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7. 자유의 여명과 획득 1781 – 1918

7. 체코개혁교도의 자유의 여명과 획득 1781년 – 1918년

오랫동안 지속되던 반 종교개혁이 내적 외적으로 체코의 개혁교도들을 무기력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서 160년간 극심한 박해의 시대에 약 8만 명의 비밀 개혁교도들이 존재하였다. 결국 계몽주의 시대의 통치자 요셉 2세 황제가 종교의 자유의 평화를 선언하였다. 1781년 10월 13일 합스부르크 군주국 지역의 비카톨릭교도들에게 종교의 관용을 허락하는 “관용의 칙령(Tolerancni patent)”이 발표되었다. 관용은 사실상 로마카톨릭 교회의 엄격한 감독 아래에서 개혁교도와 다른 소수 신앙 집단에게 허락한 종교의 자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의 선언이 그때까지도 존재하였던 “지하”개혁교도들에게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은 그들에게 교회조직과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가능성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전통적인 개혁신앙고백”은 허용되지 않았고 단지 아우크스부르크(루터의 신앙고백)나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두 개의 신앙고백밖에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후스파와 형제단의 체코 후예들은 실망을 하였다. 처음에 등록한 70,000명의 개혁교도 가운데 대부분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보다 자신들의 예전에 가까운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선택하였다.

황제의 관용의 선언은 100가정 또는 500명의 신도가 등록된 곳에 개혁교회 공동체의 설립을 허용하였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는 교회당의 탑과 종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고 그나마 그것도 마을의 변두리에나 가능하였다. (이것을 후에 “관용의 교회당들-tolerancni kostely” 이라고 부른다.) 교회 공동체들은 자신의 설교자를 임명할 수 있었고 후에 교회학교의 교사를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례비는 반드시 로마 카톨릭 기관에서 지급하도록 되어있었다. 개혁교회의 어떠한 선교활동도 금지되었고 새롭게 등록하는 개혁교도는 로마 카톨릭 사제에게 특별한 “종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처럼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선포된 후 5년 만에 루터의 신앙고백에 19,000명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59,000명 해서 모두 78,000명의 개혁교도들이 등록하였다. 1787년에 76개의 교회 공동체가 조직되었고 53개의 교회학교가 설립되었다.

관용의 교회들이 존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 개혁교회와 슬로바키아의 루터교회 설교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영적인 돌봄의 희생과 형제애로 초기 관용의 교회의 가난과 또 다른 많은 어려움에 당시 개혁교도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관용의 시대는 완전한 종교와 교회의 자유로 가는 여정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되었다.

100여 년 간의 영적인 투쟁이후 특별히 1848년 혁명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 이후 1861년 4월 8일 황제 프란띠쉑 요셉 1세의 “개혁교도의 칙령”에 의해 체코 개혁교도들은 로마 카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체코 민족의식은 후스파와 형제단의 전통을 고취시켰다. 개혁교회 공동체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에 더 많았으나 도시에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개혁교도들이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혁교도 가운데 유명인사들로 두쉑(C. Dusek), 슈베르트(V. Subert), 야나따(J. Janata), 하옉(J. L. Hajek), 쉐베스따(F. Sebesta), 뽀꼬르니(V. Pokorny), 찌사즈(F. Cisar) 등이다. 개혁교 지성인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대체로 체코 역사가들이다. 빠벨 요셉 솨파직(Pavel Josef Safarik – 그의 책 “슬라브 구제도”가 유명)과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프란띠쉑 빨라쯔끼(Frantisek Palacky – 그의 책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체코역사”가 유명, 이 책은 5권 전집으로 1846-1876년에 출간)이다. 후에 초대 대통령이 된 또마쉬 마사릭(Tomas G. Masaryk)이다. 그는 진보적인 교수로 개혁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정치 철학서적은 물론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유명한 책들 – “체코 문제”(Ceska otazka, 1895년), “얀 후스”(Jan Hus, 1896년), “현대인과 종교”(Moderni clovek a nabozenstvi, 1899년)을 저술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10월 28일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설립으로 완전한 종교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300년 만에 새롭게 되찾게 된 민족독립과 종교의 독립은 많은 영적인 정치적인 힘과 특별히 개혁교회 목사들과 지성인들이 민족문화와 자기 정체성을 일깨우도록 도왔던 슬로바키아의 민족운동과 19세기 체코 민족부흥의 결과였다. 공화국 설립이후 신앙고백에 따라 두 개로 분리되었던 개혁교회가 결국 구 체코종교개혁전통을 토대로 하나의 개혁교회로 연합할 수 있었다.

