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3)

2013년 12월 13일 오늘의 말씀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시편 119편 73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장 12절)
묵상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리학자들의 논리와 증명에 의하거나,
철학자들의 사유의 논리에 의해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과 그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이 하나님을 체험한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을 만들고 세우시는 분”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존재는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세워져가고 있습니까?
현재 나의 모습은 무엇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무엇으로 성숙해져 가고있습니까?
왜 나는 공부를 하고 있고, 직장생활과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왜 나는 여가 생활을 하고, 건강을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세워가고 있는 인생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오늘 시편기자가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을 향해 열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게됩니다.
다름아닌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외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만들고 세워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 속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뚫고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후
“사랑의 영”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모든 은사들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2013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 계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세워지기를 갈망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이번 크리스마스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여 도우소서.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2)

2013년 12월 12일 오늘의 말씀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편 51편 8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한1서 3장 1절 상반절)
묵상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지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다윗은 “다윗의 참회시”로 불리우는 오늘 본문 시편 51편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깨달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은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죄악 중에 출생”(5절)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어떠한 죄인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없이 설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용서의 은혜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단지 죽은후에 천국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증표는 오늘 현재 나의 삶과 그 삶의 자리가
온전하게 치유되는 것입니다.
나의 현재 시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뚫고들어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여 새피조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새피조물의 표지는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참여하게 합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열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모으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하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직하게 자신과 대면을 하면
자신 안에 영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자연스럽게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가 되는 요청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됨이 없는 증언행위를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행위는 복음과 배치됩니다.
실제로 분열된 교회들의 복음 증언은 복음의 내용을 왜곡시킵니다.
그리고 복음 증언의 진정성을 세상은 의심합니다.
오늘 시편 본문 17절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되게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는 그 출발이
다름아닌 다윗이 노래한 “상한심령”입니다.
기도제목
1. 회개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2. 주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0)

2013년 12월 10일 오늘의 말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장 1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여 성내기도 더디하라
(야고보서 1장 19절 하반절)
묵상
우리 모두는 다 고등교육이상 교육을 받았고
더구나 해외에서 유수한 대학까지 졸업한분들도 계십니다.
교육을 받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대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서 사회적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도록 하는것입니다.
소통의 수단은 말입니다.
소통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 들을 줄 아는것을 전제로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그 의중을 이해해야 말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에 대해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줄 모릅니다.
기독교 진리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진리를 전파하려는 열망을 갖게됩니다.
진리인 복음은 그 안에 전파력과 폭발성이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의 시기에 서구 기독교세계가
문화적 우월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결과 우리들은 들을 줄 모르는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어떤 일본 신학자는
기독교는 교사 컴플렉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진리는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전파의 선교는 성령님의 일입니다.
우리 즉 기독교 교회는 그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듣는 것이 순서입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듣지못하고 일하는 교회는
성령님의 일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것입니다.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진 크리스천들은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귀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오늘 본문의 단어는 순종한다 깨닫는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듣고도 순종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판단한다면 아무소용이없습니다.
믿음은 잘 듣고 순종함으로써 그 깊이가 더해지는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들음의 원리는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신앙심이 좋은 사람일 수록 이웃의 말을 경청하고
경청할 뿐 아니라 그와 공감을 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웃의 말을 듣고 자기 가치관으로 그 말을 판단을 한다면
이웃의 말을 듣지 않는것 보다 나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내면화되어있으면
그 행동양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죄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 수록 도덕적으로 아무리 자신이 선할지라도
죄의 본성은 남아있어 자신의 판단이 기준자체가 불안전함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자신의 그러한 죄성때문에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여전히 알지못하게 남아있는
편견, 고집, 선입관, 이해관계, 편가름을 하려는 쓴 뿌리가 있음을 인정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좋을 수록
듣는 일에는 속히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우리가 어떤 신앙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듣는 일은 속히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하는 행동양식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다니엘 12장 4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빠르게 왕래하고 지식이 풍성해진다도 했습니다.
요즈음 IT와 통신의 발달을 보면
마지막때의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타 기업보다 먼저 개발하고 먼저 제품화해야되는 경쟁의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것은 듣는 것은 전광석화같이하고
말하는 것은 일흔번씩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흔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참고 인내하며 더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제목
1. 오늘 나의 말하는 모습, 이웃과 소통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중심적인 나의 모습을 회개할 수 있도록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2.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그 뜻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성탄절기가 되게 하옵소서
3. 우리도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겸손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이여 도우소서.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09)

