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9)

2013년 4월 19일 오늘의 말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레위기 19장 14절,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7-8절, 표준새번역)
묵상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앞을 보지 못한다고 그 길에 장애물을 두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반열에 불러주신 사람들의 모습이 그래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모습이 성도인 나 자신안에 없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인 교회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 질문하게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명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대형교회를 
찾는 다고합니다.
조그마한 해외의 한인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교인들이 뒤에서 수근거리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대화하려하지 않고 
불만과 불평을 뒤에서 늘어놓습니다.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별의별 험담을 합니다.
사실을 침소봉대 하고, 없는 것조차 보태지지기도 합니다. 
장애물을 만들어놓고 넘어지게 만들고, 결국 분쟁을 일으킵니다.
분쟁이 생기면 그때부터 불구경하듯 남의 이야기 하듯 비판합니다.
모든 분쟁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소위 성도들이 모이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국가조찬기도회에 모이는 분들을 보면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요즈음 신조어가 “강남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실세들 가운데 “강남 크리스천”들이 많은데서
나오는 신조어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부정부패의 비리에 얽힌 인물들 가운데
“강남 크리스천”들이 등장합니다.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한 인물들 가운데도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않는 다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붉은 주홍빛같은 죄를 지었을 지라도
죄를 지은 사실때문에 죄인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가 있다면 용서와 사랑으로 용납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교회는 바로 이 정의를 세상 속에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자신있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한 죄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용서하는 은혜가 있는 곳은 오직 교회 밖에 없습니다.
잘못을 끝까지 낙인찍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가
저의 심령 깊은 곳을 비출때
비로서 나는 죄인임을 알게됩니다.
당신의 은혜는
죄로 얼룩진 나의 마음을 찌릅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아프지만 시원하고 통쾌합니다.
막힌 눈물샘이 터집니다.
막힌 가슴이 열립니다.
참된 회개는 치유이며 
용서의 은혜의 물꼬를 트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회개를 하고
서로 용서와 용납으로 막힌담을 무너트리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개인과 교회와 사회와 민족 가운데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섬기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8)

2013년 4월 18일 오늘의 말씀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장 57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브리서 13장 5-6절)
묵상
우리들이 살아가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가치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불안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물질적 축복을 누리는 것을 등식으로 하는
소위 번영신학 기복신학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재물 즉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돈의 흐름에 따라
배신과 아부의 두 얼굴을 손바닥 뒤집듯이 합니다.
조그마한 물결에도 그의 삶은 요동을 칩니다.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진리도 알 수 없습니다.
돈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돈으로 지배하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헌금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지 못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오히려 삶의 토대가 더욱 든든해 집니다.
있는 것으로 자족할 줄 압니다.
모든 것에 감사가 넘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사람들 눈치를 보는 주관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인생의 가치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되며
이런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이
내 안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당신을 믿는 다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7)

2013년 4월 17일 오늘의 말씀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38편 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장 12-13절)
묵상
우리가 인생의 고난 한 가운데 있을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다는 것은 우리를 매우 흥분시키는 일입니다.
심장을 찢는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오며 
확신과 삶의 의욕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부터 솟아오르게됩니다.
옳고 그름을 바르게 깨닫게 되고, 용서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서 
두려움이나 염려가 사라지고 인내의 마음이 생겨나게됩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의 과정은 신앙의 성장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과 판단과 주장을 포기하게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자기 주장”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 열매를 맺게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고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를 드러내고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삶으로 연결됩니다.
진실되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늘 시험을 당합니다.
자기 주장과 판단과 편견과 이기심으로 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때 마다 
당신의 응답을 헷갈리게 만드는 시험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놓치못하는 이중적 삶에서 오는
불안과 자기분열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시험에 빠집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당신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험의 고통 속에서 바른 믿음의 길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6)