[개혁교회사]6. 반(反)종교개혁 1620-1781

6. 반(反)종교개혁 1620-1781

초기에 다른 나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독일 종교개혁과 달리 체코 종교개혁은 30년 전쟁(1618-1648) 기간과 그후 체코의 100년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탄압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드 2세에 저항하는 1618년 체코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그 혁명은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체코 개혁주의 귀족들(팔쯔키의 베드지흐 – Bedrich Falckeho가 체코 왕으로 선출된 직후 잠시 동안 형성되었던)이 1620년 11월 6일 프라하 근교의 빌라호라(Bila Hora : 백산)전투에서 완전히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후 300년 동안 90%가 개혁주의자들이었던 체코 영토에서 종교의 자유가 상실되었다.

27명의 체코 개혁주의 귀족 지도자들이 1621년 6월 21일 재판을 받고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처형을 당했다. 개혁주의 귀족들과 평민들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거나 아니면 추방을 당하였다. 로마 카톨릭과 유대적인 사람들은 예수회의 반종교개혁 활동을 도왔다. 그 당시 30,000명이 추방을 당했는데 그 중에 형제단의 마지막 감독인 꼬멘스끼(J.A Komensky)가 있었다. 지위를 박탈당한 추방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은 유럽전역을 방랑하며, 젊은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곳, 영적인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곳(경건의 실천) 그리고 민족간의 평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30년 전쟁을 마무리짓는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협정(vestfalsky mir)이 체코 영토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흩어져 있는 체코 개혁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리고 1670년 꼬멘스끼가 마지막 망명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체코 개혁자들의 희망 없는 상황을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고별의 글 \”죽어 가는 어머니(형제단)의 유산 (Ksaft umirajici matky – Jednoty bratrske)\”을 썼다.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무덤은 현재 네덜란드 나르덴(Naarden)에 있다.

