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 한인 예배 (2002년 09월 22일)
  • 마 20:1-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922 (열 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마태복음 20:1-16
제목: 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여러분,


도원 비유의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찾는 집 주인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동쪽에 해가 있을 때 시작해서
해가 서쪽으로 질 때까지 입니다.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집 주인은 일꾼들과 품삯을 협상하였습니다. 구두계약은 유효하며 협상한
봉급을 지불해야 될 책임이 있고 일꾼들은 일을 해야될 책임이 있었다. 데나리온은  서로 협상한 정확한 금액을 나타내며 관례에 따라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제 삼시(요즈음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들 시간으로
아침 6 시부터 시간계산을 합니다.)에 다시 장터에 나가 아직도 일이 없어 고용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새 일꾼들을 불르러 간 이유를 우리들은 모릅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충분하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일이 많아서 일꾼들이 더
필요했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여기서 그들과 품삯에 대해 협상을 하지 않고 4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리라“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번째로 온 일꾼들의 품삯을 기준으로해서 약 3/4 데나리온은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인은 제 육시와 제 구시에(요즈음 시간으로 정오와 오후 3시에) 불러서  제 삼시때 고용한 사람들처럼 적당하게 지불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그래서 그들은 1/2이나 아니면 1/4를 받을 것을 상상하였을 것입니다.)


지어 하루가 끝날 무렵인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장터에서 발견을하였습니다.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대답하길: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보내면서 품삯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하루 품삯 가운데 극히 일부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하는 시간이 한시간이라도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세 종류의 일꾼들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품삯으로 구분하면 1) 한 데나리온 품삯 일꾼들(아침부터 일한사람들), 2) 적당한 품삯을 약속받은 일꾼들(제 삼시,
육시, 구시부터 일한 사람들) 그리고 품삯을 전혀 약속하지 않아 단지 하루 품삯 가운데 일부만 기대하는 일꾼들(제 11시부터
일한 사람들) 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여기서 일꾼 채용에 대한 비유의 첫번째 장면이 끝납니다. 하루 종일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장면에서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비유의 두 번째 장면에서 주인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저녁이 되는 제 십이시, 하나 둘 뜨는 하늘의 별들은 하루의 일하는 시간이
끝남을 알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모든 일꾼들을 먼저 온자들로부터 나중온자들까지 구분하지 말고 모두 똑같이 품삯을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레위기 19:13, 신명기 24:15)에 따라 일한 후 저녁에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자들과 일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관리 방식이 독특합니다. 직접
일꾼을 찾아다니며 고용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단지 품삯을 시키는데로 지불하는 사람이 청지기입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품삯은 모든 이들에게 지불될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처음과 마지막에 채용된 일꾼들과 포도원주인이 주연이고 다른 이들은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세개의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있습니다. 품삯 지불은 제일 나중에 채용된 자들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처음이 되었습니다.

모든이들이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받았습니다. 한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똑 같이 받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임금 지불이었습니다.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 보다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받은 것보다 실제로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이 더 많이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우리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견딜수 없는 더위에서 하루종일 어떤사람들은 일했고 그리고 어떤사람들은 해가 지는 서늘한 저녁에 단지 한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래서 형평성 문제로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법적인 면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고 우리들의 상식도 그것을
동의하기 힘듭니다.

