들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에서 자신의 노력이 신자들의 성숙인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으로 결속되어 마음에 격려를 받음으로써,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골 2장)

설교는 이 한가지 목표를 향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교회당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매주 만나 무엇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있습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서 이 장소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에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언제나 이곳에서 모든이들에게 들려져야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세상과의 만남이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여기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깨달은 과정을 통하여 함께 걸어가며 연합하여 완성을 추구하는 신자로서 영광의 소망을 함께 향하여 갑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골 2:6-7) 아멘

에바다

  • 연합 예배 (2003년 09월 07일)
  • 막 7:31-37
  • 설교자: 드로빅

오늘 설교본문은 마가복음 7장 31-37절입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설교>

람을 위하고 인간을 위한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실 정보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팔레스틴의 지리로부터 무엇인가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적인 정보입니다. 데가볼리는
해석하면 열번째 도시라는 뜻으로 독립된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에 속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왕래가 많은 무역도로로 발전된 헬라 도시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 도시들은 각 나라의 매우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가 달랐고 관습과 전통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도시들은 이방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 다양성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지 못하고 잘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수없습니다. 그는 그들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질병으로 그는 주위로부터 그리고 이웃과의 공동체로부터 분리됩니다. 그의 외로움을 알고 그를 찾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하기를 “그에게 안수해 주십시오.”

그것은 듣지못하고 어눌한 사람에게 동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귀먹고 말못하는 사람에게 말로 생각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에게 안수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것입니다.


의깊게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안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안수(누구에게 손을 얹는 것)라고 했고 또 이것은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행위는 그런 안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몸의 감각기관을 만졌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었고 혀를 만졌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몇 마디의 말들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예수님의 치유의 힘은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아시는데 있습니다. 우리들을 위한 헌신에 있습니다.


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간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이 간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들의 간구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멈추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귀기울이십니다.

그리고 동작과 함께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큰소리로 “에바다” 번역하면 “열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병자의 모든 신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귀와 혀에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열려라”는 말을 듣지못합니다.
닫힌것이 열려 들립니다. 혀의 맺힌 것이 풀립니다.


언자들이 선포하는 것 후손들이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십니다. 구원의 날이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귀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찾으셨고 그를 만났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을 만나지 않으십니까? 우리들은 구원의 복된
날을 여기서 기다리지않습니까? 이웃의 관심 덕분에 외로운자를 버려두지않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기에 예수님은
데가볼리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고통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를 만났습니다. 그 고통의 자리를 통해서 그와 같은 고통의
상황이 우리의 인생의 자리에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십니까?
세례로 우리를 만나십니다. 성만찬으로 우리를 만나십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임재하심과
그의 손이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의 고립됨과 폐쇄성을 향해 “열려라”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폐쇄성에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전통으로부터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닫힌 마음을 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활동하심과 은혜를 향해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이 열림은 많은 문제들을 풀게합니다.고통스럽고 상처받은 심령을
풀어줍니다. 불신앙과 염려를 없애줍니다. “열린사람이 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이 됨을 말합니다.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은
구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로 오시면서 시작된 날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부터 우리들이 살던 날이며 우리들이 함께 그 날의 완성을 향합니다. 모든 생각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30일)
  • 요1:19-28
  • 설교자: 이종실