야만적인 \”반종교개혁\”은 160년 간 계속되었고 \”흑암의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당시에는 공개적인 개혁교회의 삶은 눈곱만큼도 허락되지 않아 체코 영토 내에는 어떠한 종교개혁의 유산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체코인들에게 종교개혁의 믿음의 불꽃이 결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침묵\”, \”감추어진 씨앗\”으로 불린 종교개혁자들의 비밀 신앙 소그룹이 불법적으로 모였다. 그들은 비밀 예배 집회를 위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 바위, 계곡에 모였다. 이웃나라 작센 공국(옛 동독지역)과 폴란드에 살고 있는 체코 종교개혁 추방자들이 정규적으로 그들을 방문해서 영적으로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 비밀 체코 개혁자들은 예수회와 군인들이 수색하고 있는 자신들의 옛날 성경과 종교 서적들은 여러 다른 장소에 보관하였다. 후에 독일에서 출판된 새로운 성서와 종교 서적들과 찬송가들이 비밀리에 체코로 배달되어 조상들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데 도움을 받았다. 외국 귀족과 시민들(특히 대부분이 독일인)이 합스부르크 통치자의 초청으로 체코 영토로 이주해 옴으로써 반종교개혁은 더욱 강화되어 체코인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체코 영토 내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억압적이고 게르만주의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매우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게 되어, 후에 체코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반종교개혁 시대에 신앙 때문에 추방당한 체코 추방자들과 후에 다양한 자유 의사에 따르는 이유(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음악가들 가운데)로 자신의 나라를 떠난 이민자들이, 반종교개혁의 영향이 없는 당시 헝가리에 속해있던 슬로바키아와 독일의 종교개혁 통치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후에 경건주의 신앙을 견지하던 이들이 독일 지역(작센)에 정착했다. 피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독일 지역의 정착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헤른후트(Herrnhut)이다. 헤른후트(체코어로 오흐라나 – Ochrana)는 1722년 모라바의 형제단의 후예들 – 백작 미꿀라쉬 진젠도르프(Mikulas L. Zinzendorf)에 의해 설립되었다. 1749년 교회 공동체를 창설한 직후 \”재건된 형제단(Obnovena Jednota bratrska)\”을 설립하였다. 오흐라나의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m)\”(앵글로 색슨 지역에서는 이것을 모라비아 형제단 – The Moravians이라고 한다), 이 \”형제의 연합\”은 후에 전세계 선교 활동을 폈고 힘든 반종교개혁 시기를 극복하는 체코 형제단의 부유한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었다. 체코 종교개혁의 유산은 언제 어디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추방자들의 쓰라린 고통에 관심을 기울임 없이 우리는 이 장(章)을 여기서 마무리할 수 없다. 추방자들 가운데 견디기 어려운 자들 일부는 집으로 돌아와 로마 카톨릭 교회로 자발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대다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짐을 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그들은 오늘날 민족과 나라가 높은 가치가 되지 못함을 증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민족과 나라 위에 있고 모든 세계가 그에게 속해 있다.

[개혁교회사]5.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 1575-1621

5. 체코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 1575년 – 1621년

유럽의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불행하게도 종교개혁파 자체 안에 역사적 지역적인 요인뿐 아니라 신앙적인 요인에 의해 초기에 몇 가지 신앙고백 흐름들로 나뉘어졌다. 체코 지역에서 16세기 후반에 모든 개혁파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내적인 에큐메니칼 필요성보다는 반종교개혁의 위협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체코와 모라비아에서 개혁파들이 대체로 세 가지 부류의 교회로 나뉘어졌다 : 첫째, 전통적인 구(舊) 양종성찬파와 보다 개방적인 신(新) 양종성찬파로 나뉘어진 후스파 교회(양종성찬파 교회). 둘째, 독일인 교인들인 루터파 교회. 셋째, 체코와 독일 공동체들을 갖고 있는 형제단(Jednota bratrska)이다. 로마 카톨릭 합스부르크(Habsburk) 통치 동안 –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가 체코 왕위에 올랐던 1526년부터 – 로마 카톨릭교회의 반개혁운동을 강화하였다. 그 때 그들의 대표들은 의회에서 단지 13%를 차지했을 뿐이다.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체코왕국의 개혁파 의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전술적이고 정치적인 단계로 황제측근의 재카톨릭화 노력에 제동을 걸고 후스파의 “꼼팍따아따”의 협정에 따라 체코 왕국 내의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고 특별히 노력하였다. 반면에 급진적인 개혁파들은 재카톨릭화 노력에 대항해서 체코 왕국의 법령으로부터 “꼼팍따아따”의 협정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 협정이 체코 왕국의 개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카톨릭의 점증하는 탄압에 저항하기 위하여 국내 개혁파들은 신앙과 고백의 문제, 자신들의 예드노따(團)를 선언하는 집단행동으로 나타났다. 1575년 체코 국내 의회에서 개혁파들의 새로운 공동신앙고백과 교회 정치체제에 대한 황제의 이해에 근거하여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신앙고백 작성을 위해 신학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신학 위원회에 모든 개혁파 의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소위 “체코 신앙고백”(Confessio bohemica, 1575년)이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 고백의 형태에 입각해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후스파의 “4개의 프라하 조항”이 부분적으로 그리고 몇 몇 후스파 총회의 선언서, 부분적으로 제 2 차 스위스 개혁파 신앙고백(helvestska konfese), “형제단”의 신학적인 방향에 부응하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교리와 결합하였다. 종교개혁의 내용을 담음으로써(Sola gratia, Sola fide, Sola scriptura) –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체코 신앙고백의 저자는 체코 종교개혁의 특징을 성공적으로 강조하였다. 후스파 계열들은 증언적인 진실한 기독교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에 대해 강조를 하였고, 그리고 형제파 계열은 교회의 설교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믿음의 열매”에 대해 강조하였다.

