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20)

2013년 12월 20일 오늘의 말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 4장 16절)
묵상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무언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집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때문에 오늘 본문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본문에 따르면 신앙생활은 타인의 피드백에 의해
그 진실성이 서로 드러나는 집단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개인구원”으로 오리엔테이션 되어있는 성도들은
오늘 본문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려고 노력해본 성도들은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강을 건넌후에 타고 온 배를 버리는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맙고 아까워도 강을 건너면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의 교리(敎理)로
보수(保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의 신학적 주장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비유로 설명하자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갓난아기때와 청소년때와 청년의 때와
결혼하였을때의 부모와의 관계성의 그 내용은 달라져야 합니다.
사춘기때의 부모에 대한 반항심을 결혼후에도 지니고 있으면
자녀로서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교리”는 불변의 “천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내용은 자신의 믿음안에서 자꾸 성장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일들을 실천하고 그것에 전심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발전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발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제목
1. 성장하는 바른 믿음을 가졌는지 자신을 깊이 성찰하십시다.
2. 세상과 가정과 교회에게 영향을 주는 성장하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하십시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9)

2013년 12월 19일 오늘의 말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장 11절)

두아디아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사도행전 16장 14절)
묵상
우리 기독교의 신앙 가운데 하나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말은 “무한한 자원” 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준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믿음은 “말”로 고백되고 표현됩니다. 
그 믿음의 말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물질적 축복이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은 공허하지않고 그 말속에 “의도(뜻)”와 “실상”이  담겨있습니다.
말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 말”의 중요한 목적은 사람과 피조물에게로의 “전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자들입니다.
말은 씨앗과 같아서 후에 열매가 나타납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의 말이 당장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도의 말이 그와 같아야합니다.
성도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합니다.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열매를 맺어주려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어야 가능합니다.
“말”에 조급함을 갖지않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의 담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내 마음에 담지하려면,
성도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열어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이 내 안에서 육화되지 못한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빈껍데기이며
소란하게 굴러가는 빈수레의 소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소서.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어주소서
3. 나의 말이 믿음의 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있는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7)

2013년 12월 17일 오늘의 말씀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세기 35장 2절)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누가복음 12장 34절)
 
묵상
 
창세기 오늘 본문은 야곱이 자신의 믿음의 뿌리로 다시 돌아가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망자로 원치않는 해외생활에서 맨주먹으로 자수성가를 하였지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왜곡된 인생의 부담은
언제나 마음에 돌덩이를 하나 얹어놓은것 같았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믿음의 뿌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왜곡되고 잘못된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야곱처럼 나그네와 같습니다.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듯이, 우리의 영혼이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하나님의 품입니다.
죽음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여정은
예외없이 모두가 겪어야하는 현실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일년을 365일로 구분을 해서 시간을 계산하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의 때 곧 인생의 뿌리로 다시 돌아가는 때가 있음을
기억하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이제 2013년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해의 새로운 시간을 다시 맞이하는 송구영신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시겠습니까? 
기독교 교회의 송구영신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림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보물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물로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외의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하는 회개의 기도 시간을
단 5분이라도 골방에서 보낼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대림절 세번째 주일 류광현 목사님의 설교를
여러분 모두가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대강절은 기도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기도제목
 
1. 나의 마음에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회개의 영을 허락해 주시길 기도하십시다.
2.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3.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6)

2013년 12월 16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편 13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에베소서 6장 16절)
묵상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악과의 싸움을 홀로하고 있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방패처럼 호위합니다.
방패는 공격 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소멸해버릴 공격무기가 아닌
방어무기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믿으면 시험과 불행과 죄짓는 마음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안에서 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죄를 범하였습니다.
야곱도 이삭도 욥도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사울왕도 다윗왕도 솔로몬 왕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사악한 죄를 졌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바다를 갈라 육지가 되게하고,
강력한 애굽군대로 부터 보호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에서 물을 내고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일상생활로 삼고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를 범하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도 변함없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죄 때문에 매일 절규하였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2-24)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며 죄와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서 죄인이 환영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판의 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고 순결하시고
공의롭고 의로우십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때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죄를 지을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유대전통 종교문화의 틀 속에서 이해를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초대기독교 교인들은 천국과 지옥과 말씀의 개념을
불교와 유교와 샤머니즘에 의해 이해한것과 같습니다.
전 세계 모든 열방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개념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한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이성과 과학의 방법으로, 철학자들이 사유와 논리의 방법으로
부분적인 탐구를 통해 세상의 원리와 그 의미를 발견하듯이
우리 기독교 교회의 믿음의 지식 바로 그런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분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이 되실때 특정한 문화와 콘텍스트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주적인 차원을 갖는 것입니다.
시공간의 틀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이해하는
제사장과 제사의 역할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매일 죄로 인하여 고난과 죽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의 부끄러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죄로 더러워져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죄용서의 은혜가
우리를 방패처럼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으면 됩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베풀어주신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영광의 기쁨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심을 믿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2. 죄와 더불어 살아가지만 나를 선택하신 주님의 사랑에서 그 어떤것도 그 사랑을 끊을것을 수 없음을 굳게믿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3. 우리 꼬빌리시 성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부터 우리를 구속할 구주이심을 한 마음으로 믿고, 함께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세상이 복음을 아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4)

2013년 12월 14일 오늘의 말씀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잠언 21장 21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묵상
잠언은 인간에게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의와 인자 입니다.
체코어 성경은 “공의”를 “의”로 “인자”를 “자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의와 인자는 다른말로 의와 사랑입니다.
잠언은 인간의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 “의”와 “자비(사랑)”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의로 즉 우리를 인생의 방향과 목적,
비전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의심합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의와 자기 중심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믿고 따라 사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위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희망이 없어보일지라도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며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인내할 수 없습니다.
인내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실존 속에서 성육신화되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하여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깊은 뜻을 깨닫는 대강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인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내가 생명과 치유와 풍성과 영광의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인격과 성품이 되게하옵소서.
2. 사랑으로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며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는 신자 되게 하옵소서.
3. 믿음의 인내로 생명과 치유와 풍성과 영광의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