주인은 매우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주인은 친구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개해서 그가 포도원의 주인이란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였기에
잘못을 하지않았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약속한대로 받았다면 누구도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품삯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뜻대로 그리고 자원해서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지불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이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아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입장 때문에 힘들어 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좋은 마음씨 때문에 질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을 하면서 질투심에서 자신들만의 성공을 인정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꼴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평함에 대한  의미만을 생각했지 주인의 선한 뜻은 물론 자신의 이웃의 필요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않습니다. 한 데나리온도 안되는
품삯으로 그들의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인은 선함과 자비함을 베풀었습니다. 주인은 인간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근무시간에 따른 품삯의 차등 지급을 반대하고 일률적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처음 채용된 사람과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의 차이점이
없습니다. 나중에 일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건 없이 일하러 왔습니다. 평가의 순서가 달라졌습니다. 다른 일꾼들과
달리 처음에 특별하게 계약을 하여 채용된 첫번째로 일하러 온 일꾼들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오늘 본문의 비유의 배경은
포도원이 아니라 장터입니다. 장터는 기다림의 장소이며 포도원은 약속된 장소입니다. 장터와 포도원 두 장소를 주인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용된 일꾼들의 노동시간과 규칙에 대해 우리들은 알지못합니다. 비유에서 일꾼들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 중심부에
있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가라, 내가 너희들에게 공정하게 주었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합니까? 여기서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공정함과 주인의 공정함입니다. 공정함이란 말에서 우리들은 노동의 시간과 일꾼의 능력에 따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주인은 그러나 우리들이 상상했던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공정함은 그에게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일꾼들에게 지불한 후 그들이 주인의 일을 평가할 때, 그리고 그들이 주인의 품삯
지불과 고용방식에 불평을 할 때 제일 먼저 주인은 일꾼들의 노동을 평가합니다. 어떻게 불평을 하겠는가라고 주인이 우리들을
꾸짖습니다. 주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전에서 나중 온 사람들에게 지불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좋지않은 아들이 분에 넘치게 많이 받은 탕자의 비유를 연상시킵니다. „포도원의 일꾼에 대한“ 이 비유는 „선한 고용주에
대한“ 비유로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은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행위에 대해 ,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에 대해,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그리고 당신의 사랑의 초월적인 권능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꾼 고용은 실제 삶에서 나온 생생한 현실 이야기 같고 일꾼의 품삯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형식화된 이야기 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사람들의 관례와는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품삯 지불 과정에서 이 주인처럼
행하는 것은 단지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에게 공정성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불공평한 주인의 행위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적인 공평성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잣대는 인간의
잣대와는 완전히 다르기때문입니다.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별을 꾸짖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며 그리고 새롭게 차별을 만드는 인간의 악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이
어떤 공로나 업적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감사하지 않을 때 인간의 악의는 나중된 자가
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어떤 권리를 하나님과 흥정을 원하는 사람을 비판합니다. 먼저 고용된 일꾼들의 일이 하나님
나라와의 관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초청을 받았을 뿐 어떠한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히 자신의 종교적인 집착에 대한 정당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정당성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위험합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가 빚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신실함
위에 기초를 둔 우리 모두에게 거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의 자기 의와 자기 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심지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인간의 자기주장까지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것은 모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인간의 잣대를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권리의 특징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있습니다.


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법적인 계산과 관습과 관련이 없는 주님이심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행위는 법의 경계를 넘어가며 불의를 향하지
않으며 선한 뜻의 불공평함을 지향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정의를 왜곡하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선행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자비하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뜻인
자비로 모든 이들에게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품삯은
하나님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의 행위이며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공적보다도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구원 그 이상의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구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하나님의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똑 같습니다. 각 사람마다 공적이 서로 다루지만 모두 똑같이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받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여 그
이상 더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얕보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터 멀어지지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특별한 품삯을 요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선물의
소유자이시기에 우리들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길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롭게 구원의 선물을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모든이들에게 선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포도원의 일꾼들이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불평할 모든 경우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Amen

중보자 욥

  • 연합 예배 (2002년 11월 03일)
  • 욥 42:7-17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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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슈토렉
제목: 중보자 욥
본문: 욥 42, 7 – 17

<본문>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설교>
종교대표자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 그리고 그의 두 친구들이 마침내 입을 다물고 번제를 드리러 욥에게 가야만 합니다.
사탄이 시작한 이 죄의 사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여호와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설명들 사이로 진리의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종교적인 연설이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거친 간구가 옳았다고 인정 받았습니다.

