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1999년의 체코 성탄절 풍경

나눔터 제 2 호 (1999년 12월 5일 발간)
목사  이 종 실
 
[살며 생각하며] 1999년의 체코 성탄절 풍경 소고(小考)

  교회에서는 성탄절기를 대강절이라고 한다. 성탄절인 12월 25일 이전 네 번째 일요일에 시작되는 대강절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를 기다림이다. 상술로 찌든 성탄절기에 익숙한 나에게 기다림과 설레임이 자연스럽게 스며나는 체코 성탄절기의 분위기는 그 날을 기다리는 참맛을 깨우쳐주었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모두들 함께 즐거워하는 거리의 문화행사들, 대강절이 시작되면서 검소하게 내걸린 상점들의 성탄장식, 동네 마을 광장에 세워진 조그마한 성탄나무 한 그루, 그 나무를 무대로 성탄노래를 합창하는 동네 초등학교, 유치원 학생들,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성탄선물을 파는 간이 가게들, 그리고 성탄나무를 쌓아 놓고 파는 곳에서 풍기는 향긋한 솔냄새와 잉어장수의 비린내가 어울리는 성탄절기 후각이 한층 성탄절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성탄풍경들은 대강절이 시작될 때 비로소 하나씩 둘씩 거리를 장식하면서 점점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설레임이 느껴진다.

  그러나 1999년은 11월 마지막 주일부터 시작되는 대강절이 이미 11월 초부터 백화점과 상점들에 찾아들었다. 상술의 번뜩이는 재치로 백화점과 상점들은 앞다투어 요란한 성탄장식을 하고 있다. 체코혁명 십년만에 보게되는 체코사회의 또 하나의 변화이다. 천년의 마지막 성탄절을 기해 더 많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상인들의 “기다림과 설레임”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기다림”에는 고통과 희망이 공존한다. 고통 받는 자들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이란 아비 친척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고통을 스스로 원하는자들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대적함으로써 겪게되는 아픔과 시련으로 기뻐하는 자들이다. 이 시련을 겪어야만이 새벽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참된 희망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 20일 바츨라프 광장에서 1989년 11월 혁명 1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여기에서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10년 전 자신의 구호를 다시 외쳤다.

“진실과 사랑은 반드시 거짓과 증오를 이깁니다.”

  참된 희망을 소유한 사람만이 진실과 사랑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고통 속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눅1:46-47)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로서, 순례의 길을 떠난 성도들로서 외로움과 고통을 서로 나누며 기다림의 계절에 마리아 처럼 우리 모두 함께 희망을 노래하자.

[살며 생각하며] 나눔터 창간호를 내면서

[살며 생각하며] 나눔터 창간호를 내면서

요즈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각종 설문과 대담, 그리고 관심들 속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과거보다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는 세기가, 그것도 밀레니엄이 바뀌면서 하루아침에 도적처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생관과 생활관의 변화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계획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각종 환상과 우상을 타파하고 인생의 행복의 본질과 새로운 시대의 표상을 바라보는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공산 동구권과 구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지금 세계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긴장에서 “지구화” 또는 “세계화”의 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긴장을 세계 교회들은 주목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을 평가하면서 아울러 3분의 2의 세계를 소외시키고 문화를 자본과 정보에 의해 창출하는 부정적인 측면의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교회들은 연대를 하며 세계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이를 위한 세계교회의 연대는 선교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소위 서구 기독교 문명 국가들의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배치되는 식민지 팽창에 기반을 둔 제국 건설로 상호 경쟁국들을 구축해 내려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의 시대적인 조류에 편승한 복음 확산과 그리고 그들 국가들 간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류 최악의 재앙은 필연적으로 세계 교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선교를 재 숙고케 하고 선교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계교회의 일치와 연대가 선교를 위한 전략적인 필요가 아니라 교회들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이 “개인의 회심과 교회 성장”을 토대로 전세계적으로 일치해서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인류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한국교회의 교파주의 개 교회주의는 아직 세계교회의 세계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신앙의 독특성(은사)을 세계 교회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마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성서에 나오는 무익한 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독특성과 신앙 전통을 다른 신앙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나눔”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세계교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은사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아울러 우리들의 부족한 모습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선교입니다. 선교역사는 자기 갱신과 복음의 확산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해외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과 신앙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특히 체코는 세계종교개혁의 출발지로 체코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개혁교회의 신앙 유산들은 가히 개혁교회의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성지에서 체코 기독교인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나눔을 위해 지난 10월 3일부터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체코-한국 에큐메니컬 예배”는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나눔이라는 이 예배의 취지를 활성화하고 심화 발전시키기 위해 예배의 소식지를 월보로 발간하여 체코개혁교회의 신앙의 유산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이 소식지가 가족 같은 작은 공동체인 체코의 한인가족들을 위해 조그마한 섬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언어 장애와 극심한 문화의 차이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생활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체코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인가족들을 위해 개인 개인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생활정보를 수집해서 함께 나누는 일,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 간에 서로 따뜻한 마음이 흐를 수 있는 한인가족들의 소식도 함께 나누는 일에 이 소식지가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일을 이해하고 자원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이 없었더라면 소식지 발간의 계획은 마음 속에 접어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체코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나눔과 한인들의 따뜻한 마음의 나눔을 위한 섬김”이라는 이 소식지의 본래의 취지에 따라 더 뜻 있고 예쁜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 소식지의 이름을 [나눔터]라고 결정했습니다.