2013년 12월 9일 오늘의 말씀
바울의 기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장 17-19절)
묵상
오늘 아침에는 제가 체코 프라하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온지
20년이 되는 날 아침에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에게 보내드린
편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 옛날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오늘 저를 위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오늘 이 아침에는 바울의 기도에 따라 필요한 곳에 저의 이름을 넣어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자신과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2013. 11. 23.
선교지에 온지 만 20년되는 아침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체코 슬로바키아 동역자 여러분들께,
 
다른 날과 다른 오늘 아침입니다.
또 다시 저의 내면의 생각들을 왜람되게 메일로 함께 나눕니다.
부족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년전 오늘 프라하로 왔습니다.
30대 후반, 존재론적 신학적 방황의 끝이 선교사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실존적 고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20대와 30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민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제가 평생 씨름해야될 소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뒤돌아보니 치열하게 시작한 프라하의 삶이었던것 같습니다…
몇가지 자기씨름의 과제와 원칙을 가지고 시작한 삶이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처음 이곳 체코에서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관점(Perspective)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없는 선교사의 선교활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한번 진지하게 던져볼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정도 나의 무지가 벗겨졌을때,

비로소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땅에서 평생 씨름하며 헌신해야할 과제가 
제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뒤돌아 보니 그 기간이 무려 10년이었습니다.

10년은 지금까지의 모든 삶과의 단절과 스스로 고립된 삶이었습니다.
10년동안 외부와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평생 씨름해야할 나의 소명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관심을 가질 겨를이없었습니다.


온 가족이 체코사회를 더 알아가는 일에 한 마음으로 올인을 하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가족들의 도움없이 그리고 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이 과제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런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의 다른 한국 선교사들로 부터
오해와 비난을 때론 받았습니다.

두문불출의 10년 뒤에

하나님은 한국인 선교사들의 공부하는 모임으로 저를 처음 불러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고립감과 여전히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선교학적 반추를 하며 일해야 겠다”는 방향이 다시 설정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10년을 살아온 지금, 저는 또 다른 변환점에 서있습니다.

선교사란 무엇인가?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본래의 정체성 질문으로 돌아오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PCK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선교사 여야 할까?
후원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은 친적 아비집을 떠나고
심지어 귀하기 귀한 독생자 이삭까지 바치지 않았는가?

선교사라는 타이틀 이전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아닌가?
왜 내가 PCK 선교사 여야 할까?
정말 PCK 우산 아래 있는 전세계 우리 선교사들은  교회 공동체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신념을 추구하기 위한 집단인가?
보편적 교회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용납할 수 있는 가시적 교회의 경계란 어디까지 일까?

앞으로 이 땅에서 내가 묻히는 그날까지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체코 슬로바키아 선교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랑과 기도와 관심과 격려가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길가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넘어진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마지막 남겨둔 저의 시간들이
주의 은혜 가운데 지날 수 있기를 기도해 주십시요.
 
여러분들의 사랑과 기도로 지나온 만 20년이 되는날 아침에…
 
프라하에서, 여러분의, 이 종 실 드립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07)

2013년 12월 7일 오늘의 말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시편 31편 23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
(요한복음 10장 14절)
묵상
오늘 시편 31편 전체를 읽어보시면.
시인은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 되니,
고통과 고난 속에서 당황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지 말고,
의젓하게 의연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을 받게되면 감정의 벽이 얇아집니다.
모든 상황을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게됩니다.
그래서 고통과 고난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자기중심적으로 빠지지않고
하나님을 나의 고통과 고난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고난이 은총과 파멸의 결과를 가져오는
갈림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인생을 혼자 살아갑니다.
나의 고통과 고난을 대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고통과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나의 소리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이 자기의 소리인지 주님의 소리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 속에서는 이 음성을 분별하려고
성도는 안간힘을 씁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마음상태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고난이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정의와 불의,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평안과 불행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너머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됩니다.
고통과 고난에 대해 자포자기, 금욕, 자기합리화나
자학적인 어둡고 칙칙한 패배적인 태도를 갖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우리 상태의 가장 밑바닥, 우리 영혼의 가장 밑바닥
모든 것이 불에 다 타도 타지않고 남아있는 그것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온갖 수모와 억울함과 불행에 대응하기전에
먼저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고통과 고난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됩니다.
기도제목
1. 오직 주님께 나의 시선과 생각을 고정시킬 수 있는 영적 집중력을 허락하소서.
2. 세상의 소리보다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소서.
3. 온갖 불의와 불행과 인간의 교만과 실수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사랑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뢰하게 하옵소서
4. 한해를 잘 마무리하여 한해가 보람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