욥의 위치가 처음으로 현저한 변화를 겪고있습니다.
그때까지 큰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사람이었으며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공허한 하늘과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 가장 깊은 심연과 마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사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요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 같은 것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고 예수님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택하여 준비하였고 너는 나의 도구가 되리라. 왜냐하면 이 세상을 위해 너로 간구하게 하길 원하며 그리고 이 세상을 더없이 멋지게 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서 처음에 사탄(사탄은 고발자란 뜻이 있음) 즉 고발자의 말이 나오고 욥기서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이 찾은 중보자로서의 욥의
마지막 말이 나오고, 하나님은 욥을 고통을 통해 지옥과 무덤과 같이 인간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 없이 외로운
곳에서 그의 중보가 모든 능력을 갖도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행복하게 삽니다.
인간의 눈에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중보의 사명자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애굽의 요셉 같은 욥, 모세 같은 욥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같은 욥은 중보자입니다.
헛되지 않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속에 들어간 첫번째 사람이 스데반 순교자 – 자신의 원수들을 위한 중보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러한 고통을 인내한후 스데반 처럼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체코 한국 유럽 아시아 미국의 교회가 모든이들이 보도록 둔, 산 위의 등불처럼 독자적인 사명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십시오.
그 빛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지 세상에 대한 불평과 세상에 대한 잡담 그리고 세상 죄에 대한 말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직후 하나님은 욥의 운명을 바꾸었고 욥이 이전에 소유한 것 보다 모두 두 배를 받았습니다.
   

에게 모든사람들이 돌아오는 이 아름다운 말씀 – 모든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과 전에 알던 모든 사람들 그를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사람들, 그와 이야기 나누길 싫어했던 사람들,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 계속 그에 대해 무언가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지금 욥에게 돌아오고있고 욥은 오는 것을 막지도 그리고 선택적으로
오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에서 욥과 함께 음식을 먹기위해 왔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비밀로 이 세상을 위한 아버지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성만찬(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만찬은 고발과 심판의 시대가 끝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중보의 능력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모든이들이 그리고 모든이들이 그리고 또 모든이들이 성만찬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가 완전히 승리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을 찾을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금 한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그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며 위로하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저주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다 끝난 지금 욥과 연대를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의 유대는 앞서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킨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자, 거기에 모든이들이 모였습니다. – 주의 식탁이 좀 이상합니다. – 모두 죄인들이 둘러앉아있습니다.
욥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고 각기 다른 선물을 들고왔습니다.
주의 만찬 직전에 우리들도 봉헌시간을 갖습니다.
봉헌과 성만찬이 이렇게 관련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기쁨으로 예물을 가지고옴으로써 이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암나귀 양 소 약대와 기타 짐승떼들이 있습니다 – 그 주 하나님이 능력을 펼치시어 여기서 사탄의 종교적인 숫자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은 처음처럼 일곱아들과 세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들의 이름은 없고 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적이지 못합니다.
동양에서 여자들은 양지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언가 시작하는 곳 거기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그리고 거기서 욥의 딸들인 여자들이 이름을 갖습니다.
모두 의미있는 이름들입니다.
예를들어 비둘기, 육계향, 화장할 때 쓰는 작은상자 입니다.
아름다운 이름들은 실용적이 못합니다.
예를들어 돈까스 접시, 좋은 요리사 등 등입니다. (번역자- 체코의 이름가운데 예를 든 것)
주 하나님은 비실용적이고 장식적인 것에 대해 의미를 가집니다.
동방정교회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성화들이나 향들 이런 것들 없이 검소해야 된다는 개혁교도들의 전통에서 이러한 장식에 거부감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모든 축복 위에 축복을 하시고 욥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딸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을 지라도 주 하나님께 우리들이 세례받을 때 귀하게 귀하게 불려지는 우리의 이름을 들으시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식이 된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얼굴을 우리들에게 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의 얼굴이 변한 것 같이 우리들은 이제부터 변화된 얼굴을 가지고 갑니다.
어떤 성령파들 처럼 눈을 부릅뜰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일하심이 그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 그에 대해 여러분들은 아실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들에게 아들들 처럼 유산을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딸들에게 유산을 주는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특별한것입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아버지입니다.
아낌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아낌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특징을 세상속에서 드러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낭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욥은 그 후에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영광의 조상들과 결합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에대해서 듣는 사람은 욥처럼 구원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후손을 보았습니다.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아들도 손자도 없는 사람들, 육신의 후손으로 어떠한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식탁을 함께 한 수 소망을 가진 자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욥이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 아름다운 욥의 생애의 이야기입니다.