“체코 신앙고백”은 외교적인 이유로 루터 신앙고백과 관련이 맺게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이 초기 에큐메니칼 종교개혁 문서는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흐름과 체코 종교개혁의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체코 신앙고백”의 그러한 특성 때문에 체코 개혁파들은 신학적인 침체와 신앙고백의 자만심을 피하게 되었고 에큐메니칼적으로 개방성을 갖게 되었다.

“체코 신앙고백”의 에큐메니칼 개방성은 믿음의 선물(은사)에 대한 깨달음의 특징이 되었다. 1575년 5월 17일 막스밀란 2세(Maxmilian II) 황제에 의해 “체코 신앙고백”이 선포되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황제의 약속에 의해 체코의 개혁파 의원들은 만족해야 했고, 그들은 계속적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1609년 루돌프 2세(Rudolf II) 황제로부터 체코왕국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뿐 아니라 체코왕국의 법령에 그것을 포함할 것을 힘쓴다는 “황제의 헌장”(Majestata)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황제의 헌장”은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 참여를 지향하고 있는 “체코 신앙고백”의 문장 가운데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것은 “체코 신앙고백”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형제단의 교인이며 칼빈의 제자인 이지 스뜨레이쯔(Jiri Strejc)의 영향이 컸다. 로마 카톨릭쪽은 개혁파들이 연합하려는 노력을 막는 새로운 시도를 실패하였다. 완전한 종교자유는 새로운 개혁적인 활동의 길을 열었다. 성경과 찬송가, 영성 훈련, 신앙서적 등의 개혁파들의 종교서적은 지속적으로 더 많은 판수를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이 시대는 후에 체코 종교문학의 “황금시대”로 불리워졌다.

유럽에서의 새로운 정치발전과 체코지역에서 개혁파 의원들간의 불일치로 결국 체코종교개혁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개혁교회사]4.유럽,체코 종교개혁의 만남 1517-1575