031130(대강절 첫째주일)
본문: 요 1:19-28
제목: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본문>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설교>
금년에도 성탄의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교회력으로 advent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adventus에서 왔습니다.
Adventus는 도착, 강림 이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성탄절 네 주 전부터 시작되는 advent를 우리는 대강절 또는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advent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두 가지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탄의 계절이 갈수록 상업주의에 영향을 받아 그 분위기가 축제와 소비와 향락으로 흘러가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의
계절은 시험장에서 학창시절에 공부한 모든 역량을 단 한번으로 평가 받는 대학입학시험 문제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매우 엄정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기다릴 것인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듯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공회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네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는 매우 단정적인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성경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란 말은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숨기지 아니하다”란 말은 “거절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한 완벽하고 진실한 고백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일등에 대한 애착이 많은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외국기자는 “한국에는 일등은 많고 이등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외국인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모두 1등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모두 1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게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할 때 타인을 인정할 수 있어 비로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명제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WEC 이라는 유수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훈련을 하는 데 그때 가장 강조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는 목수의 가문인 반면 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던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재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꼬?”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은 듣고 잊어버리는 매일 일어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 지지않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누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수태소식을 들었듯이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요한의 수태를 알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요한이 조그만 긍정했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꼭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면 모르냐” “꼭 내입으로 언급해야 너희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어도 그는 최소한 한 종파를 이루어 지도자로 군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어 숨기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그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일꾼삼으십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하여 적합한자가 아닙니다.” – 자기 부정을 했을 때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동반하여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 보냈습니다.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깨끗게 하시고 그를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때 예수께서는 그를 택하여 “사람을 취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격언가운데 “네 혀에게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겸손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은 21절 과 22절에 나오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사냐?”
이에대해 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요한에게 질문자는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계속해서 처음에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음에는 “나는 아니라” 마지막으로 “아니라” 부정을 하고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부정에 대해 그들은 요한 스스로 자기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을 세 번 부정한 후에 한 자기 긍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자기 인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PR하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 같은 자기의 존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한 인격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인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리를 세상에 아름답게 내는 기능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인간-세상은 조화로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자신을 알고 자기 기능을 알고 자기 자신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는 겸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인역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리로 철저히 자기를 그리스도의 뒤로 감춘  세례요한의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기쁨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에 크게 깨닫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심판의 기준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23일)
  • 마25:31-4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11-23
제목: 심판의 기준
본문: 마태복음 25:31-46
<본문>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독교회의 전통은 마지막 교회 예식 속에 교회연도의 끝을 상징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강림절 첫번째 주일을 축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연도의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는 세상의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과  행위의 가장 높은 심판자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미하는 참으로 행복한 고백입니다.
인간이, 혹은 인간의 심판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친구나 적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우리를 위해 베들레헴의 가난한 아이로 세상에 오신,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렇게 선하고 사랑이 많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까요?
오늘 본문의 비유 말씀이 바로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비유는 최후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위협이나, 마지막에 모든 것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것은 아닙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최고의 주권 심판자는 모든 인류의 형제가 되셨고, 결국 그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 행위를 심판하시는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 말씀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양치기의 양과 염소를 가르는 작업은 그 유래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밤에 염소는 천막에서 밤을
보내게했던 반면, 양들은 밖에 내 놓고 밤을 보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는 저녁에 염소와 양을 분별하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양치기가 가축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 얼굴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셨고, 비웃음과 냉대, 미움까지도 감당해 내셨으며, 죄악되고 약한,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채찍질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으며,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으셨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형제와 구세주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안에는 사랑이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불행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는 그에게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희생하신 형제를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고통을 냉담하게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형제애를 발휘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구원 약속에 대한 걱정만을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됬던 그 모든것에서 나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하고, 모든 사람들을 도와야하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상급을 내려주신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심이고,  자기 편의만 생각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성공적으로 죄를 피하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또는 훌륭한 기도를 할줄 아는 사람이라고 심판에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배운 사람만이  그 심판에서 통과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자신의 사랑의 실천으로 겸손하게 보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어볼 것입니다. : 우리가 어느 때에 주를 보았습니까?
그들은 어느 때에 주를 보았는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어떤 공적이나 상급 때문에 봉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성과 정직성은 정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주 작은 일에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얻기 원하는 영원의 상급 때문에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체험하는 진실된 믿음의 결과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는 다른 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 구절에 네 번이나 „내가 주릴 때에…“ 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끝에가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 말씀을 암송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그 특별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교리 문답집 같은 것을 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리 문답집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과 대답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 비유 말씀이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기억속에 점착되어 늘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을 마시게 했는지,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하였는지, 병든 사람을 돌아보고, 옥에 갇힌 사람을 살폈는지에 따라 심판은 결정 됩니다. 
이기적이 아닌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인도적 행위(인간애)의 표명 이상이며,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은 교회의식의 규율을 잘 지켰느냐도 아니며, 열렬한 신앙적 표현들도 아니며, 정말 보잘 것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진정으로 살펴보지 못하는 그럴듯한 자선행사도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랑으로 실현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도움과 원조로 나타나는, 무관심과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입니다. 

또 이 비유에는 특별함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 비유 말씀은 모든 인간, 즉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꼭 섬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기도교인의 삶은 예수님을 말이나 형식적인 예식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으로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경직됨 속에서 예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의견이나, 가르침 같은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 즉,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소극적인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기에 내 인생이 그 믿음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사랑의 봉사를 최후의 심판을 미리 대비하기위해, 혹은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한  준비로서, 또 세상에서의 칭찬을 받기 위해 실천하지 않습니다. 
선행과 공적이 목표가 아니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분명하고 적극적인 인생이 목표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 자신의 인생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처럼 기독교인도 다른 이웃에대해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며, 특히 그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올바르지 않은 일이 우리 이웃에게 일어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호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상황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계획적인 행동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경 본문 말씀과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메시지를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탄생 2천년이
넘도록 강하게 지켜져 온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 때문에 이 교회 안에 모인 것이며, 이제 정확히 한달 후가 될 그
분의 탄생일을 즐겁게 상기할 것입니다. 
Amen

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16일)
  • 행15:36-41
  • 설교자: 이종실

031116
본문: 사도행전 15:36-41
제목: 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본문>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설교>

칠 전 저의 아이가 의료보험을 연장을 하기위해 의사의 건강소견서가 필요하여 간단한 검사를 받는데 소변검사 결과에 조금 이상이
있다고 의사가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입에서 나온 말이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에 대한 증오어린 비판이었습니다.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는 보험이 아니라 외국인을 수탈하는 제도이다.”
“그래 병이 있어 의료보험연장을 안해준다면, 꼬박 꼬박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받아먹고 돈안 드는 조그마한 질병은 치료해주고 돈 많이 드는 큰 질병은 치료를 안해주겠다는거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다시 한번 분개했습니다.
그러고는 금방 체념해 버렸습니다.
“그렇지 뭐 외국인이 무슨 힘이 있나? 내 소변 담아주랴?”