주 늙어서 오래되어 그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질적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완벽한 성취를 이룬 생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기한이 찬 죽음을 맞이하기에 죽음을 만족하게
맞이합니다. (번역자-체코어로 기한이차다는 단어와 배가 부르고 만족하다는 단어가 어원이 같다.  그래서 기한이 찼다는 뜻은
만족하다는 의미로 이해가 가능하다.) 아멘 (Amen)

욥의 믿음

  • 연합 예배 (2002년 10월 06일)
  • 욥 11:1-3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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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슈토렉
제목: 욥의 믿음

<본문>
Job 11,1-3  +  12,1-4  +  13,2-3+14-15  +  19,25-27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개역한글판 욥 11장)

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개역한글판 욥 12장)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개역한글판 욥 13장) 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개역한글판 욥 13장)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개역한글판 욥 19장)

<설교>
왜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이처럼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욥의 대답에 불쾌해서 이토록 심한 말을 뱉습니다: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욥의 대답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하나님을 비웃는 것 처럼 들려 이와 같은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왜 성경에 이런 욥기서가 들어있습니까?
욥기서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입니까?
믿음과 신에 대한 모독이 뒤섞여 있습니다..
욥의 세친구는 문화의 세가지 영적인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전통은 고난에 대해 각 각의 자신의 해결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통들은 경륜이 있고 그 전통들의 대표들은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은 존경 받는 유대 신앙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욥을 도우려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받는 욥을 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욥이 그들의 도움을 원치 않고 있는것입니다.
정말 욥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격한 말로 무엇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다. 12:2-3a)
그렇습니다, 욥기서는 믿음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논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교회 생활적으로 교리교육적으로 배우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생각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13:2)
욥은 그의 논쟁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심 깊은 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3:12)
무엇을 누가 힘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할것인가!
누가 감히 불의와 고통과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왜 욥이 그렇게 말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그는 나의 구원이 되리라(13:13-16)
욥은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욥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인것입니다.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욥의 문제이며 놀라운 비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이자 이것은 곧 동시에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달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기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마지막 고통의 종지부를 찍으실때 드러날 큰 비밀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물론 그 비밀 가까이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사람의 종교전통 가운데 가장 좋은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기위해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어지게 될 때 어떤 것도 마지막까지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돕지 못합니다.
어떤 신학적인 논쟁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종교적 전통의 역사적 위기까지 견디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영적 전문가들이 남용하는 언어들을 참는 것 또는 참지않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것과 지속하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새로운 시작과 갱신과 부활의 선물을 받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바닥까지의 추락과 폐허의 고통과 방황하는 의식이  살을 째는 듯한 고통을 일으키고 억눌림을 당하는 것같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때론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생명 위에, 우리들의 사명 위에, 우리들의 존재 위에, 우리들의  모든 선행들 위에 서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잿더미 위에 서 계십니다.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생명력 없는 교훈과 가르침과 달리, 유럽과 미국 기독교 전통과 달리 우리들은 지금 이시간에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잿더미로 그리고 처음 출발로 내려가고있습니다.
우리는 잿더미-상실을 겪는 것을 감행하여야 하며 그리고 많은 것을 잃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욥이 : 구원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재 위에 서실 것이라 한 것을 욥처럼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위기는 우리들에게 축복입니다.
모든 위기와 함께 위기를 겪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시대의 마지막 때 까지 말입니다.