4. 유럽종교개혁과 체코 종교개혁의 만남 1517년 – 1575년

백년 후 체코종교개혁은 독일 종교개혁의 영적인 지원을 받았다. 후기 후스파는 믿음과 정치적인 지지 안에 있는 자신들의 개혁형제들인 루터(Martin Luther)와 멜란크톤(Melanchthon)을 알았다. 1519년 라이프찌논쟁에서 마르틴 루터는 후스파들의 편에 섰다. 후스파들은 루터의 활동을 얀 후스의 계승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루터의 어록 – “후스는 진리 때문에 화형을 당했고 후스파들은 좋은 기독교인들이다” – 을 알고 있다. 얀 후스의 글들과 후스파 신학자들의 글들이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반대로 루터의 글들이 체코어로 번역이 되었다. 후스파 학생들은 독일 개혁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토마스 뮌쩌(Tomas Muntzer)가 루터의 지지자들처럼 1521년 프라하에 초청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인 선언서(Manifesto)”를 통해 체코형제들의 호응을 얻으려고 하였다. 꼼빡따아따 협상에 만족하지 않는 점증하는 후스파들이 루터의 도움으로 원래의 후스파 종교개혁의 원칙을 철회할 수 있었다: 모든 삶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는 것이다. \”오직 믿음에 의한 의로움\”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이 후스파들 간에 점점 큰 반응이 되어 일어났고 그래서 16세기 중엽에 루터의 가르침은 \”구 후스 양존성찬파\”로부터 신진 후스파를 분리시켰고 그들은 자신의 \”신양종성찬파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체코 개혁파들은 복음의 자유의 능력에 대한 루터의 증언이 자신들의 주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으로 형제단은 도덕적인 강조와 칭찬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수동적인 관점을 거부하였다. 루터는 형제단에게 복음의 더 큰 기쁨의 길을 보여주었고, 더 온전한 이해와 성서적인 증언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완전한 사랑과 진리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단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빠져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주목하자. 그들은 말씀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았다. 성서 중심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루터파들보다 더 엄격하였다. 처음에는 독일 개혁파들과 조심스럽게 관계를 맺었다. 왜냐하면 형제단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실천적인 삶과 언행이 일치하는 교회의 설교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자유에 대한 루터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독일 개혁파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만찬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여러 차례의 서신으로 루터와 신학적 논쟁을 하였다. 마침내 루터가 형제단의 기독론과 교회의 설교에 대해 매우 전향적으로 언급을 하자, 양쪽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지만 \”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각자의 은사로\” 상호 섬기게 될 것이라는 형제단의 동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프라하의 루까쉬(B. Lukas Prazskeho)가 라틴어로 쓴 \”성서의 자기변호(Apologie svatych Pisem)\”는 루터와 멜란크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의 루터 종교개혁의 발전은 형제단에게 자신의 나라에서의 공개적인 활동을 부추겼다. 루터파의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ska konfese)\”의 출판 이후 1535년 \”형제단의 신앙고백(Bratrska konfese)\”이 발표되었고 이것을 루터 자신이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여 추천의 글을 첨부하였다. 후에 형제단은 스위스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접촉 – 특별히 쭈리히의 즈빙글리(H. Zwingli) 스트라스 부르그의 부커(M. Bucer) 그리고 제네바의 칼빈(J. Calvin) – 하였다. 형제단은 자신들과 매우 가깝게 생각되는 그들의 교리와 장로교회의 정치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1544년 까렐(Karel, Charles) 황제 5세에게 보내는 교황에 항의하는 \”경고의 편지\”라는 자신의 글에 얀 후스의 유산을 상기시켰다. 그는 콘스딴츠에서의 얀 후스의 설명과 그의 죽음을 로마 교황청의 지속되는 배신의 증거로 규정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을 존중했지만 형제단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형제단은 교회의 사제제도를 유지하여 교회의 평신도 지위에 대한 보장을 염려하였다. 그것은 침묵하시는 사랑의 그리스도의 음성을 복음으로부터 듣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의 신앙심은 조용하고 감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 교회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은 것은 믿음 안에서 어떠한 폭력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양대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찬송은 점점 상호 풍성하고 상호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 종교개혁 찬송가는 체코어로 번역되었고 반대로 많은 체코 개혁파들의 찬송가 가사와 곡들이 독일어 찬송가에 포함되게 되었다. 형제단은 많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편들을 자신들의 찬송가로 받아들였다. 2차 종교개혁(번역자 주 – 체코교회는 후스종교개혁을 1차 종교개혁으로 그리고 루터 칼빈의 서유럽 종교개혁을 2차 종교개혁으로 이해하고 있음)의 교회들과의 생생한 에큐메니칼 관계와 그들의 정신적인 지원 때문에 형제단은 혹독한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폴란드로 활동을 확대하어 폴란드의 소수파인 개혁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개혁교회사] 3. 형제단 1457년 – 1621년