외국인들은 부당함을 느껴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외국인이 조그마한 사회문제라도 일으키면 비자를 갱신해 주지않으면 그나마 그 주장을 할 공간마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알고 보면 체코인들도 똑 같이 겪는 어려움들을 저희들이 겪으면서 우리 외국인들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햇빛이 많은 지중해 지역의 유럽 사람들은 유쾌하고 다혈질이고 시끄럽습니다.
일년 내내 햇빛을 보기 어려운 중부나 북유럽 사람들은 표정이 굳고 말이 없고 질서 정연하여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날씨가 이처럼 같은 유럽인들에게도 서로 다른 기질과 문화를 만들어내듯이 저희들은 눈에 보이지않는 피해의식이 외국인인 우리들의 삶에 깊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외생활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어기재가 무엇인지 제 자신을 늘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다가 조그마한 거슬림에 쉽게 나만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격분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특히 동양인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다고 쉽게 오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비하 하거나 반대로
체코와 그 민족 모두를 싸잡아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피해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불안감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과 영혼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말과 감정이 통하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상처들이 절제함이 없이 폭발되고 분출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인들의 공동체로 조직된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하다는 비난을 세상으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이 계속 들을 것인지 아니면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피해의식으로 상처 받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외국인이면서 신자들인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갈등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갈등은 변함없이 누구나 겪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않는 세상 사람들이 겪지 않는 갈등까지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단순한 갈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왜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성막구조와 그 시설에 대해서 성경은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예수님의 족보를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왜 처음으로 찾아가신 곳이 갈릴리였을까?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교회 지도자들의 갈등을 왜 누가는 그렇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왜 그랬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사도행전> 이란 책이름으로 우리들은 이 책이 사도들의 선교행적을 기록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도들의 행적은 사도들의 행적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의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일상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도행전 누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주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였다.”
<수일 후에> / <며칠 뒤에> 이 말씀은 지난 주에 말씀 드린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쟁을 중재하기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으며 단지 할례대신 율법에 금지한 음식을 이방인도 지킬 것을 결정하고 모두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일 후 또는 며칠 뒤라는 이 말씀은 목회를 한지 이제 며칠이 지난 다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안디옥 교회를 한참 섬기던 중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1차 선교여행 때)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라고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하였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이 개인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의 일 즉 하나님의 일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섬겨 받드는데 무슨 갈등이 있겠는가?” 생각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들면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요즈음 대부분 한국교회들이 예배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주님의 만찬으로 사랑의 식탁을 나누던 초대교회를 한국교회들이 본받으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사랑의 식탁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는 취지를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천에 들어가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만들면 맛이 없으니 음식 준비에 좀 간단한 것을 내게 맡겨달라.”
“왜 너는 매번 그렇게 요령을 피우느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느냐”
“나는 음식은 준비하지만 설거지는 못한다.”
“그러면 내가 음식을 준비할 테니 당신이 설거지 좀 해보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재를 한 것이 식사 준비는 돌아가면서 하는데 설거지 하는 사람을 고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있는 주일 저녁예배시간을 변경해서 드리는 오후 2시 예배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분들이 식사 후에 예배 드리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면서 이런 유사한 경우들이 많이 생깁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요한을 동행하길 원했고 바울은 마가와 함께 가는 것을 원치않았습니다.
바울이 마가를 거부하였던 이유에 대한 단서를 사도행전 13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바울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은 바나바와 바울의 1차선교 여행 때 그들의 조수였습니다.(행 13:5)
바로 이 요한이 오늘 논쟁의 인물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그가 선교여행 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바울이 자신의 친척 바나바를 무시한데 분개해서 되돌아왔다고 주장하고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예루살렘에 태어나고 자라서 그가 이방인 전도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지도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마가(요한)이 중도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일을 맡은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고 이유가 있어도 한번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묵묵히 끝까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을 다해놓고 그리고 돌아와서 바울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설령 어떤 허물이 자신에게 있어 그것 때문에 그가 다시 돌아갔더라도 마가(요한)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아주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책임감을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우선되는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의 추천에 동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했을 때 그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일차 선교여행에서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에 박해와 오해 속에서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러있기 위해 믿음의 형제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있어 이번 여행에서 그들을 찾아보고 격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 선교여행에서 중도 하차한 마가(요한)의 경력이 이번 여행의 목적을 고려할 때 바울은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생하는 다른 믿음의 형제들의 마음이 책임감 없는 마가(요한)로 인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가를 거부하는 바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견해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시면 <바나바의 사촌 마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마가가 아무리 실수를 하여도 그는 자신의 사촌입니다,
바울은 중도하차라는 마가의 실수 때문에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바나바는 그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인지상정의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39절에 그들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 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받들다가 주먹까지 왔다 갔다 했는지는 모르지만 심하게 다투고 화해도 못하고 서로 갈라섰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저희들 같은 일반 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 안에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없는 갈등도 만들어서 서로 다투고 싸우자는 뜻이 아닙니다.