나의 이 가죽 이 살덩이가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6-27)

가죽과 살이 없는 사람은 이미 지옥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여기서 오직 성령의 기적만이 도울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이 때의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이 고통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인간 존재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저항으로 동시에 어린이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욥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인간 존재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자리까지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이 곧 삶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원래 누구에 의해 결정됩니까?
고통이 없는 성공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래되고 좋고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현재의 그분이 미래의 그분이고
미래의 그분이 현재의 그분입니다.
유명하지 않고 그러나 동일하신, 우리들이 들었고 그리고 살아계시고 그리고 스스로 있는 분이며 결국 우리들의 유일한 이야기인 우리 각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욥의 믿음은 그의 저항으로 널리 전파되고있습니다.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 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19:27)“ 이러한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7): 삶에 대한 갈망의 작은 불꽃이 우리 안에서 연기를 내고 큰 불을 일으키게 합시다:

적들이 정의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욥을 반대하고 예수를 반대할 것이며 어떤 잘못을 찾으려고 할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그에게 전가시키려고 할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적인 견해를 폐기하지 않기 위하여 (잘못을 욥에게 전가시키려고 할것입니다.)
외견상의 종교적인 안정과 기관과 그들의 대표자들의 존경 위에 자신들의 정당함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욥은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찌니라(19:29)
욥은 우리들에게 새롭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강한 담대함과 소망으로 예수를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AMEN

우리의 통치자 어린 양!

  • 연합 예배 (2002년 09월 01일)
  • 계 5:9-10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09/01(삼위일체 열네번째 주일)
본문:요한계시록 5장 9-10절
제목:

<본문>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설교>
믿음과 기쁨으로 요한의 교회의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오늘 본문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으로 그들은 고난과 고통과 박해의 시대: 즉 재앙과 종말의 때에 소망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찬송에서 우리들은 특별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자들의 음성과 예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이처럼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긴장이 당시 국 내외 상황의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슬픈 울음 소리를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돌볼꼬?
누가 이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가?
바로 그가 이 종말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종말의 주인이 되어,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우리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심장이 멈추고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자격이 있는 자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에도 없고 또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계 5장 4절)
어디에도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다양한 구원의 계획들로 거짓말 하도록 버려두지 마십시다.

원로들 가운데 한분, 즉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분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마시오.“
아!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복음입니까!
오직 한분, 어린양 – 희생재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종말의 고통의 해결을 세상의 민족을 구원할 희생재물 어린양에서 찾았습니다.
어린양 외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어린양은 우리의 도움이요 위로요 능력이요 힘이십니다.
그래서 곧 이어 원로들의 찬송, 새로운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들이 이미 자주 들었고 어려서 부터 불렀던 이미 잘 알던 노래가 아닙니다.
새로운 노래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노래였지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옥좌가 있는 하늘에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큰 비밀의 찬송을 가르쳐 주고있습니다.
손 안에 모든 세상을 쥐고 있는 분이 앉아 계시는 그곳을 요한은 우리들이 잠시 들여다보게 합니다.
요한은 우리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하늘 보좌의 찬송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날에 갖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놀라운 꿈입니다: 성만찬 시간에 그리고 성만찬 예식의 기도의 시간에 요한이 바라 보고 있는 것 그리고 마지막 때를 완성시키는 것, 그것에 우리들은 동참해야 합니다.
어린양이 통치자가 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들은 이 어린양 가까이 높임을 받았고 걱정 근심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를 믿는 모든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누가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고!
누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습니까!
또한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기록하는 분이십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들의 죄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고난을 통해 교회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교회는 민족과 역사의 통치자를 발견합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하늘에도 땅에도 땅 아래에 두루마리를 펴고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 단 한분, 희생재물 어린 양이 계십니다.
4부합창의 찬송은 이 세상의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희생재물 어린양을 찬양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4부합창 찬송의 신학입니다.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인간의 악기나 향이 아니라 직접 하늘로부터 온 것(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민족을 피값으로 사신 그 분을 그래서 찬양합니다.