2013년 4월 16일 오늘의 말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장 6절)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후서 2장 22절)
묵상
새벽 묵상을 적기위해 컴퓨터를 열자
체코포털 뉴스에 어제 밤 9시 일자로 속보가 올라와 있네요.
보스턴 국제마라톤 대회중 테러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간의 역사이래로 많은 학살들이 있어왔습니다.
만약 우리의 고국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아마 인류역사에 다시 없을 대량살상의 비극이 일어나게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이 비극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종군기자들이 한국으로 속속들어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전쟁의 목적과 배경은 다양하겠지만 결국 전쟁의 명분은 
인간들의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주장 입니다.
테러범은 테러범대로, 남북한은 남북한대로 자신들의 정당한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살상과 학살을 “거룩한 전쟁” “민족해방전쟁”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대응”으로 미화합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살상은 살상이고 학살은 학살입니다.
대량살상과 학살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세우기 위한 많은 평화협정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차별과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전쟁없이 유지시키기 위한
권모술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각 나라 정치인들은 잘 알고 있어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각 나라들 마다 더 파괴력이 있는 
새로운 첨단 무기들을 생산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생산된 무기들은 전시용으로 사용되다가 언젠가 폐기처분되는 
쓰레기로 만들기는 너무나 비싼 물건들입니다.
전쟁의 소문이 날로 더욱 커져가는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 평화를 만들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세상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끗한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늘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회개의 마음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입니다.
이 세상의 참된 평화가 건설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기도
주님,
테러와 전쟁의 소식과 위협으로
새날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신의 마음을 느껴보기를 원합니다.
음흉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거룩한 전쟁” “민족해방전쟁” “구국의 길”로
포장한 간계한 목소리들에 현혹되지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는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깨끗한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제 마음의 동기들을 조사해 봅니다.
주님이 나를 보듯이
저가 제 자신을 그렇게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의 동기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제 존재의 깊은 곳과 중심이 
너무 너무 어둡고 혼탁합니다.
주님
저를 고쳐주시옵소서
바른 믿음을 갖게하옵소서
나를 향한 당신의 용서의 은혜가
이웃을 향한 나의 용서와 사랑이 되게하옵소서.
당신의 참된 평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하옵소서.
깨끗한 마음을 갖지못한 인간들의
모든 힘과 노력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오직 당신이 이루는 평화가 
오직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 땅 모든 곳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5)

2013년 4월 15일 오늘의 말씀
나의 규례를 실천하고, 나의 율례대로 살아가면,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죄악 때문에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에스겔 18장 17절하반절, 표준새번역)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 표준새번역)
묵상
오랜만에 새벽묵상을 보내드립니다.
4월 첫째주는 유럽선교회 모임으로
그리고 지난주는 이런 저런 회의들때문에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오니 두 주간만에 훌쩍 커버린 손녀 이야기를 
아내가 재미있게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수북히 놓여있는 콩 모두가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움켜잡아 보아야 서너개 밖에 잡을 수 없는 고사리 같은 여린손으로
움켜잡은 콩을 놓치않고 한알이라도 더 손안으로 밀어넣기위해
꽉 움켜잡은 손의 엄지와 검지만을 간신히 펴서 
다시 콩알 한알을 더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구개월짜리 손녀를 보면서 
아내는 많은 것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선물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이 인간의 불행인것 같습니다.
이 불행을 누가 가르쳐준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부터 인간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원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러한 인간의 불행은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와 가정과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을 찾아 사회적 동물로서 행복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인간의 행복은 
우리는 우리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임을 알고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주님 안에서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운 내 인생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인생은 좋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섬김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섬김을 통해 인생의 행복의 길과 진리를 
이 세상 속에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그 길과 진리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대의 세상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세상에 물든 눈으로
그 길과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것과 우상 숭배가 뒤섞여 있습니다.
믿음은 회개없이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을 회개해야될지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서 배운 눈으로 
당신의 길과 진리를 따르겠다고 
말만하고 있습니다.
저의 잘못으로 부터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목사님 보내주셔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니 감사
체코교단 총회 폐회예배를 우리 교회에서 드리기로 하신것 감사
연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것 감사
부족하지만 순종의 마음을 허락하신것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