  지면으로나 내용 면에 있어 부족하기 짝이 없고, 앞으로 체코어판이 발간되기까지는 절름발이에 불과합니다만 나눔의 섬김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한결같은 지도와 편달, 그리고 격려와 후원을 바랍니다.
 
나눔터 제 1 호 (1999년 11월 07일 발간)

목사 이 종 실

반감(反感)을 일으킨 기독교 선전.

반감(反感)을 일으킨 기독교 선전.

체코언론은 최근 인구조사가 보여준 감소된 기독교 인구 10% 즉 백만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토론을 시작하였다. 1990년 불신자가 전인구의 39.9%였던것이 현재 58%이된 원인이 많으나 누구도 이렇게 큰폭으로 기독교인구가 감소한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언론이 이 토론에 참여하게 된것같다.

명백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1989년 보도자료들이 무리지어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선전 하였던 것 처럼 혁명이후 그 자료의 주요한 내용이 변화하였고 기독교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었다. 심지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많은 프라하 기자들이 공산주의에서 기독교인으로 날마다 변하고 있다.

그러한 체코 엘리트의 내적인 사상의 변화의 동기는 사회학적인 연구를 포기케 하였다. 체코인은 10여년간 방어적인 메커니즘을 구축한것에 반대하는 가르침의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주요 뉴스 즉 공중파 텔레비전 뉴스의 사회자가 교황을 “성부”로 표현할 때 절대다수의 국민(불신자와 개혁교도)들에게 요한 바울 2세 교황이 김정일 보다 더 거룩한 아버지가 아님을 숙고하지않았다.

부활절기나 성탄절기에 공공언론은 기독교 풍습을 기껏해야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성경 이야기를 각색한다. 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 방영은 대다수의 비신자 국민들에게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방송은 사상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한다. PD들은 이러한 점에서 방송 자질이 없다.

몇몇 “비좌파” 체코신문들이 조직적인 기독교선전에 점점 더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다. 첫눈에 하나님 또는 창조주 단어가 많은 기사의 제목이 들어온다. 한 신문이 톱기사로 “신자수 감소…” 제하의 최근 인구조사 결과를 다루었다. 왜 중복어를 사용하는가?(번역자 주 –체코어에서 ‘신자’는 영어식 표현을 빌려 바꾸자면 ‘believer in God’이 된다. Believer로 충분하지않고 in God을 덧붙인다. 이것이 저자가 의미하는 ‘중복어’(pleonasm) 이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믿는 신자들(“성삼위일체”-맑스, 엥겔스, 레닌/스탈린을 믿는 사람)이 있기때문인가? 톱기사는 어울리지않게 넓은 지면에 신앙과 관련된 제목을 달았다.

기독교 도덕에 대해 숙고하고 십계명을 분석하고 인터뷰로 정치인들의 신앙에 대해 조사를 한다. 신문기사들은 체코 기독교 전통과 현재 그리고 (특별히 카톨릭)교회 간의 짧은 연합을 대중적으로 형성하였다. 이들 신문들은 모든 일반적인 언론의 중립성과 신앙에 대한 질문이 공개적으로 토론이 되지않는 사람의 개인의 문제라는 원칙에 대한 프랑스의 좋은 규칙을 배우려하지 않는다.

모든 노력에서 우리의 언론의 종교 선전이 국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기독교 선전을 외면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금번 인구조사에 반영되었다. 혁명이후 공산주의 세뇌를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신앙인이 되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적지않은 비율이 “종교 없음” 항목에 기쁘게 표시를 하였다.

마르틴 다녜스 / 소설가, 정치학자
(2001.07.17)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위기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위기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교육이 19세기와 다르지 않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대주교 Giuseppe Pittau가 더 나은 상황으로의 변화에 대한 협상을 위해 바티칸에서 왔다. 프라하 대학(까렐 대학) 총장 이반 빌헤름과 전례 없는 협상하였다. 만약에 교육부 장관 에두아르드 제만이 동의를 한다면 현재의 학장은 사이마고 대학은 총장의 “강제적인 행정”아래 들어가게된다.

현재 학장직(야로슬라브 바츨라브 뽈체)를 “행정책임자”로 교체해야한다. 까를로베흐라드스끼 감독 도미닉 두까가 학장직을 대신하게된다.