늘 본문의 9절 말씀은 어린양이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두려움을 위해서, 야망을
위해서, 수탈과 테러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서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구하였다는 하늘의 찬양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모든 것이 성취되고 있는 우리 주위를 한번 바라 보십시다!
우리의 이 예배는 단지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그 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처럼 이루고 있는 공동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애굽의 하나님 나라 제사장!
새로운 이스라엘!
왕들과 제사장들 그들은 화해와 돌봄의 섬김을 위탁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통치자가 된 것이 유효합니다.
이땅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창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민족과 나라를 억압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십자가는 우리에게 섬김의 의미입니다.
성만찬의 처음에 부르는 짧은 찬송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희생의 어린양, 그 분만이 통치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어떠한 혁명도, 어떠한 민주주의 선거도 그 어떤 것도 마지막 때에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희생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도 없습니다. (아멘)

나의 이웃

  • 한인 예배 (2002년 08월 25일)
  • 마 5:43-6:4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8/25 (열세번째 삼위일체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마태복음 5장 43절 – 6장 4절
제목: 나의 이웃

<본문>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누가 나의 이웃이며 나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의 각각 다른 구체적인 상황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2-3세기 전 이해되었던 이웃이라는 단어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모든 해석들을 이 자리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들에게 이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다시말씀드려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나는 누구의 이웃이며, 또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이질문의 관심은 내가 이웃을 결정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하고 내가 도와야 할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과 도움으로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행과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이지 선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순수하고 헌신적인 도움의 예가 됩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긴급한 도움을 어떻게 해야 본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 예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곤핍한 사람에게 재정적인 희생을 주저하지않고 그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자신과는 다를지라도 곤궁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사람, 그가 바로 이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고, 누가 나의 이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질문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누구에게든지 내가 이웃이 되고있는가 아니면 아닌가가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이 되는 사람은 성, 인종, 민족, 종교, 세계관, 사회적신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들이 이웃이 되어야 함을 우리들이 알기 위해서는  편견과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까?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상황에서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쉽게 이해 하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편견과 미움을 없애야 합니다.
편견과 미움은 역사적이거나 아니면 다른 원인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독일인에 대한 체코인, 체코인에 대한 독일인, 헝가리인에 대한 슬로바키아 인, 슬로바키아인에 대한 헝가리인,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편견과 미움을 버리자는 의미가 과거를 잊고, 다시 갈등의 관계가 일어 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을 멈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무거운 짐이 되는 관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체코인, 헝가리인 또는 일본인도 사람입니다. 50년 또는 500년전 민족과 국가가 서로 전쟁을 하였지만 그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거부하지않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약간 다른 분쟁을 소개합니다.
유럽의 경우입니다.
북 아이랜드에 개신교도들과 카톨릭 교도들 사이에 많은 미움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이나 신문에 나온 어른들이 이쪽 구역에서 저쪽 구역으로 학교를 가던 어린 아이들에게 침을 뱉는 사진을 보셨을것입니다.
내편이 아니라고 어린 아이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고 저는 그들이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단지 언제나 열성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선언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지금 위협하고 있는 사람이 나의 미움의 목표가 되지않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왜냐하면 전쟁에서 사람은 사상과 권력의 도구로서 그리고 정복을 위한 무기로서 사람과 마주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곳에서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그 전쟁에서 자기편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항해서 사람들이 서로 죽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들은 선행의 방법에 대해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좋은 기독교인들인지 보여주기 위한 동기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행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도 도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때문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며 위선입니다.
어떤것도 기대하지 않고 기쁨으로 도울 때 진실로 우리들은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에는 영광을 받고 그리고 보응을  기대하는 마음이 깃들일 자리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베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J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차별 없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구원하셨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모든 민족을 위해 보내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잊어서 안되고 사람들 사이에 선택적으로 실천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우리는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들은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사랑과 선행으로 가까이 가도록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친구도 반대자도 사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자기 자신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길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독교이며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바른길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2편 5절-9절을 노래한 사람이 우리들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롸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Amen (아멘)

<기도>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함의 온전함을 배우게 하옵소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받은 사랑으로 모든이들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세상은 꼭 필요한 사랑과 선함의 부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힘을 주사 기쁨으로 우리들이 우리의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여,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이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랑의 빚을 주님과 우리의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야 됨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가운데 계시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현존함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이세상에서 사랑의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느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