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8)

2013년 3월 8일 오늘의 말씀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편 18편 7절)

그러나 제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 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2절, 표준새번역)
묵상
“내 소리를 들으셨다”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편 기자인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부르짖음, 그의 소리가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향한 소리이며 부르짖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4절과 5절에서 자신이 겪은 환난을 
그림언어로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큰물이 나를 두렵게하고”
“지옥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
이와같은 환난 속에서 응답없는 공허한 부르짖음의 고통의 끝을 
인내로 보게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않아 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한 순간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판단과 실수는 작게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그 것이 나에게 환난이 되어 돌아올때는 
수천배 수만배의 큰 고통의 크기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이 없습니다.
그 사이 환난은 나를 더 옥죄이고
더욱 판단을 흐리게하고, 심지어 내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기도는 하지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과 잔꾀를 생각하게됩니다.
기도는 하지만 폭풍우에 춤추는 나룻배처럼 
내 삶과 내 존재는 두려워하고 흔들립니다.
이전에 했던 인간의 한계를 환난 중에서도 드러내게됩니다.
일은 더욱 더 꼬여갑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보다 두려움에 더욱 빼앗기게되고
내 기도는 점점 내게서 멀어집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잡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기자의 간증이요 증언입니다.
정말 인간의 실패는 자신의 실수와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듣지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성경이 증언한대로 오신 메이야 이다”라는 증언을 
사람들이 듣지않고 오히려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허물이 많은 자들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희망의 종소리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서 오신 예수의 증언을 
듣지않는 것이 정말 절망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이 증언한 것을 증언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듣지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증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잡아라”
“환난 중에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러면 들으시리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거스리는 역사의 흐름안에 서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문”만이 놓여있습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
환난 중에
어떤 두려움이나 분노와 좌절도
내 마음을 빼앗지 않도록 하소서
내 마음은 오직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온전히 의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께 기도하게 하소서
비록 기도 소리가 
메아리 조차 없이 사라질지라도
내 마음이 공허하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귀에 내 소리가 들릴때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인내가 곧 믿음임을 알게하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7)

2013년 3월 7일 오늘의 말씀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는 만물의 머리 되신 분으로 높임을 받아 주십시오.
(역대상 29장 11절, 표준새번역)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계시록 14장 7절 하반절, 표준새번역)
묵상
오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올린 다윗의 감사 기도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이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에게 성전대신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portable 이동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예루살렘에 고정된 움직일 수 없는 건물입니다.
성전건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임을 확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에게는 성전건축은 그의 숙원사업이었습니다.
성전 건축 완성은 민족적 축제였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준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였습니다.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이스라엘은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들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경험을 했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 배불리 먹었고
40년동안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의 도움으로 광야에서 생활을 했고
막강한 군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반석에서 샘이 터져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이스라엘은 체험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가 
바로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망했고 솔로몬도 망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율법과 제도로 대신하려고 했기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었던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를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제도화된 권력과 기득권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중세 기독교회가 망한 이유도 이와같습니다.
지금 한국개신교회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느끼고 보지못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망하는 길로 휩쓸려가게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한계와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가난하고 힘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마 1:23)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의 인간이 만든 제도와 기관안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시고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명예 소유 건강과 소속감을 주는 일체의 조직과 제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삶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나의 모든 것이 당신으로 부터 온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는 이 고백이
내 삶의 안정과 소속감을 제공하는 
소위 “축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지라도
드릴 수 있는 고백이 되게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며 드릴 수 있는
고백이 되게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6)

2013년 3월 6일 오늘의 말씀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상 2장 3절)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일서 3장 18절)
묵상
오늘 본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하나의 감사의 찬송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이를 갖지못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게되자 그녀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불가능한 상황을 기도로 극복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나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하나님께 매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과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을 단련하듯이 
기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모든 지꺼기를 불태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게 서게됩니다.
기도는 하면 할 수록 내가 내려놓고 회개해야될 것이 보이고
그래서 더욱 더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쳐져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응답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1절부터 10절까지 한나의 감사 기도와 찬양을 읽어보시면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이 소중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 깨달은 만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기도
주님,
하나님을 진실되게 깨닫고
기도의 응답을 받은 체험자들의 증언을 들으면
하나같이 고백하는 것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사무엘의 한나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사는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가르침 “사랑과 믿음”을 머리로만 알고있고
달콤한 영적유희의 감정에 탐닉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믿음의 성장인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영적 행복감과 만족감이
진실된 마음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순종함으로써 
오는 축복이 되게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5)

2013년 3월 5일 오늘의 말씀

그러므로 내가 다시 한 번 놀랍고 기이한 일로 
이 백성을 놀라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지혜가 없어지고
그 총명한 사람들에게서 총명이 사라질 것이다
(이사야 29장 14절, 표준새번역)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기이한 일과 
여러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함께 증언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4절, 표준새번역)
묵상
성경은 “지혜”를 대단히 높은 기독교의 가치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111편 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요즈음 국가의 높은 직위에 임명되는 분들의 청문회를 보면
많이 배우고 가진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정말 우리들 시대가 유지되는 것은 지혜가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마지막때에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지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이 “지혜”가 사라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진공상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부터오는 즉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지혜”로
가득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3장 15절)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의 모습은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 (약 3:15)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이 이 마음에서 비롯된것은 아닌지 
자기성찰을 할때 영적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이러한 세속적 지혜의 마음과 자랑을 회개할때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주십니다.
즉 예언, 방언, 믿음, 방언의 통역, 구제하는것, 가르치는것, 권유하는것,
긍휼을 베푸는것, 영분별을 하는것 등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위한 선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설명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나 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회로서 함께하여야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주님,
저는 하늘로 부터오는 지혜가 사라지고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인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으로 고통당하는 
죄인입니다.
나의 모든 자랑은 진리를 거스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심판하지 마옵소서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는
나의 삶을 갈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오직 당신을 찬양하고 높일 목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옵소서.
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가장 앞세우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에 따라 내게 주신 성령의 선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당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충성을 다하는 청지기가 되게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맑은 날씨와 햇빛을 주셔서 집안 식물들이 잘자라게 하시니 감사
어린 생명의 성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게 하시니 감사
어려운 마음 겪는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실 줄 믿으니 감사.
어린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처럼 우리를 사랑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니 감사
하늘로 부터 오는 지혜와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지혜를 분별하게 하시니 감사
회개의 결단이 부족해도 늘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잃지않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4)

2013년 3월 4일 오늘의 말씀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편 44편 27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1절)
묵상
시편기자의 간구를 보면 단순히 간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자주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예를들어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처럼
오늘도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명령합니다.
명령 형식을 띈 간청을 구약에서도 보게됩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입니다.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신약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명령식으로 간청하는 모습이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정말 위기에 빠진 절박한 사람들의 간청은 명령형입니다.
구차한 수식어가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절박한 위기를 느끼는 사람만이 
참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나는 기도하지 못할 만큼 부요합니다.
불완전한 진리에 만족하는 게으름으로
나는 참된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는 미사여구가 많습니다.
나의 기도는 내 자랑이 많습니다.
개 취급 받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은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영적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있어 참된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를 구원하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가 멈추면 불만이 차오르는것을 알게하시니 감사
모든 성도들이 참된 믿음을 갈망할 수 있기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영적 게으름과 진실된 믿음의 차이를 깨우쳐 주시니 감사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심령을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죄인과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성도들에게 물질축복을 허락하시줄 믿고 간구하게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