“그러한 집단으로 학생들의 강의와 학생으로그램의 진행이 어렵다.” 아카데믹 세나뜨(Academic senate – 번역자 주: 1년 임기로 학생과 교수가 50:50으로 참석하여 대학의 교수임용, 학생 입학 휴학 재적 정학 등 학사 및 학교운영을 결정하는 기관)에서 총장 이반 빌헤름이 말했다. 현재 전임강사(docent)의 평균연령dl 67세 이상이며 그리고 교수의 숫자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문제들은 그러나 교수의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톨릭 신학부가 199연대부터 같은 교육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 대학이 기본적인 변화를 하였지만 카톨릭 신학부의 학생 프로그램은 발전이 없었다.” 대학 대변인 바츨라프 하옉이 말했다.

교회와 대학이 상황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카톨릭 신학부 학장이 신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대학의 현재활동이 탐탁치 않는 보수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 신학부가 재승인을 받아야 될 정도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카톨릭 신학부를 통솔하지 못한다. 신학부내의 기관들이 활동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체코 비숍회의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이 말하였다. “프라하 카톨릭 학부가 게토화되어가고 있을 때” 유럽의 다른 카톨릭 학교들은 국제화 되어가고 있다. “강의들이 대학의 다른 학부의 학생들이 참여 하도록 일련의 행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헤르만이 말했다.

그러나 학장 뽈쯔는 “카톨릭 신학부는 좋은 결과를 가졌고 익명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은 만족해하고 있다.”고 얼마전에 발표하였다.

카톨릭 신학부가 약간의 변화를 추진하였기에 현재 학장의 지위를 지킬 수 있다.

“교육부 장관이 중요한 혐의로 인해 카톨릭 학장의 몇몇 권한을 박탈할 수 있다. 카톨릭 신학부는 몇 가지 변화를 실행하여서 권한 제한의 필요성이 아직 불확실하다.” 교육부 법 전문인 얀 예쉐띠츠끼가 말했다.

교육부에 해당되는 바티칸의 카톨릭 교육 회의가 프라하 카톨릭 신학부의 상황을 처음에 다루지 않는다. 추기경 미로슬라브 블륵이 바츨라프 볼프 당시 학장 선출을 거부하였을 때인 작년초에는 바티칸이 개입하였다. 볼프의 반대자들이 19세기에 받아들여졌던 신학교육 스타일을 장려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 외 문제로 몇 몇 교수들의 과거 전제통치의 안기부와 관련성을 갖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카톨릭 신학부는 당시 평신도의 입학이 거의 없었고 여성의 입학을 회피하였다.
(2001.06.18)

체코 로마카톨릭 교회 충격

체코 로마카톨릭 교회 충격, 10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카톨릭 교인 수

2001년 3월 5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인구조사 자료 가운데 체코 공화국의 15세 이상 1036명을 선별한 표준검사에서 40%의 카톨릭 교인 수가 22%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회에 충격을 주고있다.

무신론자 72.63%
로마카톨릭 22.44%
개혁교회(체코형제개혁교회) 2.32%
체코슬로바키아 후스 교회 0.58%
기타 개신교회 0.77%
기독교 이외의 종교 (제7일 안식교, 유대교 등) 1.26%

연령별로 본 무 종교(체코에서의 무종교는 무신론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15-19세 92%
20-29세 79%
30-44세 81%
45-59세 68%
60세 이상 51%

지역별로 본 무 종교 인구
체흐(보헤미아) 76% 모라바 67%
10만 이상 도시들 평균 78%

정당별로 본 무 종교 인구
사민당(CSSD) 76% 시민당(ODS) 76% 기독교민주당(KDU-CSL) 37%
자유연합(US) 76% 기타정당 73%

인구조사에서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해 종교에 대한 설문은 반듯이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항목으로 분류되었다. 이에 대해 카톨릭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종교에 대한 설문에 모두 응답을 해주기를 요청하는 광고방송을 하였고 정부는 종교법 저촉의 이유를 들어 광고 방송 금지를 하였고 이에 반발한 광고 회사들이 거리의 대형 광고판에 신부가 영세를 주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금지된 고객“이란 글귀를 넣은 광고를 하여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2001년 인구조사의 자세한 결과는 앞으로 더 기다려야 되지만 표준검사가 보여준 종교에 관한 설문조사의 결과로 체코 카톨릭 교회는 충격을 받고 그 원인 규명에 대한 논란이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논의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통계의 정확성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 22% 교인의 성격 규명에 대한 문제이다. 22%가 예배와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교인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이다.
셋째, 22%는 실제로 카톨릭 교인 수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0년 전 1991년 인구조사의 40%는 혁명직후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넷째, 감소의 원인을 교회 외부에서 찾지 말고 교회 내부의 문제 안에서 발견해야 된다.

인구조사의 결과는 교회의 선교의 우선순위가 청소년들의 종교 교육임을 보여주고 있고 지역별 통계는 모라바인들이 더 종교적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

카톨릭을 포함한 체코 교회들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설정, 종교에 대한 사회의 이해의 분위기와 그리고 내부적으로 사회주의 아래서 형성된 교회의 제도와 교회의 신학적인 개념의 변화가 새로운 사회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들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체코 교회들은 “애굽의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해가는 여행”으로 이해하며 희망을 잃지않고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1.05.08)