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교회역사의 수치일 수 있는 두 성인들의 분쟁과 갈라섬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성경은 어떻게 갈등을 없애는 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끊임없이 출렁이듯 그치지않는 우리 인생들의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39절이하 41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해서, 신도들로부터 주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인사를 받고, 길을 떠났다.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교회를 굳세게 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들이 심하게 다투고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툼과 갈라짐 그 끝에 바로 이어진 현상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로 갔고 바울은 신라와 함께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앞에서 주일날 식탁공동체를 준비하는 일로 둘러싼 어떤 한국교회의 갈등을 사례로 말씀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식사 후 오후 예배를 드리고 남은 설거지를 믿지않는 사람에게 교회 헌금으로 일당을 주고 일을 시킵니다.

록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정신의 실현이라는 원래의 취지는 빛이 바랬을 지라도 그래도
<사랑의 식탁 공동체>라는 그 하나님의 일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다시 원래의 취지대로 돌아올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교회에 갈등이 생기면 그 하나님의 일 그것을 깨트려 버립니다.
원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밉더라도 받드는 하나님의 일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동의가 안 된다고 내 의견이 먹히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그
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오늘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은가에 대해 표명을 하지 않습니다.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서도 그들 사이에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갈등이 되어 중단되지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을 뿐 입니다.
갈등 속에서도 우리들이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중단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사람이 싫어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외국인으로서 피해의식에 젖어 살아가는 상처 받은 영혼들인데 자꾸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부정적인 말만 하면 결국 자기존재의 파괴가 옵니다.
독일에서 삼십년 이상 사신 분 한 분이 당신은 5도쯤 정신이 돌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0년 20년 후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야 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평상시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인정하려고 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장점을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내게 없는 달란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고전 1:12) 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아
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3:5-8)

몇 년 전에 지구촌교회 선교팀이 저희 교회를 다녀갔습니다.
그때 그 팀을 이끌고 오신 분이 김형준 목사님인데 현재 동안교회에 시무하십니다.
김 목사님은 목회 상담을 전공하시고 많은 경험을 갖고있습니다.
그때 강의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은 서로 다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조건 내가 양보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대로 일합니다.
바울은 책임감과 같은 기본적인 성품을 갖춘 사람을 이끄는 스타일이라면 바나바는 기본적인 성품이 부족한 사람을 일꾼으로 양육하고 성장시켜가는 스타일입니다.
갈등은 이 두 사람의 스타일의 충돌이었습니다.
갈등이 함께 받드는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스타일을 서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두번째 선교여행은 사실 두 갈래 길로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 섬을 향하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들 두 지역은 첫번째 선교여행 때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간 선교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프러스 섬은 바나바의 고향 도시이고 15장에서 신자가 된 그 지역 통치자가 통치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나바는 마가를 비교적 익숙하고 평온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또 다시 선교여행을 중도하차 하지않을 뿐 아니라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성장하게 하려는 바나바의 배려였습니다.
이 후에 바나바가 마가를 어떻게 잘 가르쳤는지 그 과정을 더 이상 추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두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66-67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딤후 4:11)
여기서 마가는 바로 바울이 2차선교여행때 거절한 그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2차 선교여행이 주후 5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 바울에게 거절당한 마가가 66년경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마가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선 바울이 선교여행에 함께 데리고 간 사람이 실라였습니다.
이 실라는 바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나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살후 1:1)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의 라틴어 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과 이름을 나란히 쓸 만큼 그들의 관계는 돈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났던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실라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행 15:22)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은 실라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결국 교회안에서 일어난 갈등 때문에 생겨난 회의였습니다.
만약 교회안에 갈등이 없었다면 바울과 실라의 만남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갈등을 넘어 그 갈등까지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속 좁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롬 8:28)
우리 인생 저 위에서 우리들의 불행조차도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까지도 귀하게 여기며 당신의 일에 활용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십시다.
그 믿음 안에서 행복하고 복되고 충족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십시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