3. 예드노따 브라뜨르스까(Jednota Bratrska : 형제단) 1457년 – 1621년

후스파의 급진개혁의 첫 시기는 특별히 형제단의 종교개혁을 자극하였다. 로마와의 타협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급진적인 후스파 진영에서 15세기 후반에 (뽀제브라디의 이지 Jiri z Podebrady 라는 후스파 왕이 통치) 새로운 개혁세력이 일어났다. 이 개혁 세력이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이다. 이들은 남보헤미아 종교사상가 뻬뜨르 헬취쯔끼(Petr Chelcicky)의 가르침과 프라하 후스파 감독 얀 로끼짜나(Jan Rokycana)의 설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신실한 신앙인들 그룹이었다. 이들은 악한 세상과 구별되기를 바라며 1457년에 동 보헤미아 지역의 쿤발트에 정착해서 복음 안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형에 따라 올바르게 기독교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로는 수도승 제호즈 프라슈끼(Rehor Prazsky), 후스파 사제 잠베르크의 미하엘(Michael ze Zamberk)이다.

“침묵의 왕”과“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으며 “좁은 길”을 따르는 삶을 노력하였다. 첫 10년 간 형제단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후스파 교회들과 관련된 마지막 사슬을 끊어버린 보헤미아의 발덴-따보르 교회 시대를 살아온 가장 연장자 사제에 의해 안수를 받은 자신의 사제들을 선출하였다. 쿤발트의 마데이(Matej z Kunvaldu)가 형제단의 첫번째 사제가 되었다.

형제단의 신학자와 설립자들로 중요한 인물들은 형제단의 신학자와 조직가로 루까쉬 프라슈끼(Lukas Prazsky), 루터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이며 찬송가 작곡자 얀 아우구스따(Jan Augusta), 유명한 신학자, 소설가, 음악신학가, 신약 성서 번역가 얀 브라호스라프(Jan Blahoslav), 시편을 시적으로 번역한 신학자 이지 스뜨레이쯔(Jiri Strejc) 등이다.

형제단은 체코 종교개혁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비록 형제단은 미약한 소수 민족이었고 그의 역사는 순교역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16,17세기의 체코의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형제단의 신앙고백, 교리, 교회 조직과 찬송가 외에 자신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 끄랄리츠까 성경(Bible kralicka)이 그 증거가 된다(역자 주: Bible kralicka- 간단한 주석이 곁들여진 6권으로 된 체코어 성서, 1579-1593년 모라비아의 끄랄리체에서 출판됨). 교회 규율의 강조점으로서 형제단은 교회의 칼빈적인 개념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신학에 더 가까웠다.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형제단의 개념은 라틴어 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 In principiis unitas, in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연합의 원칙으로, 의심 없는 자유로, 모든 사랑으로)

형제단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마지막 감독 얀 아모스 꼬멘스끼(Jan Amos Komensky 또는 Comenius 1592-1670)이다. 전유럽에서 그는 신학자로 교육자로 과학자로 민족 간의 평화를 위한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절반을 반종교개혁시대에 망명자로 외국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교육과 언어학의 업적으로 “민족의 선생”이 되었다. 미래 에큐메니칼 기독교 사회와 국제평화 협력의 비젼에 대한 그의 제안으로 새로운 시대의 길을 여는 파이어니어가 되었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일반적인 상담(Obecna porada o naprave veci lidskych)”이라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관련해서 그의 영적인 유산은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가 있다. “모든 것에 대한 교정(Panorthosia)” 제하의 제6권은 종교, 철학, 과학과 정치에서의 인간관계의 발전에 대한 제안이 그 내용이다. 30년 전쟁 기간에 망명중인 꼬멘스끼가 “세계의 미궁(Labyrint sveta)”에서 자신의 민족에게 내적인 “마음의 천국(raji srdce)”에 대해 가르쳤다.

꼬멘스끼는 개인의 회심과 모든 기독교인들의 회개로 교회와 세상의 갱신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1650년에 출간된 “형제단의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산”에 교회와 개혁주의 형제들에 관해 가장 감명깊게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일 뿐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실 분이며 마지막 날에 오실 분임을 확고하게 믿는 믿음이 꼬멘스키가 자신의 가장 어려운 삶의 문제를 멈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얀 아모스 꼬멘스끼는 형제단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저술 활동으로 당시 전유럽에 체코종교개혁의 영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동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